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서스님─선한 마음을 잊지 마라

선한 마음을 잊지 마라

-월서스님-

탐욕은 인간을 미혹한 삶으로 이끌어 수행 통해서만 ‘탐욕’ 씻어낼 수 있어

‘욕망을 최고의 반려로 삼는 사람은 오래도록 미혹의 세계를 헤맨다.

이 곳 저 곳으로 떠돌아다니며 미혹한 생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미혹의 세계를 뛰어 넘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사람은 탐욕이 괴로움을 낳는다는 것을 알아 집착을 끊어야만 한다.’인간에게 가장 큰 괴로움은 탐욕으로부터 오는 속박이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휘몰아 이로 인해서 인간을 미혹의 생으로 떠돌게 하는 원인이 된다.

부처님은 “나는 탐욕의 마음보다 더한 속박을 보지 못했다”고 설한 바 있다.

이는 탐욕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을 악하게 만들고 미혹의 세계로 이끈다는 것을 염려하신 말씀이다.인간에게는 세 가지의 욕구가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이다.

이 세 가지를 잘 다스리기만 해도 성불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기본적인 욕구조차도 다스리지 못하면서도 인간은 또 다른 욕구인 탐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을 미혹의 세계로 빠뜨리게 가장 큰 근본적인 이유이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를 탐하려고 하고,

소유하려고 하고 붙잡으려고 하는 ‘마음의 집착’을 끊어내는 방법이다.

이러한 집착은 나중에 자신도 모르게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미리 부처님은

예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최상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나 부귀에 홀리지 않고 인생의 뒷면에 흐르는 덧없음에 대한 무상(無常)을 깨닫는 것이다.

무상을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덧없음을 깨닫는 데는 많은 고행의 순간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어리석음에 빠져 고통 속으로 헤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 순간을 잘못 살아왔기 때문인데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소유하려하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붙잡으려 하고, 자기 것인 아닌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자기 자신을 한없는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스스로 뉘우치지 못한 탓이다.

한국불교의 근대 고승이었던 효봉 스님은 인간이 고통 속에 헤매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래의 마음인 ‘착한 마음’을 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아유일륜월(我有一輪月) 무영역무상(無影亦無相)

약욕견차월(若慾見此月) 선심절막망(善心切莫忘),

즉 “나에게 달이 하나 있으니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네.

이 달을 보려면 착한 마음 잊지 말라”는 글귀이다.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달이란 무슨 말일까.

모든 인간들이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지고 있는 줄까지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되묻는 효봉 스님의 고담준령(高談峻嶺)의 말씀이다.

모든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달빛 같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조차 모르니 참으로 ‘어리석다’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부처님이 ‘집착을 끊고 무소욕의 삶을 살아라’하는 것이나 효봉 스님이 ‘착한 마음 잊지 말라’는 것도 은밀하게 보면 일맥상통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렇듯이 어리석은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 순간을 노력 하고 정진하지 않고 오직 탐욕에만 눈이 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서스님─피안은 어디인가

피안은 어디인가

월서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피안은 결코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생각 버리면 저절로 찾아와 어느 때 세존이 사밧티 교외의 제타 숲에 있을 때였다.

그 때 제자 아난다가 세존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여래, 아라한, 옳게 깨달으신 분이 세상에 없는 동안 외도들이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존께서 나심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동안에는 반딧불이 빛을 낸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그 빛은 점점 사라져 반딧불은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된다.

외도(外道)의 빛 또한 그와 같다.” 세상은 항상 ‘양극단(兩極端)을 이루고 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기 마련이다.

이 극단은 하나가 멸(滅)하면 다른 하나가 새롭게 생성된다.

부처님이 반딧불의 비유를 통해 외도들의 멸을 예견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을 꾸짖는 이 설법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던져준다.

이와 같이 세상은 바른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고 옳지 않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바른 것이 더욱 빛을 발한다.

여기에 수행의 깊은 정신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숨을 쉬며 살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두고 항상 이상형의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형의 세계가 다름 아닌 피안이다.

원래 피안(彼岸)이란 이쪽이 아닌 ‘저쪽 언덕’이란 뜻이다.

수행자는 언제나 저쪽 언덕을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있으며 그 피안에 가기 위해 모든 성력(誠力)과 수행을 기우려 정진하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피안의 실체를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 피안을 두고 해탈의 경지, 성불, 깨달음, 꿈, 희망 등 수많은 언어로서 그곳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막연한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도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쪽 언덕’이란 과연 어떤 곳이기에 우리들이 그토록 열심히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을까? 또 ‘저쪽 언덕’이란 현실적으로 우주 어느 한구석에 정말 있는 것일까? 이 피안을 두고 불교에서는 극락이라 하고 예수교에서는 천당이라 하였으며 혹은 유토피아니 파라다이스니 하는 이상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불교에서는 이 피안을 두고 극락이란 뜻과 동일한 어의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불교에서는 피안을 두고 하나의 가설된 세계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이 우주 안 어느 구석에 실재한 세계로도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피안이니 극락이니 하는 말들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소화시킬 것이며 어떻게 합법화 할 수 있을까? 아니 합법화가 아니라 대성(大聖) 석가세존의 참마음이 무엇이며 이러한 세계는 실재 어느 곳에 있을까? ‘피안으로 건너간다.’ 이를 단순하게 풀이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개념이다.

마치 강물이 있는데 이쪽 기슭에서 배를 타고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 같은 관념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반드시 죽어야만 피안으로 가는 줄로만 알고 있다.

『화엄경』에 보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와 중생성불찰나중(衆生成佛刹邪中)’이란 말이 있듯이 피안이란 곳에 도달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든 어리석은 생각만 완전히 제거가 되면 찰나에 그것이 피안인 것이다.

결국 피안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사악한 생각들과 어리석은 생각들을 버리면 자연히 피안을 얻게 된다.

월서스님─선한 마음을 잊지 마라

선한 마음을 잊지 마라

-월서스님-

탐욕은 인간을 미혹한 삶으로 이끌어 수행 통해서만 ‘탐욕’ 씻어낼 수 있어 ‘욕망을 최고의 반려로 삼는 사람은 오래도록 미혹의 세계를 헤맨다.

이 곳 저 곳으로 떠돌아다니며 미혹한 생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미혹의 세계를 뛰어 넘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사람은 탐욕이 괴로움을 낳는다는 것을 알아 집착을 끊어야만 한다.’ 인간에게 가장 큰 괴로움은 탐욕으로부터 오는 속박이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휘몰아 이로 인해서 인간을 미혹의 생으로 떠돌게 하는 원인이 된다.

부처님은 “나는 탐욕의 마음보다 더한 속박을 보지 못했다”고 설한 바 있다.

이는 탐욕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을 악하게 만들고 미혹의 세계로 이끈다는 것을 염려하신 말씀이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의 욕구가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이다.

이 세 가지를 잘 다스리기만 해도 성불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기본적인 욕구조차도 다스리지 못하면서도 인간은 또 다른 욕구인 탐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을 미혹의 세계로 빠뜨리게 가장 큰 근본적인 이유이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를 탐하려고 하고, 소유하려고 하고 붙잡으려고 하는 ‘마음의 집착’을 끊어내는 방법이다.

이러한 집착은 나중에 자신도 모르게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미리 부처님은 예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최상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나 부귀에 홀리지 않고 인생의 뒷면에 흐르는 덧없음에 대한 무상(無常)을 깨닫는 것이다.

무상을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덧없음을 깨닫는 데는 많은 고행의 순간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어리석음에 빠져 고통 속으로 헤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 순간을 잘못 살아왔기 때문인데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소유하려하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붙잡으려 하고, 자기 것인 아닌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자기 자신을 한없는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스스로 뉘우치지 못한 탓이다.

한국불교의 근대 고승이었던 효봉 스님은 인간이 고통 속에 헤매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래의 마음인 ‘착한 마음’을 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아유일륜월(我有一輪月) 무영역무상(無影亦無相) 약욕견차월(若慾見此月) 선심절막망(善心切莫忘), 즉 “나에게 달이 하나 있으니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네.

이 달을 보려면 착한 마음 잊지 말라”는 글귀이다.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달이란 무슨 말일까.

모든 인간들이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지고 있는 줄까지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되묻는 효봉 스님의 고담준령(高談峻嶺)의 말씀이다.

모든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달빛 같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조차 모르니 참으로 ‘ 어리석다’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부처님이 ‘집착을 끊고 무소욕의 삶을 살아라’하는 것이나 효봉 스님이 ‘착한 마음 잊지 말라’는 것도 은밀하게 보면 일맥상통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렇듯이 어리석은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 순간을 노력 하고 정진하지 않고 오직 탐욕에만 눈이 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