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 (8)증일아함경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Ekottaragama-sutra)』은 4아함 중 비교적 후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역에는 두 가지의 번역이 있는데, 담마난제(曇摩難題, Dharmanad?)가 번역한 것과 승가제바(僧伽提婆, Samgha-deva)가 번역한 것으로 이 중에서 승가제바 역본이 주로 전해지고 있고 때로는 역자가 혼돈되기도 한다.

이 경은 석가모니의 교법을 법문의 수에 따라 정리·편찬하여 하나하나의 갈래를 더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증일(增一)이라 한다. 남전 5니가야 가운데 『중지부』에 해당한다. 우리는 흔히 『아함경』을 소승경전이라 하여 너무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미 언급했듯이 불경 가운데 가장 원형적인 경이 『아함경』이다. 그리고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담겨 있는 대승의 사상이 조금씩 싹트고 있는 것이 엿보인다. 대승경전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경전의 서사 공덕을 말한 부분이 있고, 또 세존의 설법은 가지가지이나 보살의 마음을 내어 대승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나오는 구절이 있다.

특히 50권 52품으로 되어 있는 전체의 경문 가운데 18권 『사의단품(四意斷品)』 에는 “여래에게 네 가지 불가사의가 있다. 그것은 소승이 알 바가 아니다.”라는 한 구절이 있다. 이 경우 여러 가지 교훈들은 전부 생활의 지혜를 일깨우는 말들이다. 불교의 기본적인 교설이 인간의 심성을 바르게 가지는 기초 교양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생활의 보편타당한 도덕적 의미를 평범한 상식 속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사의단(四意斷) 법문에서 지극히 쉽게 가르치는 일상의 윤리는 인간 이상의 것도 인간 이하의 것도 아닌 것이다. 사의단(四意斷)이란 팔정도(八正道)와 함께 37도품/조도품1)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 지악수선(止惡修善)의 선근(善根)을 심는 법문이다. 사정근(四正勤), 사정승(四正勝)이라고도 하는데 다음의 내용이다.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방편을 구하여 생기지 않게 하고[未生惡令不生],

이미 생겨난 악은 방편을 구하여 빨리 없애고[已生惡令滅],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방편을 구하여 생기게 하고[未生善令生],

이미 생긴 착한 법은 방편을 구하여 더욱 많아지게 하여[已生善令增長]

이것을 마음에 잊지 않고 항상 닦아 나가라!

또 인간의 심성을 어둡게 만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비록 이것이 범부들의 생활에 보편화된 양상이긴 하지만, 이것은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라 하여 탐(貪)·진(瞋)·치(癡)의 극복을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래 심성은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계발하는 마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의 사람의 성격을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하여 성내는 마음을 없애는 법을 설하는 대목이 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바위에 새긴 글씨와 같은 사람과 모래에 쓴 글씨와 같은 사람 그리고 물에 쓴 글씨와 같은 사람이다. 바위에 새긴 글씨와 같은 사람이란 화를 내고 그 화가 오래 되어도 풀리지 않는 사람이니, 마치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오래도록 비바람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과 같다. 모래에 쓴 글씨와 같은 사람이란 화를 내기는 하지만 그 화가 모래에 쓴 글씨처럼 오래 가지 않는 사람이다. 물에 쓴 글씨와 같은 사람이란 물에 쓴 글씨가 곧 흘러 자취가 없어지는 것처럼 남의 욕설이나 언짢은 말을 들어도 조금도 마음에 그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화평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지내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진심(瞋心, 성내는 마음)을 없애라는 말씀은 일상생활 속의 교양을 인격 속에 갖추어 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법문이다. 옛날 우리나라 금강산에 홍도(弘道) 비구라는 스님이 살고 있었다. 수행을 잘하여 도를 깨칠 무렵이 다 되었을 때 소나무 밑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 소나무 가지에 달렸던 솔방울이 떨어져 얼굴을 때렸다. 몸도 좋지 않았던 홍도 스님은 얼굴이 아파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었다. 이것이 잘못되어 이 스님은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얼마 후 죽게 되었다. 그런데 그후 그 스님 암자의 골짜기 밑에 있던 큰절의 후원 공양간에 이상항 일이 일어났다. 밥을 짓는 공양간의 잿더미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나타나 꼬리에 물을 묻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재에다가 뱀이 꼬리에 물을 묻혀 글을 쓴 것이다. 그 글의 내용이 <홍도 비구 자계시>라 하여 지금도 절집안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싯구 가운데 ‘성을 한 번 내어 뱀의 몸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일기진심수사신(一起瞋心受蛇身)’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데 자기의 수도 실패가 솔방울에 얼굴을 맞아 화를 냈기 때문이라며 지금 큰절에 남아 수행하는 스님들은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질러서 억울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책을 글로 썼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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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에 나아가기 위해 닦는 도행(道行)의 종류를 말한다. 4념처(四念處)·4정근(四正勤·4여의족(四如意足)·5근(五根)·5력(五力)·7각분(七覺分)·8정도분(八正道分)이 해당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념처(四念處: 네가지를 생각하는 것)에는 ①관신부정(觀身不淨: 몸은 깨끗 하지 않다고 보는 것) ②관수시고(觀受是苦: 감각작용은 괴롭다고 보는 것) ③ 관심무상(觀心無常: 마음은 영원하지 않다고 보는 것) ④관법무아(觀法無我: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것)가 해당하는데, 37조도품 가운데 첫번째 실천 수행 방법이다. (2) 사정근(四正勤: 네 가지를 바르게 정진하는 것)은 본문에서 설명된다. (3) 사여의족(四如意足: 네 가지의 뜻대로 만족하는 것)에는 ①욕(欲: 희원, 이렇게 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 ②염(念: 기억, 마음에 분명히 새겨서 잊지 않는 것) ③진(進: 정진, 쉬지 않고 돌진하여 노력하는 것) ④혜(慧: 지혜, 바르게 사유하고 분별하여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가 해당한다. (4) 오근(五根)에는 ①신(信: 믿음) ②진(進: 정진) ③염(念: 기억) ④정 (定: 선정) ⑤혜(慧: 지혜)가 해당한다. (5) 오력(五力)에는 ①신(信: 믿음) ②진(進: 정진) ③ 염(念: 기억) ④ 정 (定: 선정) ⑤ 혜(慧 : 지혜)가 해당한다. 역(力)이란 근(根)이 증강되어 자신감이 넘침에 따라 장애가 생기면 그것을 퇴치할 수 있는 힘이다. 내용도 5根과 일치한다. (6) 칠각지(七覺支)에는 ①염(念: 기억) ②택(擇: 선택) ③ 진(進: 정진) ④ 희(喜: 환희) ⑤ 경안(輕安: 안정) ⑥ 정(定: 선정) ⑦ 사(捨: 희사) 가 해당한다. (7) 팔정도(八正道)에는 ①정견(正見: 바른 견해) ②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③ 정어(正語: 바른 말) ④정업(正業: 바른 행위) ⑤정명(正命: 바른 직업) ⑥ 정정진(正精進: 바른 정진) ⑦정념(正念: 바른 기억) ⑧정정(正定: 바른 선정)이 있다.

주2) <홍도 비구 자계시> – ‘강원도 금강산 돈도암 홍도 비구 설화’

다행히 부처님의 법을 만나고 사람의 몸을 얻어

오랜 세월 수행하여 성불이 가깝더니

송풍이 불어와 병든 사람 괴롭혀서

진심 한번 일으키고 뱀의 몸을 받았네.

천당과 불찰과 그리고 지옥도

오직 사람의 마음이 지은 바로다.

내 일찍 비구 되어 이 암자에 살았는데

지금은 뱀이 되어 그 한이 만 가지라

차라리 내 몸을 부수어 먼지를 만들지라도

다시는 이 마음에 진심을 내지 않으리

원하건대 스님께서 인간세상 돌아가시거든

나의 모습 이야기하여 뒷사람들 경계하소.

생각은 가득한데 입으로는 말을 할 수 없어서

꼬리로서 글을 써서 이 마음 알리노니

스님께서 베껴다가 벽 위에 걸어두고

진심이 날라치면 눈을 들어 한번 보소.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4월 (제29호)

초기경전 (7)중아함경

멸성제(滅聖諦)는 고의 원인인 번뇌가 소멸된 경지 곧 열반을 뜻하는 말이다. 소멸되어 없어졌다는 뜻이다. 보통 열반을 범어의 음대로 니르바나(Nirvana)로 읽는 수가 있는데 이 어원이 가지고 있는 뜻은 ‘불어서 껐다’는 뜻이다. 불이 붙고 있는 상태에서 그 불꽃을 불어서 꺼버렸다는 말로 번뇌 또는 욕망을 불꽃에 비유하여 그것을 꺼버렸다는 것이다. 때로는 적멸(寂滅), 원적(圓寂) 등으로 의역하기도 하는데 고요해진 상태로 번뇌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무한한 고요한 경지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이것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니르바나(Nirvana)는 불교에서 제시하는 이상향(Utopia)이다. 이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없어지고 운명의 굴레도 벗어난다는 것이다.

불교는 중생들을 나고 죽는 생사의 운명에 갇혀 있는 존재, 곧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와 같다고 비유하여 말한다. 대승경전인 『법화경(法華經)』에서도 중생의 생사를 거듭하는 세계,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세계는 편안하지 못한 고통의 세상이라고 한다. 마치 불이 붙는 집 안에 갇혀 타 죽을 신세가 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삼계무안유여화택(三界無安猶如火宅)’이라는 경전의 구절이 이 뜻을 말하고 있다. 때문에 불교의 근본사상은 해탈과 열반을 얻자는 것으로, 스스로의 운명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하느냐고 의문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수도의 길, 성불의 길은 분명히 부처님 세계를 향하여 이 세상의 운명에서 초월하는 것이다. 육체 생활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아버릴 때는 육신이 남(生)과 죽음(死)으로써 인생은 운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도림(道林) 선사와 백낙천(白樂天) 사이에 있었던 일화가 하나 있다. 한때 도림 선사가 깊은 산 속의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아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으면 그 모습이 마치 까치집처럼 보인다 하여 작소(鵲巢) 스님이란 별호를 얻기도 하였다. 이 스님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져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경탄이 자자하였다. 큰도인인 스님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도를 닦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비범하고 신기하다는 것이었다.

마침 당대의 문장가요 대시인이었던 백낙천이 이 소문을 듣고 우정 도림 선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가 산 속의 나무 밑을 찾아갔을 때 듣던 대로 도림 선사는 나뭇가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이 광경을 본 백낙천이 혹시 사람이 떨어져 다칠까 걱정이 되어 위험하다고 외치면서 빨리 내려오기를 권했다. 그러나 도림 선사는 묵묵부답하며 내려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백낙천이 거듭 위험함을 알리며 내려오기를 권했더니, 나뭇가지 위에서 도림 선사가 하는 말이 “위험한 건 내가 아니고 바로 그대일세.”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니 나는 땅 위에 있어 떨어질 염려가 없거니와 흔들리는 가지에 앉아 있는 스님이 위험하지 왜 날더러 위험하다 하시오?”

“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여 위험을 느끼지 않거니와 흔들리는 가지에 마음이 흔들리어 위험을 느끼는 쪽은 그대가 아닌가?” 이 말을 들은 백낙천이 할 말을 잊고 잠시 멍해져 버렸다는 고사가 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가 쉬었다. 혹은 없어졌다’는 뜻이다. 번뇌가 없어지면 이 세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열반을 적멸(寂滅)이라 번역한다. 고요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 도성제(道聖諦)는 멸성제(滅聖諦) 곧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밝혀 놓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고의 원인을 없애고 열반을 얻을 수 있는가. 그 수행 방법에 대하여 설한 것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평범한 윤리적인 방법과 특수한 선정을 닦는 방법이 제시된다. 이것을 팔정도(八正道, Aryastnga-marga)라고 하는데 여덟 가지 바른 길을 닦아 가면 멸성제(滅聖諦)를 이룬다는 것이다.

먼저 정견(正見)을 가지는 일이다. 정견(正見)이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진리를 바로 믿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정법대로 인생과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이 정견을 항상 바르게 생각하여 망각하지 않는 생활을 하면 바른 생활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정념(正念)과 정명(正命)이다. 명(命)이란 생활을 뜻하는 말이다. 바른 생활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지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선을 행하는 것을 두고 말하고 있다. 정업(正業)과 정어(正語)와 정사유(正思惟)가 정명(正命)을 이루게 하는 구체적인 것으로, 몸으로 하는 행위인 죽임[殺生]과 도둑질[偸盜]과 사음(邪淫)의 나쁜 행위를 일체 금하는 것이다. 말을 할 적에 거짓말[妄語], 이간질하는 말[兩語], 비단같이 번지르르하게 아첨을 하거나 남을 꾀는 말[綺語], 상스런 욕설[惡語] 따위를 금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사유(正思惟)는 마음속의 생각에 욕심[貪], 성냄[瞋], 어리석음[癡]을 없애는 것이다. 이것은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에서 나쁜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선정을 닦아 마음을 항상 고요히 집중·통일되게 가지는 것이다. 이 팔정도(八正道)는 불교의 기본 생활규범으로 내면적이고 자율적인 선의지(善意志)의 발로(發露)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악업(惡業)을 멀리하고 선업(善業)을 행해야 수행의 공덕이 성취되는 것이고 이것에 의해서 정각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불교의 수행은 먼저 윤리정신에 입각한 계행(戒行)과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정화시키는 선정(禪定)의 수행과 거기에서 얻어내는 맑은 지혜로 설명된다. 이것을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라 하는데 팔정도에서 이 삼학의 수련을 말하고 있다. 이 삼학은 현대적인 개념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윤리와 신앙과 철학의 3가지 면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거듭 말하자면 불교라 하는 종교가 어떤 종교인가면 수행을 요구하는 종교인데 거기에 윤리와 신앙과 철학이 삼위일체(三位一體)로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3월 (제28호)

초기경전 (6)중아함경

집(集)이란 말은 번뇌를 뜻하는 것으로서 초집생기(招集生起)의 의미이다. 본래 없던 것이 불러 모아 생긴 것으로 갈애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번뇌, 이것 때문에 괴로움의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번뇌는 범어의 ‘Klesa’를 번역한 말로 때로는 ‘혹(惑)’이라고도 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정신 작용의 총칭이다.

이 번뇌도 그 종류가 많다. 우선 근본번뇌라는 것이 있는데 ‘탐(貪:욕심), 진(瞋:성냄), 치(癡:어리석음), 만(慢:교만), 의(疑:의심), 견(見:악견)’이다. ‘탐·진·치·만·의’의 다섯 가지는 성질이 둔하여 끊기 힘든 것이라 하여 다섯 가지 둔한 번뇌 곧 5둔사(五鈍使)라 하고, 견(見)의 악견에는 신견(身見: 무아의 이치를 모르고 육체를 나라고 집착하는 소견), 변견(邊見: 중도를 모르고 어느 한 쪽의 극단에 치우진 소견), 사견(邪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소견), 견취견(見取見: 잘못된 견해에 집착한 소견), 계금취견(戒禁取見: 잘못된 계율을 옳은 것이라 집착하는 소견)이 있는데 이 다섯 가지는 성질이 예리한 번뇌라 하여 오리사(五利使)라고도 한다. 사(使)는 ‘사역한다, 부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로 역시 번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열 가지 번뇌를 근본번뇌라고 하고 이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수많은 수번뇌(隨煩惱)가 있다고 한다. 또 흔히 말하는 백팔번뇌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번뇌의 수효를 108가지로 말하는 것이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이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상대할 때, 즉 다시 말하여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를 맡고, 혀가 맛을 보고, 몸이 촉각을 통하여 느끼고, 의식 속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기억할 때 여섯 가지의 감정인 좋고, 싫고,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중간과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중간의 여섯 가지를 각각 일으켜 6×6으로 36가지의 번뇌가 되고 이것이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적인 차별에 따라 다르게 일어나므로 서른여섯 가지를 3배하면 108가지의 번뇌가 된다 하여 ‘백팔번뇌’라 하는 것이다. 어떻든 번뇌가 원인이 되어 괴로움의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의 설명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과 그 주변의 모든 현실을 괴로움으로 해석하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그리고 이 괴로움의 결과는 집(集)이다. 다시 말해 번뇌 때문이라고 하였다. 원인에서 일어난 결과는 원인이 소멸될 때 결과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사성제에 있어서 멸성제(滅聖諦)의 논의는 바로 이것이다. 고의 결과와 고의 원인을 알았을 때 고(苦)의 원인을 제거하여 괴롭지 않는 상태가 되자는 것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2월 (제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