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본스님─공덕과 복전

공덕과 복전 – 정선본 스님 – 『법화경』에 다음과 같이 유명한 회향의 게송이 있다.

“원하옵건대 지금 닦은 이 공덕을 널리 일체 중생에게 보급하여, 나와 더불어 일체 중생이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도록 하옵소서.”

이것은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언제나 염불하고 있는 게송인데, 참된 공덕은 어떻게 해야 이루어지는 것일까? 또한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는 시주를 동참하는 권선문에도 한결같이 공덕을 쌓도록 권유하는 말이 있으며, 어느 사찰을 찾아가더라도 절 입구에는 사찰을 건립할 때에 애쓴 사람들의 시주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면 공덕과 복전은 같은 것일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 공덕과 복전의 이야기를 거론할 때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가 『전등록』 제3권 보리달마전에 전하고 있는 보리달마와 양무제의 첫 만남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일단의 대화이다.

梁 나라의 武帝가 달마 대사에게 질문했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고, 탑을 세우고, 경전을 寫經하고, 승려들을 출가시키는 일을 수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

달마 대사가 대답했다.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無功德)” 이 이야기는 『벽암록』 제1칙과 『종용록』 제2칙 등에 채택되어 있는 것처럼,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양 무제는 황제로서 평생 수많은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경전을 사경하고, 승려들을 출가시켜서 불법을 옹호하고 홍포한 불법 천자(佛法天子)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런데 불법을 위해 평생을 받친 양 무제의 엄청난 업적을 보리달마는 한마디로 ‘무공덕’이라고 단언해 버렸다.

보리달마와 양무제와의 만남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은 아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선 불교의 문헌에 등장시킨 것은 하택 신회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에서 북종 공격을 위한 방편으로 응용한 것인데, 이것이 선종의 초조 보리달마전의 대표적인 일면이 되고 있다.

달마계의 선종 입장에서 볼 때 양무제는 달마에게 당하는 한 사람의 광대역할(조연)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인데, 불법을 전하는 달마 대사에게 당하는 사람을 일반인이 아닌, 당시 최고 지위의 인물로서 불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체면이 서질 않기 때문이다.

신회가 달마로 하여금 양 무제와 상면하게 하여 양 무제의 호불 호법을 ‘무공덕’이라고 평가한 의도는 당 나라 왕실의 비호를 받고 있는 신수계의 북종선의 공덕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신회의 뛰어난 각본은 북종선을 공격하는 한편, 달마로부터 비롯되는 선 불교의 올바른 실천 정신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달마와 양무제와의 회견은 「육조단경」에도 사군 위거의 질문으로, 위와 똑같은 대화를 싣고 혜능이 ‘진실로 공덕이 없다.

’라고 단언하면서, “사군이여! 달마 대사의 말을 의심하지 말라.

양 무제는 邪道에 집착하여 정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군이 또 “어째서 공덕이 없다고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혜능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절을 짓고, 보시하고 공양 올리는 것은 복을 닦는 것일 뿐이다.

福田을 가지고 공덕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功德은 法身에 있으며, 福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法性에 공덕이 있는 것이요, 견성이 바로 功이요, 평등함이 곧 德이다.

안으로 불성을 깨닫고, 밖으로 남에게 恭敬을 실행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고, 나라고 하는 我相을 끊지 못한다면, 곧 자기 자신에 무공덕인 것이요, 또한 自性이 허망하면 법신에 무공덕인 것이다.

순간 순간 생각마다 덕을 실행하고 평등하고 솔직한 마음이면 그 덕은 경박하지 않고 항상 공경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공덕은 자기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기에 복과 공덕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양 무제가 올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지, 달마 대사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복전과 공덕이 다른 점을 이렇게 명쾌하게 밝힌 설법은 드물다.

불교를 위하고, 남을 위해서 물건으로나 마음으로 베푼다는 것은 복전이 될 수는 있어도 공덕은 될 수 없다.

공덕은 불법의 참된 도리를 각자의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불성을 깨닫고 깨달음의 지혜로 일체 중생에게 진실된 불법을 회향하는 것을 공덕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조당집』 18권에는 「종지를 깨닫는다는 것은 (달마 대사가) 양 무제에게 말하기를, “성품을 깨닫는 것을 功이라 하고, 묘한 작용을 德이라고 한다.

공이 이루어지고 덕이 일어나는 것은 한 생각(一念)에 있다.

이러한 공덕과 맑은 지혜의 묘한 작용은 세상에서 구할 바가 아니다.”

라고 한 것이다.

」 말하자면 공덕은 일념으로 깨달음의 마음을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유마경』에 “깊은 깨달음의 마음(深心)이 곧 진실된 도량이니, 공덕은 增益하기 때문이다.”

라고 설하고 있으며, 『위산경책』에도 “안으로 깨달음의 마음을 이루는 것을 功이라 하고, 밖으로 편안함을 나투는 것을 德이라고 한다.”

라는 말이 참다운 공덕을 이루는 수행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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