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스님─염불삼매 들게되면 깨달음 얻을 수 있어

◆염불삼매 들게되면 깨달음 얻을 수 있어/

보광스님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에 있다.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상구보리이며,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하화중생의 일이다.

정토교학에서는 신심과 원력으로 깨달음과 중생제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타력적인 힘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서 타력이란 불보살의 본원력과 가피력에 의해 우리가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염불이다.

염불이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입으로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과 부처님의 상호나 공덕을 관하는 관념염불(觀念念佛)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염불의 기원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다.

부처님의 교단은 불,법,승,삼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 최초의 의식이자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도리이다.

초기에는 불교교단에 귀의하고자 하면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을 외우면서 부처님 주위를 세 번 돌게 되면 부처님께서 “선래비구야”라고 하여 출가가 허락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무불”이 바로 염불의 시초이다.

따라서 염불은 불교교단에 대한 신앙의 표명이며, 귀의의 방법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대소승을 막론한 모든 불교의식에는 반드시 삼귀의로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깨달음에 들어가는 첫 번째의 관문이며, 사홍서원은 중생구제와 보살도 실천의 마지막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모든 신앙행위는 믿음의 표현인 삼귀의와 대비원력의 발원인 사홍서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염불로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논사는 인도의 용수보살이다.

그는〈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娑論)〉‘이행품(易行品)’에서 부처님을 믿는 신불(信佛)만으로도 아유월치(阿惟越致) 즉 불퇴전지(不退轉地)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불법에는 무량한 문이 있다.

세간의 도(道)에 난(難)과 이(易)가 있으니 육로로 걸어가는 것은 고행이며, 수로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편안하고 쉬운 일이다.

이와 같이 보살의 도에도 난행정진(難行精進)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한 신방편(信方便)의 이행(易行)으로 빠르게 아유월치(阿惟越致)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어려운 정진방법을 선택하는 난행도(難行道)와 쉬운 방법인 이행도(易行道)로 구분하고 있다.

그 중에서 이행도인 부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도 불퇴전지인 야유월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다겁생래 동안 닦은 무량한 수행력과 한량없는 중생구제의 본원력의 공덕력에 의해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용수보살은 염불로서 현세에 아유월치에 이르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친보살은 〈왕생론(往生論)〉에서 극락왕생행으로 찬탄문(讚歎門), 예배문(禮拜門), 작원문(作願門), 관찰문(觀察門),회향문(回向門)의 오염문(五念門)을 설하면서 염불을 찬탄문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용수가 염불로서 현세에 아유월치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으나, 세친은 염불로서 내세에 왕생하여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의 담랑(曇鸞),도작,선도 등에게도 계승되었다.

칭명염불.관념염불 수행으로 부처님 친견.견성 가능 간절한 신심과 불보살 본원력.가피력에 힘입어 성불 그런데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 등의 정토삼부경과 〈반주삼매경〉에서는 염불로서 견불(見佛)과 왕생을 설하고 있다.

정토계 경전에서는 견불은 깨달음으로 여기며, 왕생은 성불로 보고 있다.

〈무량수경〉의 제18원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에서는 오역죄와 정법을 방방한 자는 제외하고 누구나 십념염불(十念念佛)로 왕생이 가능하다고 설하며, 왕생은 삼배구품(三輩九品)에 따라서 왕생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왕생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아미타불의 설법을 들어서 성불을 보장받으며, 결국은 모습과 이름이 모두 아미타불과 같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동명동호(同名同好)가 되어 모두가 아미타불이므로 부처와 극락성중이 둘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한편 〈관무량수경〉의 제8 상상관(像想觀)에서는 “제불여래는 법계신(法界身)이므로 일체중생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느니라”고 하면서 “마음이 부처를 지으면, 마음이 곧 부처(是心作佛是心是佛)”이라고 한다.

즉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으로 바뀌면 부처의 마음은 곧 부처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마음이 곧 부처 (是心是佛)’라고 하는 말씀은 〈관무량수경〉과 〈반주삼매경〉에서 나오며, 이러한 말씀이 선종에 영향을 미쳐서 선종에서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마음이 부처를 지었을 때 마음이 부처’라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부처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는 그대로 중생임을 명심해야 한다.

“부처님을 형상으로 관할 것”을 설하면서, 관념염불로서“무량억겁 동안의 생사의 죄를 소멸하고 현재의 몸으로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성취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염불삼매에 들게되면, 견불을 하게 되며, 견불(見佛)은 견성(見性)과 같은 경지인 깨달음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제9관인 진신관(眞身觀)에서는 “불신을 관하면, 불심을 본다(觀佛身故 亦見佛心)”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모습인 불신을 친견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 불심을 보게되며, 이는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정토교에서는 염불삼매를 성취하면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신이 의심나는 것을 부처님께 물어보게 되며, 부처님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게 된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법시대의 중생들이 친구의 얼굴을 보기는 쉽지만, 친구의 마음을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부처님의 마음인 불성(佛性)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 중생이 눈에 보이지 않은 마음을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을 보기는 쉽다.

중생은 모습과 마음이 다를 수 있지만, 부처님은 모습과 마음이 같으므로 불신은 바로 불심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불심(佛心)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마음이란 큰 자비이므로 무연자비(無緣慈悲)로서 모든 중생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불신을 보는 자는 불심을 보게되며, 불심이란 무연자비로서 구현된다고 한다.

따라서 깨달은 자의 인격은 무연자비로서 표현되고 있음을 설하고 있다.

우리가 깨달은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하고 있다.

즉 깨달은 자는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아미타경〉에서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굳게 지니기를 일일 내지 칠일 동안 한결 같은 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이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것이니라.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에 왕생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즉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심불란하게 칭명한다면, 반드시 임종시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바로 왕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심불란한 경지는 생사를 초월한 경계이므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다.

〈반주삼매경〉은 재가불자인 발타화보살을 상대로 설한 것인데, 아미타불과 제불보살을 친견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삼매가 바로 반주삼매이며, 이는 제불이 눈앞에 나타나 설법하는 삼매이다.

그러므로 반주삼매(般舟三昧)야 말로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인 것이다.

반주삼매를 닦는 방법으로 3개월 동안 경행하면서 염불을 지속할 것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을 활용한 것이 천태지자대사의 사종삼매법 중 상행삼매(常行三昧)이다.

90일 간의 상행삼매를 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이상을 정리한다면, 아미타불을 입으로 부르는 칭명염불법이나 마음으로 관하는 관념염불을 통하여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으며, 이는 바로 견성하는 것과 같은 경지로 보고 있다.

즉 염불로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이는 쉬운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왕생은 바로 성불이며, 성불을 보장받는 곳이다.

따라서 왕생은 성불하기 위하여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은 부처님 본원력의 힘에 의해 가능함을 설하고 있다.

– 불교신문 2065호/ 9월21일자 –

보광스님─어머니 살려준 염불신행

어머니 살려준 염불신행 (

보광스님

)14살때 어머니위해 철야 관음기도 대학생때 15일간 지장기도 죽을 각오로 기도발원, 지금까지도 큰힘 나의 경험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기도에 대한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기도에 몰입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니 14살 때인 것 같다.

우연히 득병하신 어머님에게는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마을 뒤 단석산에 있는 백석암(白石庵)이라고 하는 암자에 가서 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으며, 법당에는 바람이 불면 촛불이 꺼질 정도로 외풍이 세었다.

주지스님의 지도에 따라서 음력으로 12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납월 팔일에 회향하는 관세음보살 기도였다.

스님께서는 어린 나를 두고 “너희 어머니가 회복하려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밤잠도 자지말고 다른 생각도 말며, 오직 관세음보살만 찾아라”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관세음보살님이 어머님을 살려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법당에서 하룻밤, 이틀 밤을 세우면서 일심으로 불렸을 뿐이었다.나도 모르는 사이에 7일이 지나 회향일이 되었으며, 그 날이 바로 성도절이었다.

7일 동안을 법당에서 철야을 하였으나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른다.

추웠다는 생각보다는 한 밤중에 바람이 불면 촛불이 꺼질 것 같아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밤 새워 치는 목탁소리에 주지스님도 방에서 잠을 자지 않고 염불하셨던 것 같다.

당시의 기억 가운데 가장 신기하였던 것은 회향을 하고 하산하는데 마을의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소 우는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등 모든 소리가 관세음보살의 염불소리로 들렸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이틀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물론 어머님의 병세도 호전되어 완쾌하셨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출가한 뒤에야, “모든 삼라만상이 부처님 아님이 없으며, 모든 소리가 법음(法音)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또 한 번의 경험은 출가 한 뒤 대학 2학 때였던 것 같다.

그 해 여름 방학에 은사 스님이 계시는 경주 ‘중생사(衆生寺)’에서 지장기도를 15일간 철야로 한 일이 있었다.

처음 시작 할 때는 법당에서 기도하다가 죽을 각오로 기도발원을 하였다.

앉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기대지도 않고, 서서 목탁을 치면서 24시간을 계속하여 염불을 하였다.

밥 먹고, 세수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법당에서 염불을 계속하였다.

처음 하루는 시작하는 마음으로 보냈으며, 이틀 삼일 사일이 지날수록 더욱 힘들었으며, 칠일이 고비였다.

한 밤 중에 기도를 하고 있으면, 약간 떨어진 요사채에서 잠자는 소리, 코고는 소리, 잠꼬대하는 소리까지 들리곤 하였다.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팔일이 되고,구일이 지나 십일이 넘어서니 모든 잡념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몸은 피골이 상접하였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으며, 상쾌하였다.

마치 날아갈 것 같이 정신은 맑았다.

보름 동안의 철야기도를 회향하고 나니, 몸무게는 10키로가 줄었다.

그러나 너무나 또렷하고 맑은 마음은 마치 유리그릇과 같이 투명하다고 생각하였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경험은 지금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정토염불신행을 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어릴때의 관음기도와 청년기의 지장기도가 이제는 아미타불염불로 계속되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 볼 때, 나의 근기에는 염불신행이 가장 적합한 수행방법인 것 같다.

보광스님─배려’는 모든 종교의 기본정신

배려’는 모든 종교의 기본정신 – 보광 스님 – 일부 기독교인들 행태 사회 상식 벗어난 행동 기독교 근본정신 깨우쳐야 최근 몰지각한 일부 기독교인들이 서울 봉은사와 울산 정광사, 대구 동화사 법당과 경내에서 일명 ‘땅밟기’로 불리는 선교 기도를 올려 물의를 빚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찰에서 “사찰이 파괴돼라”고 기도를 하고, 이 동영상을 촬영해 교회 인터넷 카페에 올리며 자신이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과시를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얀마 등 불교국가까지 찾아가 그 나라 스님과 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법당에서 기도를 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는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만드는 자양분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부모를 잘 공양하라’, ‘살인을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즉, 효와 예절 등 사회의 기본규범을 준수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만약 사회의 규범과 어긋나게 살도록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이비 종교’로 지탄을 받고, 매장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가 가르치는 규범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도 마땅히 지켜야 하는 사회 구성원 간의 약속입니다.

하물며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이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일삼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사회법으로는 물론 종교 내부에서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일부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사회의 규범을 벗어난 행동이라 생각됩니다.

더욱이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데 더욱 큰 문제가 있습니다.

내 물건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물건도 소중하듯이 자신의 종교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하다는 것을 그들은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배려’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엇을 행할 때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정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불교는 다른 종교를 어떻게 볼까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행자(苦行者, 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통해 수행을 하는 사람)를 따르는 한 재가불자에게 들려주는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이 불자는 부처님과 대화를 통해 깊이 감복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삼보에 귀의하는 재가불자가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잠자코 실천하면 될 뿐 공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재가불자는 더욱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고행자들의 무리가 저희 집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부처님의 제자만 모시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러면 안 된다.

고행자들은 오랫동안 너의 존경을 받았다.

만일 저들이 오거든 예전처럼 존경하고 공양하라”고 불자를 타이릅니다.

재가불자는 이런 부처님의 말씀에 “다른 이 같으면 ‘마땅히 나와 내 제자에게만 보시하고 다른 이에게는 보시하지 말라’고 할 텐데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며 더욱 감복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말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시해 큰 기쁨을 얻으라.

다만 바르게 정진하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큰 복을 얻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보시하면 큰 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불교, 기독교, 유교, 이슬람교를 함께 일컬어 세계 4대 종교라고 합니다.

이 4개의 종교는 교리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신도들에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즉, 남을 돕고 착하게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종교의 이런 근본정신에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려’도 담겨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일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담겨 있는 근본정신을 하루빨리 깨우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