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스님─깨달음은 정련된 순금처럼 맑고 빛나

●깨달음은 정련된 순금처럼 맑고 빛나/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현각스님

보고 싶은 얼굴 두 손으로 포옥 가릴 수 있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시인 정지용은 ‘호수’라는 시에서 보고 싶은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여러 형태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 비유하기도 한다.

좋은 화선지에 여러 가지 채색을 잘 배합하여 익숙한 솜씨로 벽지를 메워 가노라면 훌륭한 그림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가하면 마음은 온갖 욕심에 집착한 원숭이와 같아서 이 대상과 저 경계를 만나게 되면 무참히 평상심을 잃고 가지가지 업을 짓는 원숭이에 비유하기도 하였다.수행자들이여, 이 마음은 광정(光淨)하지만 먼지에 오염되어 있느니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은 이를 여실히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마음을 닦지 않는다고 나는 말하노라.

〈증지부(增支部)〉 1, 10에서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 경구는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최초의 언급이기도 하다.

마음은 선천적인 맑음과 후천적인 번뇌의 작용이다.

이 번뇌는 살아가면서 축적된 버릇이나 습관의 소산이므로 수행에 의해서 얼마든지 제거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수도를 통해 척결해야 될 대상이자 수행의 한 성립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잡아함경〉 ‘주금자경(鑄金者經)’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야장이가 모래와 흙을 모아 통에 넣고 물을 쏟으면 굵은 불순물, 여문 돌들과 단단한 흙덩이들은 물을 따라 흘러간다.

그래도 굵은 모래들이 붙어 있어서 다시 물을 쏟으면 굵은 모래들은 물을 따라 흘러가고 금(金)이 남는다.

그래도 가는 모래와 검은 흙들이 붙어 있어서 다시 물을 쏟으면 가는 모래와 검은 흙들을 물에 흘러 보내어 잡것이 없는 순수한 진금(眞金)만이 남게 된다.

그래도 그 금에 조금 때가 있는 듯 하면 야장이는 그것을 용광로에 넣고 불을 더하고 풀무를 불어 그것을 녹여 더러운 때를 모두 없앤다.

그러나 그 순금은 여전히 가볍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으며 빛을 내지 않고 굽히거나 펴면 곧 끊어진다.

그 야장이나 그의 보조자들이 다시 그것을 용광로에 넣고 불을 더하는 풀무를 불면서 뒤치면서 달구면 그제서야 그 생금은 가볍고 부드러우며 광택이 나고 굽히거나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대로 비녀, 팔찌 등 장식물을 만들 수 있느니라.

이와 같이 수행자의 수도과정도 마찬가지이니라.

한마디로 중생의 마음은 잡됨이 없는 순금 같은 것이어서 본래 빛나고 깨끗하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사 모래나 흙 속에 묻혀 있다하더라도 그 순금은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우리는 다만 순금에 붙는 모래나 흙들을 제련하여 제거하면 되는 것이다.

신앙심이 넘쳐나는 기도의 현장을 목격하는 경우가 많다.

바른 신앙의 대상이 설정되지 못하고 만약에 헛된 것이었다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앞서기도 한다.

신앙의 대상이 헛된 것이었다면 신앙심이 아무리 활활 타고 있다손 치더라도 가치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0’이라는 대상에 100이라는 신앙심을 곱해 본다한들 0이 되고 말 터이니 말이다.

헛된 대상을 아무리 열심히 신앙해 보더라도 허무한 결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을 제련하듯 마음의 삼독심 닦아내면 참나 찾아 진정한 참회 선행돼야 수행효과… 보살행도 필수 인류의 역사, 그 가운데 종교사에서 보이고 있는 허다한 사교(邪敎)의 경우가 그렇다.

개인의 구원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한 집안, 집단, 사회가 몰락으로 치달아 그만 그 시대를 어둡게 한 경우가 허다하였음을 잘 알고 있는 터이다.

이른 봄에 농부는 우선 볍씨를 싹 틔우는 일을 한다.

못자리에 파종을 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이다.

이 볍씨는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의 파종된 볍씨가 싱싱하게 자라서 몇 백석, 몇 천석도 될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산적이고 진취적이며, 이기적이기 보다 이타적인 삶을 살고자 원한다.

이러한 삶은 그렇게 살고자 한다고 다짐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실재로 자기 스스로 실천궁행하는 행위가 선행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천리길을 가고자 하는 나그네는 그저 앉아서 목적지만을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고단하고 어렵다 하더라도 한 발짝을 내어 놓는 작업이 우선할 때만이 목적지는 그 만큼 목전에 놓이게 된다.

갈증을 느끼는 나그네는 물이 그립다.

얼음도 물의 속성을 지녔지만 얼음으로 갈증을 가시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얼음을 햇볕에 녹여 물로 만들어 마시는 것이 갈증을 해소하는데 훨씬 효과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이란 유익하고 편리한 것이지 어렵고 고단한 길만이 아니다.

봄바람은 집착이 없다.

그러나 봄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분명히 노란 꽃도 되고, 붉은 꽃도 되고, 샛노란 푸른 잎도 돋아난다.

이런 자연 앞에서 우리는 아름답다고 발길을 멈추게 된다.

‘내가 꽃을 피워 주었고, 잎을 돋게 하였지’라고 집착할 것이 없는 대자연의 의연함이 위대해 보일 뿐이다.

결실도 그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궁극을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드는 피안의 세계에 두고 있다.

노자는 도의 목표를 무위(無爲)에 두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못하는 일 없이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우주의 한 구성요소이며 완전 해방과 절대의 자유를 이룩하는데 두고 있다.

높은 자도, 낮은 자도,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없는 균분주의(均分主義)를 이상적인 사회로 꿈꾸고 있다.

천도(天道)는 남는 것을 덜고,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는 것이요, 인도(人道)는 모자란 것에서 덜어내 남는 자를 보태주고 있는 것이다.

참회하는 삶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수행의 덕목이 될 것이다.

참회하는 마음 없이 그저 성자 앞에서 바라기만 한다면 구부득고(求不得苦)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참회야 말로 건축할 때 기단을 튼튼히 함으로써 견고하고 멋진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탐.진.치 삼독심은 인간 세상의 대변자라고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깨달음이란 유별나지 않다.

일상생활이 삼독심에서 벗어나는 삶이어야 하고 벗어났다면 팔정도의 실천자로서 보살행이 무심으로 행해져야 한다.

깨달은 사람은 탐.진.치 삼독심으로 부터 자유자재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두 눈이 멀쩡히 뜨고 있는 우리들에게 ‘눈을 뜨라’고 하신 것은 번뇌망상과 온갖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역설하신 것이다.

작은 모래알은 물에 쉬이 가라앉고 만다.

그러나 60~70kg의 무게를 지닌 사람은 물 위에 뜨기도 하고 전진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망아(忘我)의 원리 때문이다.

앞으로 인류의 화두는 줄기세포를 배양하여 복제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a1, a2, a3… 와 같이 동일한 인간이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고 한다.

이들이 마치 공장에서 만드는 공산품과 같이 일정한 규격으로 제조된다손 치더라도 마음 씀씀이가 똑같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후천적인 환경, 습관, 문화, 식생활에 따라 심성이 달라질 것이니까 말이다.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결국은 얼굴 표정에도 나타난다.

정신은 육신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무이당(無二堂)’이라고 한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보리가 또한 둘이 아닌 세계를 체득한 사람들이 사는 집이란 뜻이다.

즉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심경을 체득한 달인의 경지인 것이다.

백조는 매일 목욕하는 것도 아니건만 언제나 희고, 까마귀는 매일 검은 칠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언제나 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