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일스님─근본을 소중히 여겨야

근본을 소중히 여겨야 부석사조실 근일 큰스님 법문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라가면 종지를 잃어버리도다.

모든 것의 근본은 ‘나’요 ‘나’의 근본은 마음이라.

이 마음자리를 알면 모든 것을 얻고, 보고 듣고 맛보는데 끄달리면 다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근본을 소중히 여겨야 되고 또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근본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근본보다 육근 육신에 끄달리다보니 또 항상 방황하게 되고 경계에 끄달리게 됩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율은 부처님의 행이며 정토는 부처님의 실연이라 했습니다.

그토록 선은 중요하다는 뜻인데 오늘 ‘나를 찾는다는 禪의 세계’라는 제목 자체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선을 알게 되면 나를 알게 되며 대아의 내가 있으며 소아의 내가 있고 육체적인 내가 있으며 정신적인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선 대아의 나를 보게 되면 우주에 나 아님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믿고 알고 수행해서 터득해야 됩니다.

이것을 신해행정(信解行定)이라 하는데 믿음은 깨달음에 비례하고 선악에 비례합니다.

어리석을수록 믿음이 없고 악할수록 믿음이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칭찬을 듣게 되면 부끄럽게 생각하고 꾸지람을 듣게되면 교훈으로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일구에 천득하면 불조의 스승이요, 이구에 천득하면 인천의 스승이며 삼구에 천득하면 자구도 부재라 했습니다.

일구란 말하기 이전에 바로 알았다는 뜻으로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란 말입니다.

이구란 양구방할입니다.

주장자를 들었다 놓았다 또는 빙그레 미소 짓는다든가 할을 한다든가 이것이 다 이군데 여기에서 알았다면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라 합니다.

이렇게 구구하게 설명하는 것을 삼구라 합니다.

팔만대장경 내지 제자백가를 다 통달해서 알았다 하더라도 아는 것으로 전하다면 삼구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근본 속에 부족함이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생각하고 너그럽게 받아주었으면 합니다.

고고봉종분화구요 해저산호백어류도라 나무아미타불 세상만사 망중한하니 풍운집방무중류로다 나무아미타불 높고높은 봉우리에 분화구가 있고 바다밑에 산호 어우러지고 온갖 고기 노닐도다.

세상만사를 다 놓아버리고 한가로이 거니노니 구름과 바람을 잡고 노니 없는 가운데 또한 있도다, 억! 참선은 수토조사관이요 묘요공 심노부절이도다.

조광불토하고 심노부절이면 긴시의조부목정력이로다.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조사관을 뚫는 것이오 깨달음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 된다.

즉 조사관을 뚫지 못하고 마음길이 끊어지지 못한다면 저 풀잎에 의지한 것 같고 나무에 붙어있는 도깨비와 같다고 그랬습니다.

이 마음자리가 끊어지지 않고서는 깨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자리란 뭣입니까? 좋아하고 미워하고 시비분별하는 생각이 떨어지지 않고서는 깨칠수 없습니다.

좋아하고 미워하지 말아야 되고 간택심을 내지 않는다면 바로 통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매사에 근본을 소흘히 하고 지엽적으로 끄달려서는 깨치기 어렵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근본이 소중하거든요.

부처님께서 사십구년 설법을 하실 때 여러 가지 방편을 나투셨지만 제일 처음에 근본이치를 설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믿지를 않고 알아듣지 못해서 삼법인을 설명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고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일체개고입니다.

이 괴로움은 집착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집착을 없앨려면 도를 닦아라 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제행무상, 즉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생하면 멸하고 멸하면 생하니 끝없이 윤회하면서 반복하니 영원하지 못하다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법무아로 본래는 나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이죠.

이건 주장자다 또는 산이다, 절이다, 지구다, 이름 붙여놓는 것이 시간문제지요.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열반적정인데 여기서 열반은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입니다.

열반적정까지 합쳐서 사법인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골수라 할 수 있습니다.

49년 설법을 이 네가지로 표현 것이거든요.

옛날에 한 장자가 아들을 잊어버려서 찾을려고 애를 썼는데 그 아들이 나중에 장성해가지고 거지가 되어 찾아왔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자기 부모를 모른단 말이예요.

부모가 반갑게 맞이해도 아들은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달래도 안되길래 밖에서 쓰레기 줍고 청소하면 월급을 후히 주겠다하여 그 아이를 구슬렸습니다.

그 성 안에 비취, 창검 들고있는 사람들 보면 들어오기가 무섭거든요.

그래서 할 수없이 성밖에서 일하도록 한 것이죠.

이것이 제법전과 아함경입니다.

그 아함경 내용이 일체개고거든요.

모든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온다는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괴롭고 원수를 만나고 미워하는 것이 괴롭고 오음성고 색수상행식의 일어남이 괴롭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비단 여기 여러분 뿐만아니라 인간세상은 전부 고통이거든요.

그러나 알고보면 괴로움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즐거움도 있지요.

그래서 반고반락이라했습니다.

반절은 즐겁고 반절은 괴로운것이 인간세상인 줄 번연히 알면서 괴로움을 이야기 했느냐.

이 기초적인 것부터 해결해야만이 어리석은 중생이 믿고 깨닫을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장자의아들 얘기로 돌아가봅시다.

그 아들이 처음에는 그 성문지키는 사람이 무서웠는데 13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무섭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성문앞을 드나들었답니다.

이렇게 성문을 차츰 드나드는 것이 아함방등경입니다.

방등경 내용은 12인연과 팔정도입니다.

금지보물 반야경이라 제경전과 아함경 출입자제 방등경 금지보물 반야경인데 반야경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즉공이오 공즉색이니 이름이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나라는 것이 제법 무아입니다.

본래 내가 없는데 고통이 따를수 없잖습니까.

이처럼 둘이 아닌 경계만 가도 대한합니다.

제법무아의 도리가 반야사상입니다.

그 다음 제법무아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육도중생이 무비시아입니다.

즉 육도중생이 다 너 아닌게 없다는 뜻입니다.

일체개고의 반대 의미는 일체개락이요, 제행무상의 반대는 상주불멸입니다.

중생제도 하기위하여 할 수 없이 어린아이 울음달래듯 부처님께서 고구정령 말씀하던 것을 여러분들은 감지하고 들으셔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행은 무상하다는 것만 같고는 충분한 설득력이 없거든요.

알고보니까 상주불멸이라, 항상 귀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주 큰 눈으로 보면 제행무상관에서 한단계 더 들어가서 보면 제법무안데 제법무아의 반대는 육도중생의 무비시아거든요.

성경에도 그런말이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빛이요 진리이니 나를 믿는자는 구원을 받을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리라’ 나는 길이라고 했으니 길이 곧 나고 나는 진리라고 했으니 진리가 나면 나는 빛이라 했으니 빛이 곧 나란 말입니다.

자세히 보면 전부가 빛으로 가득 차있고 길로 가득 차있고 진리로 가특 차있다면 전부 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같은 뜻인데 목사나 신부들은 바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서울대 교수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손학규씨가 작년에 자기 친구하고 부인하고 함께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함께 이야기하는 동안에 제가 ‘당신 종교가 뭐요’ 물어보니 기독교라는 거라.

내가 좀 테스트좀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한시간반 동안 많은 질문을 했거든요.

나 밖에 신을 섬기지 말라 했는데 왜 여호와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느냐.

나 자신을 섬겨야지.

전 우주가 다 나 아님이 없는데 말입니다.

부처님도 똑같는 말씀을 했거든요.

사상과 이념 종교도 뛰어넘어야 할텐데 전부 소아인 나에 집착하다 보니 이렇게 허우적 거리지 않느냐고 했더니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또 거울 속에 진리가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춥니다.

웃으면 웃는대로 성내면 성내는대로 빛깔 그대로 비춘 것이 거울입니다.

보이는 것은 다 나의 거울입니다.

이렇게 설명했더니 이 양반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여기서 생활에 도움될만할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요즘 IQ니 EQ니 PQ, MQ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천진해야 깨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을 싹 비워버려야 됩니다.

지식 그거야 별거 아닙니다.

고인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혜는 샘을 파서 물을 얻은 것과 같아요.

종이로 가리면 안보이잖습니까.

나라는 생각 다 놓아버려야 여기서 바로 보입니다.

정경무렴의 시계면 대정무렴이 시경이오 득자재력을 해라.

즉 무렴청정 일체체에 물들지 않고 청정하거든 생사에도 물들지 않고 시비분별에도 물들지 않고 물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까지도 다 떨어져야 청정한겁니다.

이것이 바로 선이자 계입니다.

대경무동이 시경이라, 경계를 대해서 동하지 안하되 일체 동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같이 자제하는 힘을 얻는 것을 지혜라 하는데 이것을 계정혜 3학 선정의 3악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EQ가 바로 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게 정정취입니다.

불교에서 부처님께 행하여야 할 것이 네가지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을 호념하고 두 번째는 부처님의 덕을 실천에 옮기고 세 번째는 정정취라 즉 바른 정을 취하라, 네 번째는 중생을 이익케 하라 입니다.

이것이 IQ, PQ EQ MQ와 딱 맞아들어갑니다.

입으로는 부처님 말씀을 말하고 안으로는 항상 부처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염불하십시오.

쓸데없이 남을 흉보고 욕하면 구업만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세음보살’ 하며 부처님을 생각하면 여러분의 얼굴도 부처님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복하면 취미가 됩니다.

취미가 거듭되면 소질이 되고 소질이 거듭되면 업이 되고 업이 거듭되면 고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IQ가 높아집니다.

정신일도면 하사불성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그 다음에 PQ라는 것은 부처님의 덕을 실천에 옮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덕있는 사람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줄지언정 죽이지 않고, 베풀지언정 훔치지 않고, 청정할지언정 부정하지 않고, 좋은 말할지언정 악한 말을 하지 않고, 깨어있을지언정 취하지를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PQ입니다.

세 번째 정정치라 바른정을 취하는 것이 바로 EQ입니다.

네 번째 MQ의 M은 Morality 또는 Moral이라 하는데 이것을 일반적으로 도덕성이라 합니다.

이것을 쉽게 번역하면 보살심입니다.

보살은 누굽니까? 지옥에서 고통받은 중생이 다 성불한 뒤 성불하겠다고 서원한 바로 지장보살아닙니까? 누구든지 내 이름을 부르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분이 관세음보살이십니다.

IQ가 낮고 PQ도 낮고 EQ가 낮아도 그런 분이 계신다면 우리들은 존경할것입니다.

어머니 마음이 바로 MQ입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가졌을 때 몸이 아팠다 해도 아이한테 안좋다고 하면 약을 안먹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의 땀냄새도 저 구수하게 느껴지고 얼굴만 보아도 병이 나아 버립니다.

모든 인류에게 어머니 마음으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이웃이 나보다 잘 살아야 내가 행복하고 우리나라보다 다른나라가 잘살아야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서는 평화도 통일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초파일 전야제에 있었던 일입니다.

영주 소백관광호텔에서 전야제를 하는데 목사님도 오고 신부님도 오고 유림대표도 오고 지역지도자와 스님까지 약 300여 명이 모여서 법회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목사가 축사를 하는데 ‘오늘날 사회가 바로 될라면 우리 불교가 바로서야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그 목사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우리 기독교’ ‘우리 천주교’란 말을 쓸 수 있을까요.

진정 ‘우리’라는 말의 의미를 크게 가진다면 보이는 것은 나의 모습이요, 들리는 것을 전부 내소리로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하는 말이 미국에는 민들레가 하도 많아서 민들레를 없애주십시오하고 진정을 올렸답니다.

그랬더니 3년만에 답이 오기를 민들레를 사랑하시오, 그렇게 답이 왔더랍니다.

민들레를 사랑하니까 오히려 귀찮지 않았다고 그러더군요.

한 법도 취할 것이 없고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안다면 민들레를 사랑하듯이 종교가 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사랑해야 할 원수도 없습니다.

오른손이 주면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성경에 씌여졌는데 오른손 마저 몰랐다는 생각까지도 다 떨어지면 그게 바로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사람만 포교하면 초집보살이 됩니다.

가정에서도 화합하고 사회에서 화합하며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걱정 근심하지 마시고 갈 때는 모두 빈손으로 간다는 무상을 잊지말며 영원히 사는 방법은 이방법 뿐이다 생각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정근하십시오.

또 말도 긍정적으로 하고 화가 나도 참고 인내하면 ?달음의 길이 멀지 않았다고 봅니다.

한 제자가 조주스님께 묻길 스승의 스님 화상의 가풍이 어떻습니까? 하니 큰스님께서 안으로 한 물건도 없고 밖으로는 구할 바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수행에는 분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부터 이것을 화두삼아 생각하십시오.

신앙이라는 것은 무조건 믿어야 됩니다.

조금도 의심없이 믿으면 조주스님과 통할 것입니다.

조주스님 말에 제가 사족을 붙인다면 제행이 무상하니 구할 것이 없고 상주불멸하니 따로 구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잡운이 일면이니 노운이 월면이로다.

“억!” 근일 큰스님 (영주 부석사조실) 법명 : 勤日 법호 : 玄峰 1940년 2월 29일 출생.

1961년 도원스님을 은사로 득도 1980년 영남대 경영대학원 졸업 1980년~ 1992년 고운사 주지 1998년 능인학원 이사장 제 9,10,11,12대 중앙종회 의원 고운사 고금당선원 선원장, 부석사 봉황선원 선원장, 現 고운사, 부석사 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