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스님─오늘을 사는 지혜

오늘을 사는 지혜

무진장스님

제일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출가를 했는가.

출가 동기를 먼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적어도 6∼7세에서부터 거의 12년에 걸쳐서 베다사상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그 사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하나는 업사상이요, 나머지 하나는 윤회사상입니다.

업사상과 윤회사상을 들면 불자들은 상당히 익숙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교의 중심사상이 아니라 베다사상 가운데 있는 것이지만, 교육의 타당성에서 불교가 상당수를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에 중류 이상의 사회의 아들들은 이와 같은 교육을 다 받게 되는데, 일반인으로서 국왕 대신에 아들들은 업사상이나 윤회사상 이외의 어떠한 사상도 생각해 낼 수가 없던 때입니다.

우리는 성도자로서의 부처님을 두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6∼7세에서 12년동안 그 사상을 공부한 부처님과 29세에 출가해서 35세에 성도한 부처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그 사상을 공부함으로써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부처님은 대단히 활발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했습니다.

업사상이나 윤회사상 이외의 어떠한 사상이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하고 생각했습니다.

카스트 제도라는 사회의 모습을 볼 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것인데 왜 이러한 계급이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번민이 있었고, 나를 낳아준 우리 어머니는 어째서 일주일만에 서거하셨는가 하는 이러한 번민도 거듭한 것입니다.

계급문제의 타파와 개개인의 생로병사에 시달리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에게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존재하는데 그러한 행복들은 왜 순간적인 것일까.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부처님은 출가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출가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중류 이상 사회의 아들들은 출가해서 수도하는 것이 거의 풍습처럼 되어 있어서 부처님께서도 그러한 풍습에 의해서 출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29세에 출가한 부처님은 청년기를 그렇게 지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만 그러한 청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에 그러한 청년이 존재하는데, 오늘의 시대에 사는 청년의 고민은 무엇인가.

과연 부처님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오늘의 청년들의 고민은 매우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고민, 그 욕망 하나만 해결되면 안되는 일이 없고 모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의 고민입니다.

부처님의 시대에 살았던 청년들의 고민과 오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고민은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설문조사에 의하면 노인을 공경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오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답변 80퍼센트가 공경할 필요가 없다.

왜 노인들은 권위주의를 가지고 있느냐, 버스 안에서 어째서 자리를 양보해야 하느냐 그럽니다.

인과응보를 모르는 오늘의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러한 문제점도 바로 경제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60년대 초 군사혁명 이후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 맛을 알게 된 것은 불과 30∼40년밖에 안됩니다.

경제적인 욕망 하나 때문에 부모를 해치고 형제를 괴롭히고 남편을 죽여서 보험금을 타 먹고, 그런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사회가 돈 때문에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범죄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백의민족이니 슬기로운 배달민족이니 위대한 단군의 자손이니 하는 구호가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을 할 때, 이 시대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하게 사는 시대가 될까 하는 그러한 고민은 누구나 했을 것입니다.

유사이래로 오늘처럼 정치가 부패하고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종교사회마저 병리현상을 낳으며 부도덕하게 망가져 버린 적은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지붕 아래에 일곱 식구 여덟 식구를 위해서 죽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어떠합니까? 일곱 식구 여덟 식구가 다 죽어도 나는 못 죽는다는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부지런히 돈 벌어서 부모님께 효도 한 번 하려고 했는데, 일찍 돌아가시고 나면 하늘이 노랗죠.

그래서 부지런히 벌었던 돈도 형제에 나누어줘 버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다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눈물 한 방울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죠.

녹음기 하나 갖다 놓고 우리 몰래 땅 사 놓은 것 있으면 빨리 말하고 죽어라.

지금 우리는 그런 처지에 살고 있습니다.

전국의 교육계에도 세월이 흐르면 월급타면 그만이고 잘되고 못되는 것은 네 운명이지 성의있게 교육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될대로 되라.

기술교육을 하지 인성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국민이 과연 살 수 있는 길이 될까.

불교사상을 통해서 볼 때, 컵 속에 물이 담겨져 있는데 그 물이 물일 때는 어느 그릇에 부어도 꼭 맞습니다.

이 물이 얼어 버릴 때는 맞는 그릇이 없습니다.

지금 완전히 얼어 버린 우리 국민들의 정서를 녹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이 잘 사는 길이 무엇이냐.

석정을 즐겨라.

고요를 즐겨라.

와글와글 들끓고 있는 인식이 비정상적인 지금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적정과 고요를 즐길 수만 있다면 잘 살 수 있다고 봅니다.

들끓고 있는 한 자기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자기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안목으로 조국을 보고 국제를 보아야 합니다.

棄濁染하고 發妙明하라.

능엄경에 나오는 아주 짧은 말씀입니다.

우리 한 생각 가운데 탁한 생각을 버리고, 묘명을 발하라.

원각경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斷無明하여 顯佛性하라.

어리석은 무명을 끊고 불성을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인이 말하고 있는 이 마음의 본성, 청정한 본성이라는 것은 닦아서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청정한 것입니다.

본래 청정한 본성, 닦을 필요조차 없는 본성을 아는 깨달음의 종교가 불교요, 알아야 하는 것이 불교인 것입니다.

부처님만 믿어서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믿고 있는 내가 身·口·意 三業이 청정해야 된다는 지도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정마니보주, 우리 본성 본래의 성품이 다이아몬드와 같아서 무색투명한 것입니다.

오색찬란한 것이 아닙니다.

오색찬란한 것은 바깥 경계를 받아 들여서 빛나는 것이지 그 자체는 색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조스님은 전렴청정을 후렴청정이 부촉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성품도 그와 같아서 원래 아무것도 없는 것, 전혀 없는 것을 일러 우리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한 마음의 세계가 전렴인 것입니다.

여기에 생각을 일으키면 후렴이 일어날 때에는 매우 정당한 것입니다.

전렴청정을 후렴청정에 부촉할 때만 인식이 정당해지는 것처럼 우리 일상 생활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적정을 즐겨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물질로 푸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의 안식을 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말씀으로 끝맺음을 하겠습니다.

무진장스님─불교란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

불교란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

-무진장스님-

우리는 지금 정신적으로 대단히 황폐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고상한 시민의식은 없고 시민의식이 점점 천박해져서 실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까지 이르렀다.

불교적으로 보면 ‘탐진치’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 차 있다.

이런 점에서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근본을 생각해서 청렴하고 담백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다.

그 이치를 깨달으면 인격을 완성시킬 수가 있다”고 설법하셨다.

그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무엇이 옳은 길이고 무엇이 옳지 못한 길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자기만이 최고이면 스승이 있을 까닭이 없다.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지혜롭게 살아야 된다.

불교는 엄격히 말하면 믿음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단순한 믿는다가 아니다.

불교는 수행 이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우리는 부처님과 같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

부처님과 같은 판단력을 가지고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은 어떠하냐.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여러분은 육신이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몸뚱아리는 여러분 마음이 갖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중요한 거지, 육신이 중요한 건 아니다.

육신에 치우친 인생은 중생적인 것이고, 마음을 바로 쓰면 부처님과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컵 속의 물은 물일 때는 얼음그릇 속에 비워도 꼭 맞는다.

무슨 그릇에 비워도 꼭 맞는다.

그러나 이 물이 한 번 얼어버리면 맞는 그릇이 없다.

이 물이 꽁꽁 얼어서 얼음물이 돼서 얼음그릇에 담지만 맞는 그릇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어떠하냐.

각자 마음이 경색돼서 얼어붙어서 부부도 안맞고 부모와 자식도 안맞고 형제도 안맞고 이웃과 이웃이 서로 안맞는다.

각각 살고 있는 것이다.

얼음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처럼 살아야 될 것이다.

그래서 노자도 물처럼 사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 했고 공자는 물처럼 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에서 “적정을 길러라, 고요하게 살아라, 고요 속에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적정이란 말은 고요 ‘寂’, 고요 ‘靜’자를 쓴다.

“ 고요하고 고요하게 살아라.” 지금 여러분들은 그 고요 속에 들어가면 길이 열릴 것이요, 그 고요를 모르면 인생은 실패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익한 것만 추구한다.

자기에게 이익되는 것이 아니면 안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익한 것 속에 ‘화(禍)’가 들어가 있다.

만약 물고기가 미끼 속에 낚시가 있다는 걸 알면 그걸 물겠는가.

낚시가 있다는 건 뭐냐.

사람이 어떤 ‘이(利)’ 것을 추구하는데 그속에 ‘화’가 들어있다는 걸 알면 덥석 물지 않는다.

요새 그것을 알지 못하고 덥석 물었다가 교도소에 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익한 것 속에 ‘화’가 있는 줄 모른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항상 습관적으로 자기를 구한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부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심지라 했는데 마음 ‘心’, 땅 ‘地’.

마음의 바탕이다.

그 마음의 바탕이 어떤 거냐.

마음을 너그럽게 쓰는 사람과 인색하게 쓰는 사람이 있다.

마음을 너그럽게 쓰는 사람은 탱자를 심어도 유자가 되는 수가 있다.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옹색한 사람은 유자를 심어도 탱자가 된다.

자기를 돌아 볼 줄 아는 의식이 있어야 된다.

지금 여러분이 자신을 돌아볼 때 굉장히 어리석은 존재임에도 자기를 돌이켜서 반성해 본 적이 없다.

무엇이 바쁜지 무엇에 시달렸는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려는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법문은 신비하고 이상한 얘기가 아니다.

인간이 바르게 살아나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유마힐 거사 어록 중에, “마음을 곧게 쓰는 것이 보살 정토다”란 말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직심(直心)’이 없다.

곧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없다.

마음이 깊고 깊은 것이 보살 정토고 마음이 깊고 깊은 사람이 극락정토에 가는 것이다.

지혜의 마음이 이 극락 정토에 가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란 판단력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에 대해 판단이 명석한 그런 이해를 돕기 위해 부처님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바깥 세상만 바라보면 온통 뒤집히는 것 같아도 여러분의 심성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부동의 세계가 있다.

동요하지 않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

그래서 사자가 사람에게 달려들 때 사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흙덩어리를 주물러서 휙하고 던지면 그것에 관계없이 사람을 무는 건 사자의 지혜다.

개에게 흙덩어리을 주물러서 휙하고 던지면 사람에게 달려들다 말고 흙덩어리을 물고 가는 건 개의 습성이다.

중생은 사자와 같이 살아야 된다.

그 지혜의 능력이 그만큼 이치의 세계가 다르다.

마음의 바탕에 어지러움이 없는 정당한 마음과 지혜를 닦아야 된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여러분의 심성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마음을 연주할 줄 아는 마음도 있어야 된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거문고가 있어도 그 나라 국민이 연주하는 솜씨가 있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그런데 연주할 만한 솜씨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서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을 못 만나면 피장파장이다.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 마음을 살피지 못하면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유익한 바가 없다.

항상 자기가 자기 마음을 살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그 성품이 궁하여 다하지 못하면 좌선염불해도 이익한 바가 없다.

정법을 믿지 못하면 법이 밝은 것을 믿지 못한다.

애써서 고행 수도를 해도 이익한 바가 없다.” 결국 불교라는 게 뭐냐.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다.

“ 닦아라.” 마음을 닦아야 될 것이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불교를 믿는 사람의 절개가 있어야 된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경전을 알고자 할진데 마땅히 그 뜻을 밝히기를 허공과 같이 하라.

망상과 모든 고뇌를 멀리해서 마음에 향하는 바가 다 걸림이 없게 하라.”

무진장스님─부처의 마음

부처의 마음 무진장 스님(전 포교원장) “범부가 곧 부처님을 만드는 재료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진여본성 찾아야” 우리가 진실로 인생을 복되게 살고자 한다면, 아침저녁으로 십 분씩 참선을 하고 부처님의 경전을 독송해야 합니다.

불자라면 의무적으로 아침마다 금강경을 독송해야 할 것입니다.

참선도 아니하고 독경도 아니하고 염불도 아니하면서 복을 기다리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부처님 앞에 나아가면 먼저 무릎꿇고 예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24시간 모두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버릇 해야합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있는 사람의 불성이 본래 차이가 없건만은 다만 어리석은 자와 깨달은 자가 달라서 같지 아니할세.

그런 까닭에 어리석은 자도 있고 지혜로운 자도 있는 것이니라.

세상사람들이 하루종일 반야를 외우는데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밥을 말하되 배고픈 것과 같으니 입으로만 지혜를 논하면 만겁의 세월이 흐를지라도 견성할 수 없느니라.

입으로 밥을 말하되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지혜의 능력을 본래 갖추고 있으며, 결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사람들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지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내던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치로 알기만 하고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입으로 말하고 지혜로운 자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법문을 들어도 자기 자신이 실천하고 있느냐를 생각지 않고 법사만을 원망해요.

법사가 똑같은 법문을 열 번을 해도 여러분이 실천하지 않고 있는 내용이라면 항상 스스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실천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법사는 반복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실천이 될 때까지 법문을 반복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논둑을 걸어갈 때, 내 더러운 발바닥으로 걸어가 보면 때때로 매우 좋은 흙을 밟고 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옛날 어른들은 대부분 흙을 빚어 부처님을 조성했어요.

그런데 이 신발을 신고 내 더러운 발바닥으로 그 흙을 밟고 걸어가지만 끝내는 흙을 캐내서 부처님을 조성하면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흙으로 깔려 있을 때는 밟고 갔지만 그 흙을 캐내서 부처님을 조성하면 그 흙 앞에 우리는 절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범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범부가 곧 부처님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범부가 없으면 부처님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없으면 지혜라는 말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범부라 할 것이요, 한 생각을 깨달은 즉 부처라 할 것이며, 한 생각이 경계에 부딪히면 곧 번뇌요, 한 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보리라 하는 것이니라.

보리가 곧 번뇌요 번뇌가 곧 보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장애로 인해 똑같이 법문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또 어떤 장애로 인해 보리 즉 번뇌의 실상에서 항상 번뇌로 기울까요.

그렇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을 때에는 부처이니 만가지 법의 이치가 다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하여 자신 가운데를 쫓아서 진여본성을 보려하지 않는가.

? 보살계경에 일러 말씀하기를 나의 본원자성이 청정하니 만일 스스로의 심성가운데를 바로 알 것 같으면 다 불도를 이룰 수 있다.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앉은 자리에서 한 생각 돌이키면 도리어 본래본심을 알 수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말이죠 만 피트만 올라가면 구름 한점없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끼어 있는 날 구름아래 내려오면 세상이 캄캄하죠.

세상이 캄캄한 게 아니라 구름이 끼어있기 때문에 캄캄한 거죠.

우리 마음 가운데 탐진치라고 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가리워서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지 만일 법문을 듣고 그와 같은 그림자를 모두 걷어낸다면 우리는 실로 맑은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든 부처님도 금으로 만든 부처님도 참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들 심성가운데 있는 부처님이 참부처님.

조주스님어록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나무로 깎아 만든 부처님은 불을 지나가지 못하고, 금으로 만든 부처님이 아무리 찬란해도 용광로를 지나가지는 못한다.

흙으로 빚은 부처님이나 나무로 깎은 부처님이나 금으로 조성한 부처님이 참 부처님이 아니라 참 부처님은 우리들 심성가운데 부처가 참부처이다.

그러므로 그 참부처님에게 귀의하는 자는 자기의 심성가운데에 착하지 못한 마음 질투하는 마음 왜곡된 마음 내가 하는 그릇된 망령된 마음, 남을 업신여기고 가벼이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교만한 마음, 옳은 진리에 대해서 옳다고 말하지 못하는 삿된 마음, 아첨하는 마음, 내가 아는 오만심을 24시간가운데 불생지양을 행해서 항상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잘 살피고 다른 이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귀의하는 것이 된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부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대로 행하고 계신가요.

만일 만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본래 법이 청정하지만은 한 생각 쓸데 없는 망념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니, 악한 생각을 하면 지옥이 될 것이요, 사람이 어리석은 과보를 받는 것이 축생이고, 올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귀신이니라.

한 지혜가 능히 말년의 어리석음을 구제하나니.

무슨 지옥이 있냐하면 발설지옥, 화탕지옥, 도산지옥도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정말 이런 지옥이 있을까요.

상징언어와 사실언어의 구별이 못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바람이 불어서 먼지가 날리면 눈에 들어와서 눈병이 나요.

더러운 먼지는 악한 먼지예요.

선한 먼지는 참 좋은 것이에요.

다이아몬드나 금가루는 선한 먼지 아니겠어요.

하지만 악한 먼지를 제거하고 선한 먼지를 넣는다고 해서 눈병이 낫느냐.

이 눈동자가 왜 환하게 보입니까? 선한먼지도 없고 악한먼지도 없어서 눈에 가리워진 것이 없으므로 잘 보이는 것입니다.

이 눈동자는 아무것도 없어서 밝은 것이에요.

우리 성품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한 생각을 하면 선한 것이 가리워지고 악한 생각을 하면 악한 것으로 가리워지고 그러므로 이 성품이 밝아지려면 선도 버리고 악도 버려서 아무것도 없어야만 합니다.

마음 가운데를 향해서 의지하며 자기의 성품가운데서 진실로 뉘우쳐 참회를 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