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불교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20세기는 실로 많은 변화를 경험한 시대임에는 틀림없다고 합니다. 먼저 인구만 보아도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16억이었던 세계 인구가 한 세기 동안에 4배에 가까운 60억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런 인구 증가율은 다른 어느 세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라고 합니다. 또한 금세기의 과학문명의 눈부신 발전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인류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안겨준 것만은 사실입니다. 과학 기술은 통신 매체와 운송 수단을 발달시켜 지구를 하나의 촌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금세기를 인류의 역사상 가장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현대인은 산업화 덕분에 과거보다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며, 나아가 더욱 더 풍요로운 물질 문명의 향유를 위해 더욱 산업 발전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인이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정치, 과학, 학문, 예술 및 문화 등 모든 부문의 가치를 물질적 가치로 환산해서 가늠하려고 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가치를 그가 얼마나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느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경제적 가치의 생산 부품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보다는 물질을 앞세우는 물질 만능주의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은 여지없이 무시됩니다. 결국 물질만능주의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오로지 자신의 물질적 풍요에만 전념하는 이기적인 사고 방식은 환경을 무차별하게 파괴시키게 되었습니다. 지구는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공간입니다. 그런데도 현대인의 이기적인 인간 중심주의는 생명이 존속해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리인 자연을 파괴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21세기에 들어선 인류는 커다란 전환기에 처해 있음이 분명합니다.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이 인류를 이처럼 절박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면,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인류를 암울한 미래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일대 전환이 요구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환경, 생명, 생태계, 자연에 대한 관심과 위기의식은 세계관과 인간관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새로운 종교문화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종교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문제는 바로 생명의 문제이며 환경의 문제입니다. 이 환경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의미를 강화시켜 종교 문화화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종교문화는 어떤 가치나 윤리를 제시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환경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가 생명이 있는 유기체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불이(不二)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연기의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음을 자각하고 그 존재들을 향한 사랑이 자비입니다. 따라서 생명체에 대한 불살생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무생명에도 불성이 있으니 산천초목이라도 부처님을 대하듯이 공경하고 보호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최근에 우리사회에서는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태아의 성감별과 임신중절이나 안락사와 장기매매와 같은 문제들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또한 유전공학의 발달로 동물복제에 이어 인간복제까지 현실화되고 있는 바, 생명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죽이지 말고 아끼며 사랑하라”는 불살생의 계를 첫 번째 실천 덕목으로 세우신 것은 생명체를 사랑하고 보살피라는 불살생의 계율이야말로 인간이 실천해야 할 최고의 윤리라는 뜻입니다. 또한 불교의 연기법에서는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바라봅니다. 나를 둘러 싼 모든 존재를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중생의 개념은 유정(有情) 즉 생명체 뿐만 아니라 생명현상이 없는 무정(無情) 즉 무생명체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란 말은 부처님으로 성불할 수 있는 범위가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으로, 다시 생명체에서 모든 무생명체로 확대 되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전존재를 평등하게 보는 불교의 생태관의 일면입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모든 중생이 하나이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범망경』에는 “모든 흙과 물은 모두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모두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세계와 내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物我同根)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불교의 생태윤리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식물뿐만 아니라 돌, 물, 흙에게도 미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비의 생태윤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야기된 지구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생명체들이 공존 공생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져야 할 종교적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문제가 근원적으로 모든 생명체의 존재위기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제는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 환경윤리가 생태 중심적 종교윤리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종교적 당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안이 되는 종교 윤리는 바로 불교의 동체대비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의 위기는 생명의 위기이며, 생명의 위기는 곧 불성을 가진 모든 중생의 위기입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은 바로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생명중심의 사고로의 전환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추구하는 실천적 인간형으로 제시된 인물이 바로 보살입니다. 보살은 세계의 모든 현상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달은 존재입니다. 모든 사물이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즉 생물과 무생물에까지 사랑을 보냅니다. 이와 같은 지혜의 실천에서 오는 끝없는 사랑이 자비입니다. 자비는 불교의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기본윤리이고 더 나아가서 모든 존재 사이에 기본이 되는 생태윤리입니다. 따라서 보살은 현대사회가 요청하는 생태적 가치관과 생태적 인간관을 제시합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성의 상실과 가치관의 전도, 개인주의의 피폐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는 인간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인간성의 회복은, 불교의 연기법에 따라 모든 삼라만상이 자신과 유기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자각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온 세계를 빈곤과 무지와 괴로움이 없는 이상 세계, 즉 생태적으로 온전한 불국토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보살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환경보살의 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구호에 그치던 환경운동이 아니라 불사적(佛事的) 차원에서 모두 환경보살의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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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어떻게 움직이고 형성되는가 – 연기법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고 움직이는가? – 연기법 이미 앞에서 모든 존재는,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無常), 실체가 없고(無我) 그리고 고(苦)라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비록 실체가 없고 변하는 것이라 해도 무질서하게 제 마음대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 변화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즉 모든 사물은 현실적으로는 엄연하게 법칙에 따라 각각의 성질을 나타내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원칙이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세계가 법칙이 없이 생성변화 한다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일대 혼란이 올 것입니다. 물이 흐르고 싶을 땐 흐르다가 어떤 때는 안 흐르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안 열리고 배가 열리다가는 별안간 감이 열리고, 사계절이 뒤바뀌어 봄이 오다가 겨울이 되고 다시 가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과법(因果法) 부처님께서는 이 법칙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즉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는 것이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법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기에 깨달을 무엇이 더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인과의 관계가 생각보다는 훨씬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어떤 원인은 결과로 즉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원인은 수 십년 혹은 수 백년이 지난 후에야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의 진행이 기계의 작동처럼 시간의 선후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원인이 결과 속으로 다시 투입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는 복잡하게 여러 가지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과의 법칙이 복잡하다고 해도 자연의 변화에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에는 의지(意志)가 들어있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과는 다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따라서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러한 의지가 담긴 행위를 인(因)이라 부르지 않고 업(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업에 따라 받는 결과를 보(報)라고 합니다. 인간이 선업을 짓게 되면 선보를 받고, 악업을 짓게 되면 악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의지를 갖고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과보(果報)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만큼 자신이 받는 것이지,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이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면, 개인이나 사회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법을 가르쳐서 그 법을 우리가 깨달아 바르게 살게 하신 분입니다. 연기법(緣起法) 다음으로 인과의 법칙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연화합(因緣和合)의 법칙’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 치즈가 있다고 합시다. 우유가 발효되어 치즈로 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우유를 냉장고에 보관하면 우유는 그대로 우유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유가 유산균과 만나 서로 어울려서 발효가 되면 치즈가 생겨납니다. 이때에 우유를 인(因)이라 하고 유산균을 연(緣)이라고 합니다. 우유와 같은 일차적인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유산균과 같은 이차적인 원인을 연(緣)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두 원인이 결합해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인연화합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점을 알게 됩니다. 즉 우유가 유산균과 같은 발효조건을 만나지 않았다면 치즈는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이 치즈는 치즈과자라든가 치즈피자, 치즈햄버거를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처럼 치즈는 우유와 유산균의 화합에서 나온 결과이지만 다시 치즈는 치즈햄버거의 원인이 됩니다. 치즈로 예를 들어보았으나, 사실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서로서로 밀접하게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이처럼 서로 관계를 맺고 의지하면서 끊임없이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물의 관계를 ‘상의상관(相依相關)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 끝임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인과의 법칙, 인연화합의 법칙, 상의상관의 법칙을 통틀어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생겨나려면 이것과 저것이 서로 어울려야 생겨나고, 또한 어떤 것이 사라지는 것도 결국 이것과 저것이 어울려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연기의 이치를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으며,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겨나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홀로 독립된 영원한 것은 없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물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생겨나고, 잠시 머물다가는 변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요. 어떤 물질이나 현상도 적절한 환경에서는 나타났다가 다시 그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서 물질이나 현상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깨닫는 것은 바로 이 연기의 법칙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탐ㆍ진ㆍ치의 삼독이 무명의 뿌리라고 하는데 이 중에서 치(痴), 즉 어리석음은 바로 이 연기법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곧 우주의 모든 현상이 나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한 톨의 쌀알이 생겨나는 것을 보십시오. 한 톨의 쌀알 속에는 농군들의 노력의 땀이 서려있는가 하면, 여름날의 햇빛과 바람이 담겨있고 천둥과 먹구름과 빗방울이 들어있습니다. 온 우주가 힘을 기울여야 쌀 한 톨이 여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가 들어 있는 쌀을 먹고 살아갑니다. 나는 바로 온 우주와 둘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나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이웃에 사랑을 보내고, 모든 사물에 사랑을 보냅니다. 이 끝없는 사랑이 자비입니다. 자비는 불교의 인간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윤리입니다. 불교의 목표인 인격의 완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나와 이웃이 마치 손과 발이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동일체라는 것을 깨닫고 무한한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가르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세계관
불교의 세계관 불교에서는 창조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조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창조신이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그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는지 하는 물음에 매달려서 밤새도록 입씨름을 한다고 하여도 그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상상과 추측을 바탕으로 출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보고, 듣고, 먹고, 느끼는 현실세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대한 문제부터 꼼꼼하게 따져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음들을 해결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광활한 우주가 끝이 있는지 없는지, 이런 우주를 누가 만들었는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바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으로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내가 산다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나는 무엇인가와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산다는 것은 쉼 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펴봅시다. 우리가 눈으로 무얼 보고 있다는 것은, 바로 눈을 통해서 내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푸른 하늘의 구름도, 바다에 펼쳐지는 수평선도 모두 눈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알게 됩니다. 광활한 우주의 수많은 별들도 눈을 통해서 만나고, 아주 작은 생물들의 움직임도 눈으로 알게 됩니다. 눈으로 만나서 알게 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런 만남은 눈이 아닌 귀를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소리들과 만나게 되고 그 소리를 통해서 갖가지 다양한 소리들의 세계를 알게됩니다. 우리는 귀로 듣는 소리의 세계와 눈으로 보는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다시금 우리는 코를 통해서 여러 가지의 냄새를 맡게 되고 그 냄새들이 서로 다른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입으로 들어와서 우리와 만나는 다양한 음식들을 혀로써 그 맛을 보고, 그것이 짠지 신지 매운지 하면서 음식의 맛을 알게 됩니다. 이것 또한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을 통해서 덥다거나 춥다거나 아니면 부드럽다거나 딱딱하다거나 하는 촉감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렇게 끊임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며, 그 만남을 통해서 무언가를 자꾸 알아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 만나서 만들어진 경험세계 이외에도 우리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 의지는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라는 특질을 나타냅니다. 이와 더불어 자연은 객체적인 존재로서의 특징인 법(法)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처럼 눈, 귀, 코, 혀, 몸을 우리가 우리의 의지(意志)를 통하여 각각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함께 생각을 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엇일까요? 과연 태초에 창조신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고 믿어야 할까요? 잘 알 수 없는 것이니 믿어야 한다는 태도는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세계는 여기 있는 나와 그리고 나와 만나는 모든 것들을 모두 합한 것을 세계, 즉 일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 즉 일체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 즉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성질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대체로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첫째,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변한다(諸行無常)”는 것입니다. 거대한 우주에서 작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상(無常)이란 말을 ‘덧없다’거나 ‘허무하다’라는 뜻으로 알고, 마치 불교의 가르침이 허무주의인양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제행무상은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이미 생성된 것이 파괴된다는 뜻이 있는가 하면, 아직 생성되지 않은 것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한 예로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만 무상이 아니라 말기 암환자가 병을 극복하고 건강해진 것도 무상입니다. 만일 무상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고,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물이 변하고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그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닐 뿐더러, 또한 죄악의 대가도 아닌 것입니다. 또한 무상이란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닌 만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법(法)인 것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은 어떤 일에 몰두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망아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무아(無我)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법은 무아’라고 할 때 이것이 인간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게도 다 적용됨을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의 원인과 근거가 된다는 연기의 가르침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이 연기적 관계를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무상의 진리에서 본다면 어떤 존재도 불변의 실체나 자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 존재를 유지시키는 원인과 조건도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딸기잼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저장을 잘못하면 부패하고 썩어버리게 되어 쓰레기로 변하고 맙니다. 또한 딸기잼은 딸기와 설탕과 향료와 굳게 만드는 물질 등 여러 가지가 함께 모여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를 딸기잼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성, 유지되며 그러한 모든 것은 고정 불변하는 성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무아라고 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셋째,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법으로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해서 마치 불교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로 오해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괴로움, 고(苦)란 말은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들의 성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일체(一切)가 모두 고(苦)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불편한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힘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한 마디로 고(苦)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즉 일체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이라는 진리 속에 서 있는 존재가 가진 ‘불완전성’과 그 불완전한 개체를 지속시키려고 ‘힘들이는’ 모든 작용까지도 함축한 것이 바로 고(苦)인 것입니다. 꽃이 피는 것도, 어린아이가 배고파 우는 것도,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고(苦)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따라서 ‘일체의 모든 것이 고(苦)이다’는 결코 염세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혀낸 법(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