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스님─어느 누가 아프지 않으랴

어느 누가 아프지 않으랴

-법인스님-

“어떤 스님이 좋습니까?” 요즘 내가 한 잔의 찻값으로 상대방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대화의 끎말(=이끄는 말)이기도 하다.

남녀노소, 종교, 친소에 관계없이 이 말이 나만의 ‘일상적 질문’이 된 것은, 확고한 승려 교육의 목적과 지표를 설정하는 데 있어 대중이 바라는 수행자상을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그 대답은 ‘대동’하고 ‘소이’하다.

똑똑하고 친절한 스님, 내 말을 정성으로 들어주는 스님, 근엄하기보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스님, 나를 성숙시켜 주는 스님,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스님, 늘 그 자리에 있는 스님, 내 삶의 중심과 나침반이 될 수 있는 말씀을 해주는 스님, 현실성 있는 법문을 해주는 스님, 사회와 역사 의식이 있으면서 일상의 삶은 절도 있는 소박한 스님, 원칙을 지키고 공평무사하며 공심으로 일하는 스님, 옳고 그름이 분명한 스님, 내 삶의 위안과 힘이 되어주는 스님 등등.

대동(大同)은 지혜와 자비의 양 날개를 갖춘 수행자였으며, 소이(小異)는 저마다의 염원에 응답하는 시대의 관음보살이요, 보현보살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 나는 한동안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혼돈을 경험했다.

지극히 당연한 정답이 왜 이리도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왜 이런 답들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고 새삼스럽기만 한 것인지….

며칠 동안 켜켜이 쌓인 생각의 나이테를 정리하면서 어색하고 머쓱한 그 원인을 찾게 되었다.

  그건 세간과 출세간이 바라보고 있는 지점의 차이와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 출가 수행자들은 수행, 깨달음, 직지인심, 견성, 성불, 간화선, 돈오돈수 등 이런 언어와 어법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이 언어들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데 사고와 삶의 지향이 실려 있다.

간간이 말하는 세간을 향한 보시와 자비는 언저리의 일시적 방편 언어이다.

  그러나 세간의 이웃들은 실질적인 일상과 별로 상관 없어 보이는 출가 수행자의 중심언어와 가치지향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 수행자들에게서 참되고 행복한 삶의 지혜와 답답하고 힘든 현실의 위안과 격려를 얻고자 한다.

세간의 벗들은 큰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도 좋지만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운 낯선 수행자보다는 겸허하고 따뜻한 시선의 친근한 스님에게 위로와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이 시각, 나에게는 많은 반성과 자책이 따른다.

수레는 분명 두 바퀴로 목적지를 향해 굴러간다.

엄정하면서도 친근할 수 있고, 침묵하면서도 귀기울일 수 있으며, 여럿이 함께 할 수 있으면서도 홀로 있을 수 있고, 비우면서도 나눌 수 있음에도 왜 우리는 한쪽으로만 시선을 고정한 채 살았을까? 눈은 뜨면 안팎 모두를 볼 수 있고, 귀는 열면 안팎 모두를 들을 수 있는데, 왜 눈과 귀를 반쯤만 열고 살았을까?   결국 이것은 세상에 대한 연민과 자애의 부재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더불어 존재하고 더불어 생동한다는 연기의 질서에 철저하지 못한 소치이다.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위해 헌신과 자비를 실현한 부처님의 삶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이고 게으름이리라.

그러고 보니 오랜 세월 수행과 깨달음에 짓눌려 자비심을 그리 염두에 두고 살지 않았던 것 같다.

  수행의 길에서 다시 ‘자비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니 요즘 내 삶의 화두는 온통 자비심이다.

자비로 뭇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수행과 깨달음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 그런 수행과 깨달음은 진정한 수행과 깨달음일까? 그것은 한낱 사치스런 관념과 수식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비심은 무엇이고 자비행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의 마음과 보현보살의 손길은 어떤 모습일까? 자비는 당장의 마음이고 당장의 실천이기 때문에 과거에도 지금에도 미래에도 늘 생동하는 평등의 눈길이요, 구제의 손길이요, 연민의 가슴이다.

  내게 처음 자비심이 무엇인가 절절하게 온몸으로 가르쳐 준 분은 우리 할머니이시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가난한 시골의 우리 마을은, 6·70년대 가난한 시골 마을이 그렇듯이, 그때는 걸인과 전쟁의 후유증으로 몸이 아픈 상이용사와 나병환자들이 참 많았다.

하루 걸러 남루한 사람들이 어김없이 구걸하러 왔다.

가난한 살림에도 우리 집은 나름 적선의 원칙이 있었는데, 탁발 온 스님에게는 쌀 한 그릇, 걸인에게는 보리쌀 한 접시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걸인에게 적선하면서도 꼭 한마디씩 위로와 축원을 해주셨다.

“아이구! 어쨌든지 굶지 말고 아프지 말고 몸 간수 잘 하시우!” 그럴 때마다 미안해하는 수줍은 몸짓과 더불어 눈시울이 붉어졌던 걸인들의 모습들이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또 나의 할머니는 혹여 걸인들이 끼니를 채우지 못한 것을 알면 없는 반찬과 보리쌀 많이 섞인 밥일망정 밥상을 정성스레 닦아 차려주셨다.

  하지만 어린 나는 걸인이 먹는 밥상이 늘 마음에 걸렸다.

아니, 저들이 먹는 밥그릇과 수저로 내가 밥을 먹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어느 날 할머니에게 용기를 내어 부탁했다.

“할머니! 보리쌀을 주는 것은 좋은데 거지들에게 밥은 안 차려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때 할머니는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애야, 먹는 입은 다 똑같은 거란다.”   ‘아….’ 나는 그때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달은 것 같다.

‘차이가 있지만 차별해서는 안 되는’,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절대적 빈곤에 내몰린 걸인에게도 신체적 절망에 내몰린 사람들에게도, 예의와 인정을 베풀었던 할머니에게서 나는 별다른 이론적 학습 없이 겸손과 평등과 자비를 저절로 체득한 것 같다.

내가 기억하기로 나의 할머니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신 분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고행과 명상, 오묘한 설법만을 하시는 부처님의 모습(평면적 시선)에서, 온전히 중생을 향한 자비행으로 헌신하신 부처님의 모습(입체적 시선)으로 옮겨보자.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임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나에게 견주어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는 (법구경)의 간명한 말씀에서 평화와 평등, 자유를 염원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이 배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쟁을 반대했고, 계급의 차별을 원천적으로 부정했고,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중생과 동행한 당신의 삶에 굵직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부처님은 똥을 푸는 직업을 가진 수드라 신분의 니디에게는 “너는 세상을 가장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다.

자,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내 손을 잡아라.”라고 자비의 언행을, 계급이 높다고 교만한 바라문에게는 “악행을 하면 누구나 나쁜 과보를 받고 보시하고 선행하면 누구나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

나는 출생을 묻지 않는다.

다만 행위를 묻는다.”라고 하며 알량한 개념에 물든 이에게 등을 후려치는 죽비소리의 말씀을 내리셨다.

  일상의 통념적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새로운 방식의 자비 복권을 제시해주셨다.

이렇게 부처님의 자비심은 어느 개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넘어 시대와 역사의 광장에서 정의와 공정의 외침으로 다가온다.

덧붙여 부처님은 동물을 희생시켜 복을 받고자 하는 의식의 허구성도 지적하고 반대하셨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대공원의 돌고래 한 마리를 제주 앞바다로 방사하는 선언에서, 이것이 우리 모두가 생명 사랑을 깊이 생각하는 출발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만약 부처님이 오늘 여기에 계신다면 사람들의 잠시의 즐거움을 위하여 엄청나게 학대 받으며 사육되면서 벌어지고 있는 동물 쇼를 중단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도 아파하고 기뻐하는 생명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람과 조금의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왜 자비심인가? 그것은 생명의 질서이고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비심은 누구도 소외받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씨앗이요, 열매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애의 마음 없이 시대와 역사에 대한 통찰 없이 행하는 수행은 상자에 갇힌 관념이요, 소승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누구에게 해악을 끼치는 가해자가 된다면, 우리는 그 즉시 피해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해하는 당신의 마음은 곧 고통과 분노가 기반이 되어 평화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지혜롭다면 모든 사람과 동물 그리고 물과 흙과 돌멩이 풀꽃에게도 자비심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이웃에게 자비심을 나눌 때 그 순간 우리 마음은 자비심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결국 자비심의 최대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 된다.

  자비심! 그것은 더불어 평등하고 평화롭고 환희롭게 살아가는 깊은 지혜이며 실천이다.

오로지 이 길뿐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아프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