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담스님─할 것은 오직 수행 뿐

할 것은 오직 수행 뿐 – 송담 스님(인천 용화선원 원장) – 우리가 거울을 쳐다볼 때 자기 얼굴이 보이죠? 거울 속에 나타난 그 분명한 그 얼굴이 바로 자기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얼굴에 화장을 하면 거울 속 얼굴도 화장을 했고, 얼굴을 찌푸리면 거울 속 얼굴도 찌푸리고. 웃는 얼굴로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 영상도 웃고 있을 것입니다. 거울만… 송담스님─할 것은 오직 수행 뿐 계속 읽기

송담스님─탐심이 일어 내장이 뒤집혀도 이 뭣꼬 해라

탐심이 일어 내장이 뒤집혀도 ‘이 뭣꼬’ 해라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 오늘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 그 밖의 여러 존상들의 복장을 점안하는 법요식 날 입니다.

이 귀중한 법석에 산승이 여러분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우주법계에 가득 찬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친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단향 나무로 중생과 삼세의 여래와 보살의 모습을 조각해도, 각각의 얼굴 모습은 다르지만 냄새는 전단향으로 한 가지더라”하는 아름다운 게송이 있습니다.

게송의 의미는 삼라만상의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근본은 단 하나 진여불성(眞如佛性)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삼라만상 근본은 진여불성 첨언하자면 전단향 부처님과 관련해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재세 당시 부처님은 돌아가신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도리천에서 석 달 동안 법문을 하셨습니다.

당시 부처님이 계시던 코삼비국은 우진왕이라는 이가 다스렸는데, 어찌나 부처님을 존경했는지 하루도 뵙지 않고는 도무지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진왕은 고민 끝에 전단향 나무로 불상을 조성하고,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법문을 하시는 동안 이 불상을 부처님 대신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후에 부처님이 법문을 마치고 사바세계에 다시 오실 때 나무로 만든 전단향 부처님이 벌떡 일어나 부처님을 영접했는데, 너무나 비슷해 진짜 부처님이 어느 분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전단향 부처님의 손을 잡고 말세의 교화를 부촉하셨는데, 이것이 최초로 불상이 모셔지게 된 연원입니다.

이런 장구한 역사가 흘러 오늘 세등선원에서 향을 사르고 합장을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될 것만 같은 참으로 거룩한 부처님을 모시게 됐으니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단향 부처님께 말세의 교화를 부탁했듯이 오늘날의 사바세계 더구나 이 말세에는 각양각색의 싸움이 많습니다.

명예, 권력, 재산, 사상, 종교에 대한 싸움이 하루도 쉴 날이 없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싸움들로 사바세계는 망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청정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파멸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삼독심이 사라지고 계정혜가 밝게 빛난다면 싸움 또한 사라지게 되겠지요.

어쩌면 지구도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만큼 좋은 세계가 되질도 모르겠습니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하면, 만약 색으로 혹은 색상,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 하면,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이 게송은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을 정성을 다해 모셨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함에서 부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중생의 소견일 뿐입니다.

바르지 못한 삿된 소견으로 참 부처님을 친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 부처님을 뵐 수 있을까요.

경에는 8만4천 가지의 많은 방법을 설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방법 가운데서도 남녀 귀천도 필요 없고 유식 무식의 차별 없이 오직 참 부처님을 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입니다.

참선은 글을 몰라도 할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상관없고, 나이가 어려도 관계없습니다.

돈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습니다.

법을 알아 열심히 하면 누구나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친견하는 방법이 참선 부처님은 우주법계에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꽉 차 있는 부처님 가운데 자기 안의 부처님 찾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자기 안의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면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모든 중생들의 부처님을 바로 보게 됩니다.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천초목(山川草木) 속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사람이나 사물이나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과 그 현상 속에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친견하게 됩니다.

앙굴리마라도 깨달았거늘 많은 사람들이 번뇌 망상 속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번뇌 망상을 여의고 부처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번뇌 망상이 일면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뭣고” 이렇게 참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을 빨리, 그리고 가장 쉽게 찾는 오묘한 수행법입니다.

999명의 사람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자기 엄마를 죽여 1000명을 채우려고 했던 앙굴리마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앙굴리마라처럼 포독하고 고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탐진치 삼독이 일어난다하더라도 우리는 앙굴리마라처럼 고약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착한 일도 하고 좋은 일도 하고 남도 돕고 하는 우리는 모두가 앙굴리마라보다는 훨씬 훌륭합니다.

이러니 우리가 깨닫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옳게만 해 나가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몸속에 똥이 들어있고, 바늘로 찌르면 피가 나고, 탐진치 삼독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도.

탐진치가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숨을 깊게 들어 마시고 내쉬면서 “이뭣고” 골이 나서 내장이 뒤집어 질지라도 그 순간에 “이뭣고” 탐심이 날 때도 “이뭣고” 화가 나도 “이뭣고” 어리석음이 나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일분일초도 여의지 않고 그 자리에 즉해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면 바로 그곳에서 참 나를 깨닫고 진여불성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법당에 거룩한 금색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법당에 와서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꽃을 올리고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 다 좋습니다.

지극정성으로 하면 소원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예배하는 참 뜻이 이것뿐이겠습니까.

부자가 되고, 아들·딸이 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며느리를 얻는 것만이 부처님을 예경하는 이유일까요.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마땅히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좋습니다.

지극 정성으로만 하십시오.

반드시 이루게 됩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그럴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러나 불상을 모시는 진정한 뜻은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과일을 올리고 향을 올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초보 단계의 공양입니다.

참된 공양은 정성스런 마음으로 예배를 하되 “이뭣고” 이런 한 마음입니다.

이뭣고를 여의지 않는 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을 가지고 공양을 올리고 절을 해야 내 몸 속에 있는 진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됩니다.

화두를 여의지 않은 그 자리에 언제나 참 부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화두있는 자리에 부처도 있어 오늘 불상을 모시고 개금을 하고 복장 점안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여기 저기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이 결제 중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셨고, 또한 많은 청신사, 청신녀가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요, 도반들입니다.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남녀노소와 승속을 막론하고 모두가 부처님의 한 제자요, 딸이요, 아들입니다.

형제자매요, 도반입니다.

형제자매도반 여러분, 이제부터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이뭣고” 이렇게 자기 마음을 단속하십시오.

번뇌 망상 속에 있는 피와 오줌과 땀과 똥으로 뭉쳐져 있는 오대 색신 속의 참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색상을 의지해서 부처님을 보지 않고, 음성을 의지해 부처님을 구하지 않는, 참 부처님을 찾는 가깝고도 가장 빠른 길입니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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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 이 법문은 6월 13일 대전 탄방동 세등선원에서 열린 대웅전 삼존불 개금불사 회향 및 점안법회에서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이 ‘참 부처와 참선’을 주제로 대중들에게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송담 스님은 1929년 태어났으며, 전강 스님을 은사로 1945년과 1951년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했다.

10년간 묵언 정진 끝에 전강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용화선원과 인제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후학들에게 깨달음의 빛을 전하고 있다.

송담스님─집착은 놓고 인연은 받아들인다

집착은 놓고 인연은 받아들인다

송담스님

수행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집착은 놓고 인연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길이며 불교의 모든 교리를 실천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인연 따라 만들어지고 인연 따라 소멸하는 인연생기의 법칙에 따라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움직이는 법칙이 바로 인연과보의 법칙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연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인연을 거스른다고 해도 그것은

거스른 것이 아니며, 거스르고 싶다고 해도 거스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세상 유정 무정 어느 존재라도 인연의 법칙에서 예외인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그 어떤 인연이라도 그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었고 스스로 받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할진데 내 것이 아니라고 우겨봐야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좀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으면 좋았을 터인데 왜 하필이면 이렇게 못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을까’ 하고 인연을 탓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태어날 적부터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좋았을 터인데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고생하는 거야’ 라고 탓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내 인연 따라 내 스스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조금 못 났어도,

가난한 집에 태어났더라도 그 인연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남편과의 자식과의 혹은 부모님과의 인연이라든가,

직장의 인연, 부부의 인연, 배움의 인연, 친구나 동료의 인연 등 지금 나의 삶의

환경들은 나에게 주어진 내 인연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 하나 조차 정확히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인연은 정확히 그 자리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인연에 내 잣대를 가지고 온갖 좋고 싫은 분별을 일으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애착하여 더 잡으려고 애를 쓰고, 싫은 인연을 만나면 애써 버리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런 인연의 흐름이 나의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인해 껄끄러워 지게 됩니다.

좋고 싫은 분별은 집착을 가져오고 그로 인해 우리는 몸과 입과 뜻으로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풀어야할 인연, 지금 녹여야할 업인(業因)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때가 가장 녹이기 쉬울 때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 때 거부하지 말고 바로 받아 들여 섭수하여 내 안에서 녹여 내고 가꾸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인연을 만날 때가 가장 그 인연 풀기 좋을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거부해 버리면 또 다음 어느 생에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날지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 내 앞에 닥친 그 인연을 받아들여 섭수하면 지금 그 자리에서

업을 녹일 수 있을 것이지만, 거부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온전히

녹이지 못한 채 더욱 커져버린 업인을 만들어 잠시 과보를 뒤로 미루게 됩니다.

인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합니다.

나타나야 할 가장 정확한 그 때 내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인연이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정확한 인연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거지요.

법계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부처님의 나툼인 것입니다.

어찌 어리석은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 부처님의 인연을 재고 거스르겠습니까.

인연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섭수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집착하고 애착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존재며 경계, 조건들은 인연 따라 잠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일 뿐이지 고정된 실체가 있어 딱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인연이 화합하니 그 과보를 맺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인연과보의

법칙에 따라 결과를 받고 나면 그냥 그 인연은 다해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업에 빚대에 설명한다면 업인과보라 하여 우리의 삼업이 저지른 원인이

그 결과, 과보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업이 원인이 되어 과보를 맺고 사라지면 그만인 것이지 거기에 무슨 실체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좋은 인연이라고 애착하여 잡을 일이 아니며, 싫은 인연이라고 미운 마음에

버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체 없이 인연 따라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집착 없이 받아들이면 그 자리에서 녹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연(因緣) 따라 잠시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아 무상(無常)하다고 하고, 거기에 무슨 실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아(無我)라 하며,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일체는 괴로움(苦)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연법인 까닭에 무상, 무아, 고이며 이러한 삼법인(三法印)의 특성을 가진 일체 모든 존재는 결코 집착하여 얽매일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인연법이고, 그 인연법에 의해 존재하는 일체제법이 실체

없음(空)을 설하는 가르침이 삼법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법 그 자체는

진리이니 받아들이고, 인연법에 의해 존재하는 일체제법은 실체없음, 즉 공이니

그에 대한 집착은 놓고 가자는 것입니다.

집착을 놓고 인연은 받아들이는 삶은 그대로 인연법과 삼법인, 공을 실천하는 삶이

되며 진리를 드러내는 실천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인연을 받아들일 때 이전에 지어

놓았던 업인을 녹일 수 있게 되며, 집착을 놓았을 때 더 이상 어리석은 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집착을 놓고 인연을 받아들이는 그 밝은 실천의 자리에 본래

면목 자성 부처님의 지혜 밝게 비출 것입니다…

부디 부처님 법 공부 열심히 하여 인과를 믿고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수 있는

안목을 키웁시다…송담 큰스님께서도 법문하신 내용이라 함께 사유함이 어떨까 하여 이렇게 옮겨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