도라고 이름 붙인 산

이도명산의욕관 爾名山意欲觀 도라고 이름 붙인 산을 보고 싶어서

 

 

장려종일고제반 杖藜終日苦 攀 지팡이 짚고 온종일 고생고생 올라갔었지

 

 

행행홀견산진면 行行忽見山眞面 가고가다 홀연히 산의 참 모습을 보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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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행홀견산진면 行行忽見山眞面 가고가다 홀연히 산의 참 모습을 보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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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자고비수자원 雲自高飛水自湲 구름은 절로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흘러가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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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행홀견산진면 行行忽見山眞面 가고가다 홀연히 산의 참 모습을 보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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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자고비수자원 雲自高飛水自湲 구름은 절로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흘러가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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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정책을 쓴 조선시대는 불교의 암흑기였다 .

 

억불숭유(抑佛崇儒)가 국시가 되어 불교의 박해와 멸시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많은 스님들이 수모를 겪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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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행홀견산진면 行行忽見山眞面 가고가다 홀연히 산의 참 모습을 보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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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자고비수자원 雲自高飛水自湲 구름은 절로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흘러가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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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정책을 쓴 조선시대는 불교의 암흑기였다 .

 

억불숭유(抑佛崇儒)가 국시가 되어 불교의 박해와 멸시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많은 스님들이 수모를 겪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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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수난기에도 불교는 그 명맥을 잘 이어 왔다 .

 

온갖 억압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이는 여러 고승들의 수행과 선근 깊은 사람들에 의해 도태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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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행홀견산진면 行行忽見山眞面 가고가다 홀연히 산의 참 모습을 보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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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자고비수자원 雲自高飛水自湲 구름은 절로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흘러가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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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정책을 쓴 조선시대는 불교의 암흑기였다 .

 

억불숭유(抑佛崇儒)가 국시가 되어 불교의 박해와 멸시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많은 스님들이 수모를 겪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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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수난기에도 불교는 그 명맥을 잘 이어 왔다 .

 

온갖 억압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이는 여러 고승들의 수행과 선근 깊은 사람들에 의해 도태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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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1515-1565) 선사는 조선조 불교를 위해 순교한 고승이었다 .

 

명종 때 문정대비(文正大妃)의 신임을 받아 봉은사의 주지에 임명된 후 승과제도의 부활 등 불교중흥에 안간힘을 쓰다가 끝내 문정대비가 죽자 유생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타살을 당하고 만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까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라는 상소를 올려 보우의 논죄를 주장했고, 마침내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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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행홀견산진면 行行忽見山眞面 가고가다 홀연히 산의 참 모습을 보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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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자고비수자원 雲自高飛水自湲 구름은 절로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흘러가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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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정책을 쓴 조선시대는 불교의 암흑기였다 .

 

억불숭유(抑佛崇儒)가 국시가 되어 불교의 박해와 멸시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많은 스님들이 수모를 겪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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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수난기에도 불교는 그 명맥을 잘 이어 왔다 .

 

온갖 억압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이는 여러 고승들의 수행과 선근 깊은 사람들에 의해 도태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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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1515-1565) 선사는 조선조 불교를 위해 순교한 고승이었다 .

 

명종 때 문정대비(文正大妃)의 신임을 받아 봉은사의 주지에 임명된 후 승과제도의 부활 등 불교중흥에 안간힘을 쓰다가 끝내 문정대비가 죽자 유생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타살을 당하고 만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까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라는 상소를 올려 보우의 논죄를 주장했고, 마침내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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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보우 스님의 탁월한 문재와 오도관이 엿보이는 시이다 .

 

원제목은 오도산에 올라서(登悟道山)이다 .

 

수도의 세계를 등산에 비유하여 담담히 읊은 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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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행홀견산진면 行行忽見山眞面 가고가다 홀연히 산의 참 모습을 보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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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자고비수자원 雲自高飛水自湲 구름은 절로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흘러가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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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정책을 쓴 조선시대는 불교의 암흑기였다 .

 

억불숭유(抑佛崇儒)가 국시가 되어 불교의 박해와 멸시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많은 스님들이 수모를 겪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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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수난기에도 불교는 그 명맥을 잘 이어 왔다 .

 

온갖 억압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이는 여러 고승들의 수행과 선근 깊은 사람들에 의해 도태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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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1515-1565) 선사는 조선조 불교를 위해 순교한 고승이었다 .

 

명종 때 문정대비(文正大妃)의 신임을 받아 봉은사의 주지에 임명된 후 승과제도의 부활 등 불교중흥에 안간힘을 쓰다가 끝내 문정대비가 죽자 유생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타살을 당하고 만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까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라는 상소를 올려 보우의 논죄를 주장했고, 마침내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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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보우 스님의 탁월한 문재와 오도관이 엿보이는 시이다 .

 

원제목은 오도산에 올라서(登悟道山)이다 .

 

수도의 세계를 등산에 비유하여 담담히 읊은 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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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큰스님 글 .

 

월간반야 2008년 6월 제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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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이기고 사는 지혜

한 때 마산 포교당 정법사에 있을 때 교도소에 가서 재소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을 위한 법문을 한 적이 있었다. 약 200여명의 재소자들이 강당에 모여 있었는데 불우한 재소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될지 설법을 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말을 시작한다는 게 대뜸 여러분들이 왜 여기에 오게 되었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연의 실마리를 묻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고 이들에게 좀 더 강한 자기반성을 유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답을 대신할 수 있는 한마디를 던지고자 하여서였다.

나는 이들에게 “여러분들은 순간의 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기 와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령 폭력을 휘둘렀다가 남에게 상해를 입혀 폭행죄로 온 사람이 있다면 조금만 참고 화를 삭였더라면 좋았을 것이고 절도죄나 강도짓을 하다가 온 사람의 경우는 그도 분명히 탐욕의 충동을 자제하고, 순간의 한 생각을 비웠더라면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재소자 중의 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너무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을 받았다면서 교도소 소장실로 찾아와 일부러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의 행위는 순간의 그릇된 생각 하나 때문에 일어나 평생을 후회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때문에 순간의 감정을 극복하는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하거나 어처구니없는 비극을 초래하는 수도 있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던 미모의 여성 연예인이 충동적인 자살을 감행하여 그 여파가 나라 안에 파급되어 자살문제가 언론마다 거론되었다. 방송보도에 의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자의 수효가 한 해에 1만3천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하루 평균 35명이 자살을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자살자의 대부분이 순간적 충동에 의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고민이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풀리지 않는 현실의 문제가 죽고 싶은 심정을 안겨 줄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 영원히 나를 절망시키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한 때의 고통일 뿐 참고 견디고 나면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것도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본래는 비어 있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공적지심(空寂之心)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은 빈 그릇처럼 마음의 본체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비어 고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괴로움을 느끼고 절망을 느껴 죽고 싶은 이 마음이 본래 내 마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비워 고요한 본래 마음을 지키면서 객진번뇌를 이겨, 손님처럼 찾아와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슬픔이나 괴로움을 스스로 달래가면서 살아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의 번뇌를 객진번뇌(客塵煩惱)라 한다. 본래 없었던 번뇌가 내 집에 찾아온 손님처럼 내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외우고 있는 반야심경에는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다고 하였다. 오온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이다. 육체 자체는 물질적 요소인 색(色)이고 정신작용에 감수, 표상 생각의 움직임, 그리고 주관이 객관을 대하여 최종 인식하는 네 가지를 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 한다. 이는 마음의 심리적 환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오온이 공하다는 것은 내 자신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무아(無我) 혹은 아공(我空)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을 이 무아나 아공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렇게 하면 확실히 내 고민의 무게가 줄어들 것이다.

문둥병에 걸린 불우한 청년이 있었다. 부모 형제도 없는 천애의 고아였다.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 비관하다가 자살을 결심해 산으로 들어갔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든지 나무에 목을 매어 죽기로 마음먹었다. 산속으로 들어갔더니 바위 밑에 굴이 하나 있었다. 들여다보았더니 사람이 한 사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한 생각을 하였다. 그랬더니 굴속의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혼자 굴속에서 좌선을 하던 스님이었다. 그는 문둥병 청년을 보고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사실은 마음이 괴로워 살 수가 없어 죽으려고 왔다고 하였다. 스님은 내가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테니 마음을 내게 보여 달라 하였다. 청년은 마음을 어떻게 보이느냐고 되물었다. 마음은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니므로 마음을 꺼내 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스님은 마음을 꺼내 줄 수가 없다면 괴로움도 꺼내 줄 수가 없는 것이라 고 하였다. 문둥병 청년은 괴로워 죽고 싶어 산으로 갔다가 괴로움도 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크게 느낀 바 있어 스님을 의지해 출가를 하였다.

중국 선종사에 나오는 일화의 한 토막이다. 지금 우리는 순간의 한 생각을 이기고 사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1월. 제96호

버리지 못하는 이유

다들 그랬지만 예전엔 버릴게 없어서 버리지 못했다. 적어도 오두막이라도 내 집을 갖기까지는 말이다.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하나라도 모으면서 산다는 게 행복이었다. 살림살이 가재도구, 책 한권이라도 늘어나는 게 대견스럽고 며칠을 두고 보고 또 보곤 했다. 주거문화가 바뀌어 아파트 바람이 불고 난 한참 뒤에야 지인의 도움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버리는 문제로 고민을 해봤다. 이재(理財)에 관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좀 자주 이사도 하고, 집도 사고팔면서 살았다면 그때마다 불필요한 것을 버렸을 텐데 말이다.

꼭 20년 하고도 6개월 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노인네를 모시고 살다보면 아무리 젊은 사람들이 이사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하여 10여 년을 살고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니 환갑을 갓 넘긴 노모께서는 아침 식사 후면 3년 반을 어김없이 버스를 타고 예전에 살던 동네로 출근을 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는 아예 다시 이사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10년 쯤 살고는 혹시나 싶어 직장 가까이로 집을 옮기면 어떨까 하여 노인에게 뜻을 비쳤다가 “내 죽고 나거든 가거라!” 하는 한마디에 말문을 닫았다.

한 집에 20년 쯤 살다보니 자연히 이곳저곳 손 볼 곳이 생기고 불편한 점이 많아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간신히 노인네의 허락(?)을 받았다. “너희가 좋다면 가자.”는 석연찮은 대답을 듣고 이사한 지 한 달이 된 지금도 전전긍긍이다.

‘포장이사하면 쓰레기도 다 가져다 놓는다’는 말을 듣고는 몇 주일을 고민하여 이웃의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 아예 버릴 것, 텃밭에 갖다 놓을 것 등을 분류하면서 고민했다. 집의 크기는 비슷했지만 정말 이제는 빠듯한 것보다는 여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신적 물질적 여유도 중요하지만 시간적 공간적 여유도 찾고 싶었다. 전자와 후자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삶의 공간적 여유는 무언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작 이사를 해 놓고 보니 버리지도 못하면서 짐이 되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때는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좋아라 보던 가족사진들, 아내가 학창시절에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들어 가지고온 가리개와 곡식과 잡곡들로 모자이크된 작품들, 십여 년 전 교사불자회 회원들과 통도사 극락암에 들렀을 때 ‘경봉 큰스님’께서 주석하셨던 ‘삼소굴(三笑窟)’의 허물어진 담장 앞에서 아내와 같이 찍은 사진을 후배가 커다란 액자에 넣어 준 것, 예전에 직장 동료로부터 받은 40호 크기의 ‘관음보살’ 그림, 작고하신 선배의 개인전에서 가져온 유화, 40년 넘게 교단에 머물고 있지만 내세울 만한 제자가 없는 나에게 30년 전 문학동아리 ‘여명’의 제자이자 무명화가로부터 받은 정물 유화 1점,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 입주할 때 ‘외솔회’ 친구들이 입택 축하로 가져온 100호짜리 서화 등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어느 것 하나 사연이 없는 가재도구나 작품은 없다. 57년 전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집 재산목록 1호로 구입한 ‘재봉틀’, 52년 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들어온 ‘쌀뒤주’도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우리 서부 경남 방언에 ‘벌다’(일을 하거나 하여 돈이나 물건을 얻거나 모으다)의 쓰임에 ‘버리다’(예; “어디 갔다 왔니?” “돈 버리러 갔다 왔다.”)가 있다. ‘버리러’의 바른 뜻인즉 ‘벌이 하러’가 줄어서 되었겠지만, 방언에서의 겉모습의 으뜸꼴은 ‘버리다’로 겉모습이 같다. 따지고 보면 애써 ‘벌이’하여 잠시 곁에 두었다가 ‘버리’게 마련인 것 같다. 인연 따라 잠시 내 곁에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버리’든지 가치를 인정받으면 인연 따라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다.

당장은 좀 부담스럽지만 언젠가는 내 곁에서 떠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한결 가뿐하다. 언젠가 돌아가신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그 옛날의 집’ 마지막 행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의 심경을 빨리 닮고 싶을 뿐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2월 1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