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스님─인과(因果)의 무서움

인과(因果)의 무서움

-마성스님-

몇 해 전 아주 특별한 천도재에 참석했다.

어떤 보살이 밭일을 하다가 뱀을 만났다.

잠시 밭일을 중단하고 뱀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런데 뱀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자칫 잘못해 뱀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그 보살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큰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뱀의 천도재를 지내주자는 결심이었다.

그 보살은 인과(因果)를 철저히 믿었고, 천도재를 통해 뱀을 죽인 살생의 업을 참회하고 싶었다고 했다.

어쨌든 천도재를 잘 마무리됐다.

지금 이 세상에 인과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착한 덕을 쌓으면 선의 과보를 받고(善因善果), 나쁜 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惡因惡果)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 인과의 법칙은 호리(毫釐)의 오차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인과법을 믿지 않고 죄를 저지른다.

붓다는 처음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난 뒤, 깨달은 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여러 부류의 인간이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이를테면 더러움이 적은 사람, 더러움이 많은 사람, 영리한 사람, 둔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아는 사람,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것이었다.

특히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교화하기 어렵다.

이들은 내세를 믿지 않고 죄의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과를 믿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남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지은 업(業)은 결코 숨길 수 없다.

그가 지은 업은 그것이 선업이든 악업이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게 돼 있다.

인간이 지은 업은 일단 결정되면 그 과보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 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그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른바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를 3가지로 나눈다.

이 생에서 지어서 이 생에서 그 과보가 나타나는 업을 순현업(順現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가 다음 생에 나타나는 업을 순생업(順生業)이라고 한다.

차후생 또는 여러 생에 걸쳐 나타나는 업을 순후업 (順後業)이라고 한다.

지금 당장 그 과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업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 업을 지은 사람에게 그 결과가 나타나고야 만다.

죄를 짓고도 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인과의 무서움을 안다면 악행을 삼가게 될 것이고 이 사회는 보다 맑고 향기로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불교포커스에서-

마성스님─방생(放生)의 공덕

방생(放生)의 공덕

마성스님

방생의 공덕 방생은 다른 이가 잡은 산 물고기·날짐승·길짐승 따위의 산 것들을 사서, 산이나 물에 놓아 살려주는 일이다.

또한 방생은 살생과 반대되는 말이다.

살생을 금하는 것은 소극적인 선행(善行)이지만, 방생은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는 작선(作善)이다.

그런데 중화민국의 인광대사(印光大師)는 방생을 하면 열 가지 큰 공덕을 받는다고 하였다.

인광대사가 지은 ‘방생십대공덕'[1]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한다.

첫째는 전쟁의 위험이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죽이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개인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지키고, 나아가 방생을 하게 되면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므로, 자연 전쟁의 기운은 형체도 없이 소멸된다.

그러므로 방생은 이러한 전쟁의 위험을 막는 적극적인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나 교육자, 사업가들이 이것에 주의하여 힘으로나마 방생운동을 제창한다면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둘째는 기쁘고 길상스러운 일들이 모두 모인다.

우리들이 자비의 마음을 한번만 일으켜도 그 몸에 기쁜 기운이 모이는데, 하물며 죽어 가는 생명을 놓아서 살려주는 방생을 행한다면 기쁘고 성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원리이다.

셋째는 건강하고 오래 산다.

경에 이르되,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고 방생한 사람은 두 가지 복덕의 과보를 받는다.

첫째는 장수(長壽)요, 둘째는 복이 많고 병이 없이 오래 산다”고 하였다.

넷째는 자손이 번창한다.

방생이란 하늘과 땅의 체성(體性)과 같아 태어남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방생은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므로 자손이 창성할 것은 당연하며, 자식 가운데에서도 남자를 얻는 경사를 맞게 된다.

다섯째는 모든 부처님께서 기뻐하신다.

일체의 생물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자식과 같이 본다.

따라서 죽어 가는 한 생명을 구하면 바로 부처님의 한 아들을 구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다.

여섯째는 은혜에 감응한다.

죽음에 임박한 생물을 구하여 살려주면 모두 크게 환희하여 은혜에 감응하게 되므로 만겁(萬劫)의 좋은 인연이 된다.

일곱째는 모든 재난이 없다.

자비로운 사람은 복덕이 날로 늘어나기 때문에 일체의 우환과 재난이 모두 형체도 없이 소멸된다.

여덟째는 천상에 태어난다.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고 방생하는 사람은 내세에 사왕천에 태어나 끝없는 복을 누린다.

만약 이런 사람이 정토행(淨土行)을 겸하여 수행하면 곧바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며, 그 공덕은 실로 다함이 없다.

아홉째는 모든 악이 소멸된다.

현대는 극도로 위험한 시대이다.

잘못된 음주의 버릇과 성(性)의 문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방생하여 은혜에 보답하면 모든 악이 소멸되고 태평하게 된다.

열째는 복덕과 수명이 영원하다.

동물은 하급에서 고등으로, 인류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이런 점은 동물과 인간이 서로 같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자들이 말하길, “무릇 생물은 외계의 상태에 따라 변화한다.

사람들이 불살생계를 지키고 방생하는 것을 세세 생생토록 쉬지 않으면 착한 마음이 서로 상응하여 자자손손(子子孫孫)으로 서로 전하여 복덕과 장수를 누린다.

이상의 열 가지가 방생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다.

인간은 본래 자기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존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살생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 전쟁과 싸움은 상대를 죽이려는 살생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계에서는 널리 방생을 권해서 살생하려는 악의 씨를 뿌리뽑고, 방생으로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적석도인의 칠종방생 적석도인(赤石道人)은 다음의 일곱 가지 경우에는 꼭 방생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첫째는 자식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방생하라.

세상 사람이 자식을 얻고자 약 먹기에 힘을 쓰나 한 평생을 먹더라도 효험을 보지 못하는 자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병이 있거든 약을 먹고, 자식이 없거든 방생하라.’고 권한다.

천지의 큰 덕은 태어남이다.

진실로 남의 생명을 살려주면 곧 나를 살려주는 것이다.

방생을 하면 원하는 자식을 얻을 수 있다.

둘째는 자식을 잉태하면 반드시 방생하여 산모(産母)를 보전하라.

잉태하여 자식을 보는 것은 사람과 만물이 다르지 않다.

사람과 짐승도 모두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새끼 뱀을 내가 구해 주는데, 내가 자식을 잉태하였음을 아시면 하늘이 어찌 보호하지 않겠는가.

셋째는 기도함에 반드시 방생하여 복을 많이 지어라.

태어남을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은 제신(諸神)과 부처님이 동일하다.

이러한 제신과 부처님의 호생지덕을 생각하여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 생물들을 살려주어라.

만일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는 염불이라도 해주면 자연히 하늘이 감동하여 복을 얻음이 한량없을 것이다.

넷째는 미리 닦고자 하거든 방생부터 먼저 하라.

세간의 자선(慈善)은 방생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내가 자비의 마음으로 방생하면 반드시 불보살님의 가피의 덕을 입을 것이다.

다섯째는 재계(齋戒)를 가짐에 반드시 방생하라.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계율 지키는 것을 좋아하심은 만물의 자비심 두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아들 아님이 없다.

진실로 재계를 가지는 날에 방생하면 제불보살이 환희심을 낸다.

여섯째는 복록(福綠)을 구함에 먼저 방생하여 복을 쌓아라.

부귀명복(富貴冥福)은 요행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복을 짓는 자 반드시 명복(冥福)을 얻는다.

사람이 어진 마음으로 생물을 어여삐 여겨 그 목숨을 구제해 주면 나의 구제를 입은 자가 기회를 보아 보답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일곱째는 염불함에 반드시 방생부터 하라.

세상에 살면서 염불하는 사람은 자비심으로써 방생을 주로 하라.

생물을 구제함이 사람을 구제함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극형(極刑)을 범하는 것은 대부분 장난 삼아 하지만 동물들은 무슨 죄로 참혹한 환난을 만나야 하는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연지(蓮池) 대사와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의 방생으로써 급무(急務)를 삼아야 할 것이다.

연지대사의 칠종불살생 앞에서 살펴본 적석도인은 방생을 권하였다.

하지만 연지대사는 방생과 반대되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연지대사(蓮池大師)의 일곱 가지 불살생에 대한 교훈은 안진호(安震湖) 스님이 편찬한 석문의범(釋門儀範)에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고문체로 씌어졌기 때문에 현대인이 읽기에는 난해하다.

그래서 그 취지만 살리고 현대문으로 필자가 개작하였다.

첫째는 생일에 살생하지 말라.

자신이 출생한 날은 어머님께서 거의 죽을 뻔했던 날이다.

이 날에 결코 살생해서는 안된다.

재계(齋戒)를 지니고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

이러한 공덕으로 선망부모를 왕생케 하고, 현재 부모의 복덕과 수명이 증장케 해야 한다.

둘째는 자식을 낳거든 살생하지 말라.

모든 사람이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고, 자식을 얻으면 기뻐한다.

일체의 동물도 자기 새끼를 사랑한다.

내 자식의 출생은 기뻐하면서 남의 자식을 죽게 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자식이 태어나는 날 남에게 적선(積善)하여 복덕(福德)을 짓지 못할지언정 도리어 살생업(殺生業)을 지어서야 되겠는가.

셋째는 제사 지낼 때 살생하지 말라.

망령(亡靈)의 기일(忌日)에 살생을 경계하여 명복을 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살생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 악업(惡業)만 증대시킬 뿐이다.

넷째는 혼례에 살생하지 말라.

결혼이란 새로운 가정의 시작이다.

삶의 시초에 살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혼례는 좋은 날의 길사(吉事)인데, 이날 흉한 일을 행하는 것은 참혹한 것이다.

또한 결혼식을 하면 반드시 부부가 해로(偕老)하기를 축원한다.

사람은 해로하기를 원하면서 짐승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인간들의 만행이다.

다섯째는 연회(宴會)를 베풀 때 살생을 말라.

손님을 맞이함에 정결히 마련한 채식과 다과로 정성껏 대접하면 된다.

연회를 핑계로 살아있는 짐승의 목과 배를 갈라 비명소리가 진동하게 해서야 어찌 사람의 마음인들 좋겠는가.

식탁의 맛있는 고기는 도마 위의 살육에서 나온 것이다.

짐승의 원한을 나의 기쁨으로 삼아서야 되겠는가.

여섯째는 기도할 때 살생하지 말라.

사람들은 병이 들었을 때 기도하여 쾌차하기를 바란다.

남의 목숨을 죽여서라도 나의 목숨을 연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결코 목숨을 연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살생업만 더하는 꼴이다.

일곱째는 살생하는 직업을 갖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살생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가능한 그러한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살생하는 것을 직업으로 시작하면서부터 나쁜 과보를 받을 인(因)을 이미 지은 것이다.

어찌 내세의 악과(惡果)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어찌 생계를 꾸려갈 다른 방도를 찾지 않는가.

마성스님─ 오늘도 큰 기적이 있었구나

오늘도 큰 기적이 있었구나.

-마성스님-

흔히 “별 일 없으십니까?” 혹은 ‘별고(別故) 없으십니까?’라고 안부를 묻는다.

이 평범한 인사말 속에 삶의 참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별 일 없음’이란 ‘별다른 일이 없다’는 뜻이다.

별고란 ‘뜻밖의 사고’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별고가 있다면 큰일이다.

올 여름 태풍과 홍수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변고(變故)라고 한다.

변고란 ‘재난과 사고’를 말한다.

‘별 일 없다’라는 말을 군대에서는 ‘이상무(異常無)’라고 말한다.

반대로 ‘이상유(異常有)’라고 하면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군에서 아무 일 없는 것을 평상시(平常時)라고 한다.

줄여서 평시(平時) 혹은 상시(常時)라고도 한다.

평상시의 반대말은 비상시(非常時)다.

비상시란 곧 전시(戰時)를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는 것이 별 일 없는 것이다.

곧 건강하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잘 못 먹고, 잘 자지 못하고, 잘 배설하지 못하면, 분명 신체 어딘가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다.

별다른 일 없음이 곧 행복한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이다.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단란하게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다.

그런데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식사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이를테면 직장에 출근했던 남편이나 학교에 갔던 자녀가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이미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가 혹시 불행한 사고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 혼비백산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별 일이 생기고 나면 그때서야 아무 일 없던 그 때를 그리워하며, 그때가 바로 행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아무 일 없는 평범한 일상이 곧 행복임을 알아야 한다.

붓다는 『숫따니빠따(經集)』에서 “부모를 섬기는 것,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본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평범한 일상 속에 최상의 행복이 있다는 말이다.

부모가 살아있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최상의 기쁨이다.

그리고 화목한 가정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다.

여기에 다시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복은 평범한 일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똑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안정된 가정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태를 느껴 밖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이 간혹 있다.

그때부터 그 가정에는 불행이 시작된다.

삶의 재충전을 위한 일상의 탈출이라면 권장할만하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일 없음보다 못하다.

그 평범한 일상이 곧 기적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전에서 말하는 기적이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아주 신기한 일’을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느님·성령의 힘을 입은 특수한 사람이 행하는 일.

곧, 예수가 기도로써 문둥병·앉은뱅이를 고친 일’ 등을 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능력으로서 불가능한 일을 이룬 것만 기적이 아니다.

일상이 곧 기적인 것이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 평상시가 곧 기적이다.

이 지구상에는 지금도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였다.

이 사바세계는 투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인간으로서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삶 자체가 전쟁이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것, 그 자체에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외줄타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조건 부처님께 매달려 기복적인 신앙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맹목적으로 부처님께 구원을 청하는 것은 올바른 불교도의 신앙이 아니다.

부처님은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한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보다는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키고 바르게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한다면 오늘도 어제와 같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인 불교도의 삶인 것이다.

외출했다가 사찰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종무소에 들러 ‘별 일 없었느냐?’고 묻는다.

종무소 직원은 ‘절에 무슨 별 일이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오늘도 큰 기적이 있었구나!’ 하고 안심한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삿베 삿다 바완뚜 수키땃따.)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불교포커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