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스님─팔만 사천의 병을 가진 것이 중생

“팔만 사천의 병을 가진 것이 중생”

해안스님

부처란 무엇을 가리킨 말인가.

부처란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란 영혼이 있는 것도 아니요 영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란 아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요 아닌 것 없는 것도 아닙니다.

공한 것이 부처가 아니요 공한 것 아닌 것도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란 사람도 아니요 신도 아니요 범천도 아니요 성현도 아니요 각(覺)도 아니요, 부처란 실로 부처도 아닌 것이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일체 모든 상(相)을 여의어사 본 이름이 부처’라고 하였고, 또 법성게에도 ‘구래(久來)로 등하지 않는 것이 이름이 부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부처가 어떻게 설법을 하였을까하고 의심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는 설법을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한면 곧 그 부처를 비방한 것이요 능히 나의 설한 바 뜻을 알지 못하는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은 석가여래가 사십구 년 설법하신 것은 천하가 공지(共知)하는 바요, 팔만 사천 대장경이 증명하는 바요, 불교 역사가 뚜렷이 입증하고 있거늘 이것이 부처의 설법이 아니면 누구의 설법이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이것은 석가세존의 설법입니다.

석가가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생.노.병.사의 무상을 느끼고 이것을 초탈하기 위해서 육년간 설산에서 수도하신 끝에 마침내 정각을 이루어 부처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처가 되신 석가는 부처의 자리에 주(住)하여 있지 않고 다시 중생의 세계로 발길을 돌이켜 중생의 몸으로 중생과 함께 괴로워하고 중생과 함께 울고 함께 밥을 먹고 중생과 함께 옷을 입고 하였습니다.

부처는 가고 오고 앉고 눕는 것이 아니거늘 석가는 중생과 같이 가고 오고 앉고 눕고 하였습니다.

부처는 입이 없는 것이거늘 석가는 사십구 년이나 장광설로 사자후의 무진(無盡) 법문을 설하였으니 이것은 오직 환(幻)과 같은 대비(大悲)의 지혜로써 괴로워하는 모든 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고뇌 망상의 탈을 쓰고 일대극을 연출하신 석가 세존의 설법이지 부처의 설법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석가 세존 앞에 더욱 뼈저리게 감사하고 머리 숙여 경찬하고 싶고 그 위대한 덕상(德相)을 앙모(仰慕)하는 바이며 그 넓으신 대원의 바다에 들어가 목욕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음에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이란 한마디로 병든 사람을 가리킨 말입니다.

어째서 중생이란 모두 병든 사람이란 말인가.

중생이란 모두 체(滯)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중생은 모두 체한 사람이냐 하면 중생은 보면 보는대로 보는 병에 걸리고 들으면 듣느대로 들리는 병에 걸리고 육진 경계(六塵境界)에 부딪치면 부딪치는대로 모두 병을 이루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산을 보면 산에 걸리고 물을 보면 물에 걸리고 종소리를 들으면 종소리에 걸리고 북소리를 들으면 북소리에 걸려서 통하지 못하고 막히기 때문에 천차 만별의 전도(顚倒)되는 병을 이루어서 하나도 병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큰 것은 커서 병이요, 작은 것은 작아서 병, 긴 것은 길어서 병이요, 짧은 것은 짧아서 병, 유(柔)한 것은 유해서 병이요, 강한 것은 강해서 병, 미련한 놈은 미련해서 병이요, 영리한 놈은 영리해서 병, 낳은 놈은 낳아서 병이요, 죽은 놈은 죽어서 병, 이와 같이 팔만 사천의 병을 가진 것이 중생의 병이라는 말입니다.

이리하여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무량무수의 많은 중생들이 하나도 병 없는 놈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이런 것들을 모두 병이라고 하는가 하면 큰 것은 크기만 하기 때문에 작게 쓸 수가 없고 작은 것은 작기만 하기 때문에 크게 쓸 수가 없고 강한 것은 강하기만 하기 때문에 유하게 쓸 수 없고 유한 것은 유하기만 하기 때문에 강하게 쓸 수 없고, 미련한 놈은 미련해서 답답하고, 영리한 놈은 영리하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고, 있는 놈은 있기 때문에 도둑이 두렵고 없는 놈은 없어서 구차하고, 낳은 놈은 낳기 때문에 죽음의 고가 있고 죽는 놈은 죽기 때문에 또 다시 생의 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병들을 가진 중생이기 때문에 중생이란 말은 병든 사람이란 말입니다.

다음으로 설법이란 무엇인가.

설법이란 한 말로 해서 의사가 약을 쓰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의사가 약을 쓰는 방법이란 눈 아픈 사람에게는 안약을 쓰고 체한 사람에게는 소화제를 주고 머리 아픈 사람에게는 진통제를 주듯이 병에 따라 각각 약이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석가 세존의 설법도 일정하지 않습니다.

큰 놈은 큰 것이 병이기 때문에 작게 만들고 작은 것은 작은 것이 병이기 때문에 크게 만들고, 어두운 놈은 어두운 것이 병이기 때문에 밝게 만들고 굽은 놈은 굽은 것이 병이기 때문에 곧게 만들고 낳은 놈에게는 무상을 일러주고 죽은 놈에게는 불멸을 깨치도록 하는 등 하나도 일정한 설법이 없는 것이 석가 세존의 사십구 년간 설법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정한 법없는 것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가장 잘 사는 법’이라 하였고, 또한 ‘가히 설할 바 정한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불법은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도라고 하는 것은 상.중.하의 숫자에 떨어지는 중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백천 강하(百千江河)가 바다에 들어가면 짜고 싱겁고 맑고 탁하고 깨끗하고 더러운 차별이 없이 오직 바닷물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과 같이 팔만 사천의 무량법문도 정각의 적멸바다에 들어가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하나가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 하나라는 것도 일, 이, 삼, 사의 숫자가 아닌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부처는 무엇이고 중생은 무엇이고 설법이란 무엇인가를 아시리라 믿습니다.

해안스님─마음은 정하여진 바 없다

마음은 정하여진 바 없다

해안스님

세상에 오고 가는 일이 다 인연이 있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만나게 되는 것도 속세(속世 : 前生의 세상)에 인연이 있어

금생에 여러분 앞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일이나 만물이 아무 때나 무질서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날 인(因)과 연(緣)의 상대가 서로 결합하여 나고 변화하는 질서를 말하는

뜻입니다.또 잘 살고 못 사는 현실이 다 속세로부터 연속되는 인과(因果)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 인과를 알고 인과의 주인공인 자기 마음을 알아 그 마음을 잘 쓰는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근본과 현실의 원인을 깨달아 잘 살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마련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불법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부처의 본심을 알려고 하는 것이고, 부처의 본심이 곧 자기의 본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의 본심이 둘이 아닌 하니인 것입니다.

만물에는 상대의 근본이 둘이 아닌 하나의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파도치는 물의 그 모양은 여러 가지로 일어나지만 파도 속에 젖는

물의 성질이 똑같이 있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만물은 모양은 다르지만 그 모양 속에는 하나의 불성 자리가 있는것입니다.

이 불성 자리가 우주의 근본으로서 마음이니 불성이니 여러가지 대명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일체 언어 동작이나 만유(萬有)에는 이 불성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불성은 아주 멀리 크게 다 있을 뿐 아니라, 가깝게도 있기 때문에

또 대소 유무(大小有無)를 초월한 근본 자리이면서 일체 사물에 현현하게 나타나는 묘유(妙有)한 것이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자고 일하는 일체 마음 그대로 불성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 삼대 거사(三大居士)의 한 사람인 중국의 방거사(龐居士)는

[불법이 어렵고 어렵다.마치 아주까리 씨를 거꾸로 백천개를 올리는 것처럼

불법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때 방거사의 부인은 불법이 아주 쉽고도 쉽다고 하면서

[마치 일백초두(一百草頭)에 조사의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일체 만유에 다 불법이 있는데 어려울 것이 무어냐고 했읍니다.

또 방거사의 딸은 [불법이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으며 어렵고 쉬운,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그대로 일체가 불법이다] 했습니다.

한 생각이 나기 이전의 불성 자리는 유무의 상대가 없는 자리이면서

곧 한 생각을 일으켜 일체 상대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有)도 아나고 무(無)도 아닌 불성을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 불성이 용(用)으로 일어나는 것이 곧 불법입니다.

즉 체(體).용(用)을 바로 아는 것이 불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성불하여 성불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것이 아니고

다시 중생의 몸으로 화신(化身)하여 보살행을 한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대소 유무의 모든 상대에 걸려 있는 병자(病者)로 비유하면

보살행은 일체 상대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행입니다.

불법은 한 물건도 취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한 물건도 버리지 않는 것이

불법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49년간 설법하고 한 마디의 설법도 한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본래 청정한 불성 자리 즉 한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본 마음 자리에 입을 열어 말을 한들 무슨 필요가 있는 일이며 도리어 불성 자리를 더럽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말 없는 것도 불법이 아닙니다.

마음, 즉 불성 자리는 본래 정한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나던 생각을 금방 취소할 수도 있고 유무의 상대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설법을 했다고 정할 수도 없는 것이 불법입니다.

즉 아무도 설한 것이 없는 것이 불법이라고 정하는 것도 불법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