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불스님─진리 구하지 않는 광신이 곧 우상숭배

진리 구하지 않는 광신이 곧 우상숭배

-수불스님-

신심은 절에만 다닌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불법을 깨닫고 부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도 부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부처님 가까이 갈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신심이라는 것은 절에 일찍 와서 오래 믿었다고 해서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의 눈이 넓고 깊어져서 지혜로운 눈으로 거듭났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거듭났을 때 신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신심을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깊은 신심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 부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배우고 알아야 하며 특히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좀 더 정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종교를 왜 믿어야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불자님들이 종교, 특히 불교를 믿고 있지만 불교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고 믿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부처님 가르침은 이런 것이라고 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지금까지 많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많이 배우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왜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지금 이 시대 내가 부처님께 보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떤 수행법이 가장 좋은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알고 수행한다면 그 결과는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를 믿으면 이익이 발생해야 합니다.

이익이 없는 종교를 믿는다면 종교를 위한 종교생활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광신자, 맹신자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정신적 우상이나 물질적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우상이 아닌 본질을 추구하는, 그런 깨달음의 눈을 얻기 위해 진정한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추구하고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종교를 믿지 않고서 진리를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교를 선택해야 진리에 가장 빠르게 정확하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먼저 알고 믿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믿다보니 아는 경우는 있어도 이런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정신적 위치가 지금 어디에 있고 내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나와 내 주변이 행복해지는지를 생각하고 믿어야지 그렇지 않는다면 시간만 낭비하고 어리석어질 뿐입니다.

종교에도 상식과 지식은 통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상식이 아닌 지혜라고 지칭되는 또 다른 차원을 필요로합니다.

그것은 배워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깨달아서 증득해야합니다.

어떤 체험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기준과 종교의 가치기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지혜의 눈을 떴을 때 그 사이의 차이는 좁혀집니다.

상식적으로는 밝음이 어둠을 비추어 어둠을 깨뜨리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과학적인, 현상학적인 차원에서의 지혜입니다.

실질적인 지혜라는 것은 밝고 어둠을 관계하지 않고 동시에 비춰서 함께 밝히는 힘을 말합니다.

밝음과 어둠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종교적 인식과 사회적 인식을 동시에 눈뜰 때 힘이 더 커집니다.

비유하자면 일반적으로는 깨끗한 것만을 청정이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불구부정 즉,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을 청정이라 합니다.

더러움과 깨끗함을 모두 포용하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는 순수함이 청정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상대적인 깨끗함만을 청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윤리와 종교적인 윤리 개념을 혼돈하는 데에서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반윤리 개념에서 선은 진리이며 악은 진리가 아닙니다.

정의는 진리이고 불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깨끗한 것은 진리이고 더러운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쪼개 놓습니다.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종교상식에서는 그러한 관점에 모순이 있다고 봅니다.

종교에서는 선도 진리고 악도 진리입니다.

전체인 진리 속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또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진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불교의 진리입니다.

진리의 본질은 선악을 포용하되 선악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 물들지 않는 순수함이 영원한 것이고 청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어떤 식으로 믿고 이해해야 올바로 된 가치관을 갖고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는지에 대해 알고 믿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종교 인식 없이 유사종교를 말한다든지 허망한데 빠지게 되면 그것은 또 다른 고의 원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인식할 때에 우리는 새로운 눈을 뜰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동안 이 귀한 보물을 처박아 놨습니다.

사찰을 20년 30년 다니면서도 불교의 참된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조선시대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다보니 불교를 억압했고 일제시대의 억압과 해방 이후의 극심한 이념 갈등이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종교다운 종교를 믿지도 실천하지도 못한 채 기복신앙의 습관이 불교 속에 남게 됐습니다.

불교를 믿는 형식은 취했지만 불교를 아는 사람도, 배우려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역사 속에서도 오늘날 불교가 이만큼이나마 자리를 잡은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우리 정신의 뿌리 속에 불교가 녹아있고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번역하고 가르치는 등 불교를 알리는데 큰 뜻을 두고 알고 모르게 노력해 온 결과입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고 불교는 점점 더 좋아질 것입니다.

부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면 종단이 어떤 처지에 처하든, 스님들의 모습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등명 자등명,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종단의 전통 안에는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고 배울 수 있는 근거가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삼귀의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고 계를 받아 지니며 종단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배웁니다.

더 나아가 육조단경과 조사어록을 배우고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자리에 나아가 함께 공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사홍서원합니다.

이러한 체계가 종단의 전통 안에 확립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도도 하고 법회도 동참하고 교리적인 가르침도 배우고 사회봉사도 하면서 진정한 부처님 가르침을 안팎으로 느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불자로 거듭납니다.

이것이 곧 수행자의 삶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수행할 수 있는 삶으로 전환돼 가는 것입니다.

수행하고 싶다는 마음만 급해서 덤비다 보면 순식간에 끓었다가 확 식어버리는 냄비가 되고 맙니다.

은근히 끓고 끓어 넘치고 난 후에는 끓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푹 익으면 움직임이 적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분주합니다.

자기소리를 막 해대고 자기주장을 앞세우고 그러다 보니 분란이 옵니다.

한걸음 물러나면서도 동참하며 변화를 수용할 때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안착하게 되고 우리는 새로워집니다.

질이 높아진다면 신도가 줄어들어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양도 늘어나겠지요.

그런데 양만 늘이기 위해 애쓴다면 질은 낮아집니다.

종교는 양이 아니고 질입니다.

각자 각자가 상을 끊어야 합니다.

그런 상을 끊는 공부는 수행을 통해 완성됩니다.

교리나 교학을 통해 믿음을 굳건히 하고 수행을 통해 그 믿음을 완성시키며 안팎을 하나로 원만하게 이끌어내는 그런 참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불교의 희망은 커집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불교에는 내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갖고 있더라도 올바로 행하고 전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 잘 전파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더 큰 믿음을 내기 위해서는 배워야 합니다.

그 다음 스스로 수행해야합니다.

많은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배움을 성취할 때 믿음은 더욱 커지고 그것이 공덕이 되고 원력이 됩니다.

이런 복과 지혜를 아울러 닦는 훌륭한 불자님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법문을 마칩니다.

수불스님─두 수레바퀴가 균형을 이루듯이 살자

두 수레바퀴가 균형을 이루듯이 살자

-수불스님-

‘불교의 본분은 수행’ 주제로

종교의 참된 가치와 길 제시

우리는 기복에 빠져 진리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정신과 물질이 다르면 바퀴가 다른 수레가

방향을 잃고 제자리 맴돌며 헤매는 것 같다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다른 가치 조화 이루는 것이 종교의 참 역할

다른 가치 조화 이루는 것이 종교의 참 역할

-수불스님-

지혜의 눈 열린 사람에겐 모든 가치 진리 안에 있어

내 안의 생각 조율하면 남 이해 못할 이유 없다

종교가 무엇인지, 왜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알면 시간 낭비를

덜 할 수 있습니다.

헤매지 않고 정성을 더 쏟을 수 있으니 이익도 더 큽니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종교를 위해 종교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종교를 통해 종교가 말하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현실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를 믿으면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이익이 생겨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종교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류가 찾아낸 정신적 가치 가운데 최고의 가치라 할 수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라는 개념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의 개념을

모르고 있습니다.

불교가 등장한지 2600여년 됐습니다.

기독교는 2000여년 됐습니다.

그 전에는 힌두교 정도의 종교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어지고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연숭배, 주술, 신화 같은 것을 종교로 여기고 신성시했지만 종교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종교에는 과학보다 앞서가는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종교는 정확해야 합니다.

정확한 근거를 갖지 않고 이야기하면 종교가 아닙니다.

기만입니다.

종교에는 더 이상의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풀어헤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알려야 합니다.

눈을 뜨게 해줘야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의 기능을 그런 것이라고 생각안합니다.

눈뜰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 안하고 늘 자기 눈높이에서만 종교를 생각하고 믿고 의지합니다.

‘우리 아들딸 합격하게 해주세요, 아픈 사람 빨리 낳게 해 주세요’하는 식입니다.

소박하고,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부탁을 합니다.

그게 우선 급하니까요.

그러나 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종교처럼 착각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눈을 갖고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초등학교만 평생 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높이를 달리할 수 있는 가치를 생각하고 배우고 이해하고 실천해서 증명할 수 있는 자세로 거듭나야 하는데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종교를 위해 종교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광신, 맹신입니다.

정신적 우상이나 물질적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타파하고 본질을 추구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은 가치, 그 가르침이 종교가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상에는 거짓이나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 공개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비밀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깨달은 자의 눈, 지혜를 가진 사람의 눈에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비밀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가르침에 눈떠야 하는가.

과학에서는 지구가 45억년 전에 생겨났고 인간은 350만년전 쯤에 등장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후로 오랜 시간이 흐르며 인류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 등등을 거치고 씨족, 부족, 도시국가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환경의 동물에서 사회적, 정치적 동물로 변모했으며 마침내 종교가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에는 차원 높은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눈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어리석음을 지혜로 전환할 수 있는, 그런 가치에 눈뜬 성자가 세상에 출연한 것입니다.

그 성자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말합니다.

무명과 탐진치 삼독의 지옥 같은 삶에서 좀 더 다른 차원의 행복을 느끼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도록 가르치는 지혜로운 가치관이 세상에 등장한 것입니다.

종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법질서에서는 선은 진리고 악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정의는 진리고 불의는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에 대한 구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제가 돼야 사회가 통제되고 변화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선은 진리고 악은 진리가 아니라고 규정해야만 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방어 할 수 있습니다.

질서가 유지 됩니다.

그래야 힘없는 사람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윤리에서는 선도 진리고 악도 진리라는 개념을 발견했습니다.

진리의 본질은 선악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진리 속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진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본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만 선악을 포용한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물들지 않는 순수함이 영원한 것이다.

이것을 찾아내고 규명했습니다.

논리로만 찾아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것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며 정신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의 질서가 바뀌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영향입니다.

다만 종교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과학은 눈에 띄게 발전하다 보니 오늘날의 발전이 과학의 산물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과학을 앞서가지 못하는 종교는 도태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반적인 사고에서는 깨끗한 것만을 청정(淸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물들지 않는 것을 청정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이 오면 물듭니다.

그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 인연 따라 깨끗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가 물들여지니 더렵혀지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청정은 어떤 물을 들이려 해도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구부정(不垢不淨)입니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종교에서는 이것을 청정이라고 말합니다.

일반과는 용어의 뜻이 다르니 종교가 어려운 것입니다.

같은 청정을 이렇게 다르게 소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일반, 양쪽을 다 소화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오해하고 살고 있는 것 가운데 또 하나가 고정관념입니다.

흔히 ‘눈이 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눈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본다’는 것은 고정관념, 정체된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있다’는 것이 바른 말입니다.

죽은 사람이 눈을 뜨고 죽었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하여금 보게끔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생명, 마음, 혼,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름이 다만 그럴 뿐이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깨닫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의 가치는 내가 누구인지, 생명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이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자각할 수 있게끔 길을 열어놓은 데 있습니다.

눈이 본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눈이 보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양쪽을 다 이해해서 조화롭게 소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어떤 말을 어떻게 하든, 실타래가 엉켜있어도 풀어낼 수 있습니다.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이 시점에서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눈을 뜨고 깨달았을 때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됩니다.

그것이 힘입니다.

이런 열쇠를 통해 열고 들어갔을 때 세계가 달라집니다.

내 가치관이 폭넓어집니다.

그런 소통을 통해서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야 합니다.

너와 나의 화합 뿐 아니라 내 안의 엉클어진 정신을 소통시키고 화합하는 것입니다.

안팎을 조율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나부터 안정시키면 남을 이해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럼 그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이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고 그걸 알 수 있게끔 길을 열어놓은 것이 종교입니다.

중심이냐, 중심이 아니냐, 이런 것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지니는 방법, 그런 가치를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길은 어디서 비롯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되는 종교, 불교는 이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수행은 어둠을 밝음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눈이 본다와 눈이 보지 않는다의 차이점을 모두 소화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이치로는 배울 수 있지만 실제화는 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우글거리는 어리석음을 뽑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바꾸는 것, 혁명할 수 있는 능력을 수행이 제공합니다.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을 참고해서 좀 더 자유롭게,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으신 분들은 오늘부터 열심히 수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