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스님─윤회 끊을 힘 지닌 사람 요지경 세상 두려우랴

윤회 끊을 힘 지닌 사람 요지경 세상 두려우랴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 지선 스님 요즘 더위가 과거에 비해 혹심해 금년 안거는 아주 힘이 들었습니다.

이 더위에 여러분들 이렇게 법문 들으러 오시는걸 보니 신심이 장하십니다.

불교 법문을 많이 듣다보면 중첩되는 부분도 많고 혹 같은 내용이라도 말씀하시는 분에 따라 말이 굉장히 다른 경우가 많죠.

하지만 모든 분들이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는 한 가지는 ‘일심’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으니 ‘ 마음의 노는 모양새를 알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만사를 신에게 의탁하면서 ‘신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믿는 부류이고, 다른 한 부류는 ‘모든 것이 팔자’라고 생각하면서 업보타령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불교, 정법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신을 믿지 않습니다.

또 불교는 운명론, 팔자론이 아닙니다.

불교는 인과응보를 중시하기 때문에 오늘 현재의 이 마음을 어떻게 먹고, 말하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사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했던 언행이 내일의 결과로 나타나고 나쁜 업보로 인해 나쁜 운명, 숙명을 받았더라도 좋은 선업으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운명·팔자론, 불교 아니다 그렇기에 불교가 어렵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쉽지만.

불교의 단점은 너무 어렵기도 하고 또 너무 쉽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 사람에게 불교 책을 몇 권이나 봤냐고 하면 하나도 안 봤다고 합니다.

또 공부를 어느 정도 했다는 사람들은 견성성불하기가 아침에 세수하다 코 만지기만큼 쉽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수십 년을 불교를 믿었으니 도통을 몇 번은 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스스로가 못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못 깨달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를 부처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부처예요.

각성체 그 자체인데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 안할 뿐이에요.

번뇌를 본질로 삼고 살아온 습성 때문이지만, 내가 어떻게 감히 부처이고 보살인가, 나는 그저 업보가 두터운 중생일 뿐이다 하면서.

어찌 생각해보면 부처님도 번뇌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번뇌 많기로 부처님 같이 많은 분이 없고 욕심 많기로 부처님 같이 욕심 많은 분이 없습니다.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 얼마나 욕심이 많으십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번뇌 있고 없고, 욕심 적고 많고의 문제보다 그것을 극복하여 깨달으신 부처님처럼 여러분이 스스로 번뇌를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이 부처라고 믿지 않는 한 영원히 성불할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 부드러운 말 한마디 하고 내가 아끼는 것이라도 보시하는 마음이 모두 부처이고 보살의 마음인데 말입니다.

내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 봉사하고 보시하는 것이 모두 부처님 마음이고 그 자리가 열반과 해탈로 가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작은 행동을 한 가지 두 가지 실천하다보면 불교가 아주 쉬워집니다.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라고 인정하고 나면 부처가 부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해칠 수 있습니까? 침탈하는 행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나는 부처다’라는 말을 하루에 일곱 번 씩만 하세요.

그럼 나쁜 일을 하다가도 내가 부처인데 이럴 수 있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나 하며 그만하게 됩니다.

이 불교가 너무 어렵고, 또 너무 쉬워서 걱정인데 그러다 보니 정법과 멀어져서 운명론자가 되거나 기복 불교로 치우치곤 합니다.

그러면 행복과 지혜와 수명과 복덕을 바깥으로 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복덕과 지혜와 수명을 구하고 생사윤회를 끊어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과 지혜 광명이 내 부처 내 속에 있는데 말입니다.

유불선 모두 ‘심성론’으로 통해 불교 뿐 아니라 동양 종교의 가르침은 딱 두 가지로 통합니다.

유교나 도교나 불교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심성(心性)입니다.

유불선 삼교가 모두 심성론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유교는 ‘존심양성’ 마음을 받들어서 성품을 길러라, 도교는 ‘수심연성’ 마음을 닦아서 성품을 단련시켜라, 불교는 ‘명심견성’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아라입니다.

심성놀음(진공묘유)을 알라는 것입니다.

억천만사가 전부 심성의 문제예요.

본래 착한 심성대로만 살면 그게 부처입니다.

왜 그러냐.

부처님 말씀으로는 진여자성이라, 마음의 본질이 청정한 진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진여자성 자리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붙잡을 수 없고, 얻을 수 없고, 구해서 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안 잡힌다고 해서 없는 것 아니잖아요.

진여자성이라는 것이 그와 같은데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체와 용인 심성입니다.

성(性)의 본질은 텃밭과 같아서 그 곳에 씨앗을 뿌리면 무엇이든 자라날 수 있습니다.

심(心)은 성의 바탕 위에 떠서 아지랑이처럼 이리저리 변하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 수만 수천가지입니다.

이것을 생멸심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무수한 마음 중에도 또 본질을 이루는 마음이 있습니다.

심성이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그 심성자리만 알면 됩니다.

교리 하나도 몰라도 착한 심성대로만 살면 그 속에, 불법으로 말하면 진여자성 속에 엄청난 복덕과 공덕과 윤리도덕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불성 그 자리는 만 가지 공덕과 복덕이고 지혜이며 영원한 광명입니다.

그럼 다른 종교는 마음을 닦아라, 받들어라 했는데 우리 불교는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봐라’고 했습니다.

이리 왔다 저리 갔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이런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라고 했습니다.

성품을 보는 것, 영원히 불생불멸한 생명의 본질 그 자리를 보는 것이 견성성불입니다.

그 자리를 잘 보면 마음이 아무리 아지랑이처럼 요동치고 세상이 요지경 같이 변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명심견성을 하면 선과 악을 구분하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 힘든 세상, 오탁악세를 어떻게 살아야 쉽게 살고, 불자답게 사는가.

달마대사가 네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보원행(報寃行)이라.

남에게서 억울한 소리를 듣거나 본의 아니게 원망을 듣게 됐을 때라도 원망으로 갚지 마라는 말입니다.

내게 오는 모든 일은 사바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므로 그동안 닦은 수행으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원망하는 마음을 쌓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착하게 살고 보시하고 수행하며 살더라도 어려움을 겪는 것은 과거 숙세 인연에 쌓은 업보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업보나 스트레스는 본래 공한 것입니다.

둘째는 수연행(隨緣行)이라.

따를 수(隨) 인연 연(緣), 모든 것을 인연을 따라 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받은 업은 지난날 여러분이 지은 인과 연에 따른 것입니다.

연과 내 업이 어울려서 결과를 만들어내니 그 고락을 순수하게 받으라는 뜻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안 내가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연이 사라지면 다시 무로 돌아가고 또 거기서 연이 인이 되고 인이 또 연을 부르고 해서 인연 과보가 되풀이되는 이치를 알아 좋고 나쁨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깨달은 사람한테는 그것도 공이고 필요 없긴 하지만.

매일 나를 바꾸는게 인과응보 그 다음이 무소구행(無所求行), 댓가를 구하는 바가 없이 선행을 하면서 세상을 살라 입니다.

좋은 일을 하더라도 대가를 받을 것이라 기대 하지 말고 행하라는 말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 탐욕과 집착은 계속 업을 쌓기 때문에 아무리 공덕을 베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공덕 복덕을 베풀더라도 영원히 불생불멸한 근본 그 자리에 앉아서 공함을 알고 베풀어야지, 그 이치를 모르고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만유는 공하여 항상함이 없으니 집착함이 없어야 삼독에서 벗어납니다.

그러고 나면 칭법행(稱法行)이라.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본래의 마음, 성품의 근본자리, 선악시비와 공덕 복덕을 다 떠나 불생불멸, 부증불감, 선악도 끊어지고, 시비도 끊어진 영원한 진여자성의 자리에 앉아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속에서 억천만사가 떠오르고 일어날 때라도 그 자리를 지키고 알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 삼보도 들고 지혜광명도 들고 법계도 모두모두 다 들었습니다.

생사 공덕 시비를 떠난 그 자리를 알면 무엇이 두렵고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잡으려하고 보려하면 또 없습니다.

하지만 있습니다.

그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정(性淨)의 이치를 보고 관함을 삶의 법(法)으로 삼아야 합니다.

참된 성품의 이치를 보고 관찰하는 수행의 자세로 사세요.

그 본성(진여자성) 자리에서 온갖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여 물리치고 법에 충만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상은, 모든 선악 시비는 다 무상한 것입니다.

그것이 잘 안돼서 업이 쌓이면 다시 참회하고 수행하고 그래서 업을 소멸하고 이렇게 일생동안 살다보면 큰 악을 안 짓고 나중엔 작은 악도 짓지 않고 그렇게 살다보면 죽을 때쯤 돼서는 진여자성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연 과보란 내가 어디 가서 무엇이 되어 태어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탁’ 하고 내가 무엇이 되는 결과를 받는 것이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인과응보의 법칙을 잘 알아서 하루하루 열심히 수행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

com 이 법문은 8월 26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행된 ‘초삼일 법회’에서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 지선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지선 스님은 1946년 전남 장성 출생으로 1961년 16세의 나이로 석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사미계를 수지하고 1967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2년 서옹 스님으로부터 ‘학봉’이라는 법호를 받아 법제자가 됐다.

1980년대와 90년대 민주화 운동을 견인하기도 했던 스님은 제주 관음사와 전남 백양사 주지, 종회의원 등 종단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백양사 운문암, 김천 수도암, 상원사, 계룡산 갑사 등 전국의 선원에서 수행 정진하며 20안거를 성만했다.

스님은 2004년 4월부터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로 제방의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