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처럼 때묻지 않는 마음

대구에 사는 부용스님이 연꽃 사진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웠다. 평소 틈틈이 여가를 내어 연꽃을 찾아 사진 찍기를 취미로 삼아 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새 사진작가의 실력을 발휘해 전시회를 연다고 하니 연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연꽃은 우리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는 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의 각성(覺性)을 흔히 연꽃에 비유해 설명한 말들이 경전 속에 자주 나온다. 저 유명한 『법화경』의 본래 이름이 『묘법연화경』인 것처럼 불법의 심오한 진리를 연꽃에 비유해 묘사하고 있다.

연꽃은 그 생태가 다른 꽃들과는 사뭇 다르다. 물에서 피는 꽃으로 자라는 환경이 깨끗하고 맑은 물이 아닌 진흙 뻘물의 연못이다. 말하자면 흐리고 탁한 오염된 환경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꽃이 물에 젖지 않는다. 연잎에도 떨어진 물이 퍼지지 않고 구슬처럼 물방울이 맺혀 잎을 적시지 않는다. 이는 연꽃 자체는 환경의 오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뜻을 숙어로 만들어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한다.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언제나 깨끗하다는 뜻이다. 이는 세속적 환경에 처해 있는 중생들이 가지가지 업을 지으며 사는 처지이지만, 자신의 본래 마음은 누구나 청정한 것으로 어디에도 오염되지 않는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 연꽃이 가지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갖춰지는 점이다. 이를 인과동시(因果同時)라 한다. 어떤 원인이 만들어질 때 이 원인이 가져 올 결과가 함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일이든 시간을 따르는 진행의 과정이 있고 다음에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시간을 뛰어넘고 보면 선후가 없이 원인이 언제나 결과를 가지고 있으며 결과가 항상 원인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시작과 끝이 함께 같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중생이 나고 죽는 생사를 두고도 생사가 동시라는 말을 쓴다. 신라시대 의상스님이 지은 『법성게』에도 ‘초발심시변정각’이라는 말과 ‘생사열반상공화’라는 말이 있다. 처음 발심할 때가 정각을 이루는 순간이라는 말이며, 생사와 열반이 항상 같이 어우러져 있다는 말이다. 나무에 열린 열매가 씨앗이 되면서 동시에 다시 자라서 열릴 나무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파악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릇된 행위를 하면서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랄 수는 없다. 연꽃 같은 마음으로 청정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의 본래 각성인 연꽃 같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도 연꽃 같은 마음은 똑같다. 선악이 나눠지지 않고 귀천이 구분되지 않는 이 마음이 본래 자기의 참 마음이다. 일체 차별을 떠난 절대적 지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마음에서 세상은 하나가 되고 화합과 통일이 이루어진다.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마음을 깨끗이 하여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살라(如蓮花不着水 心淸淨超於彼)”고 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사찰마다 연등을 만들어 봉축을 준비하고 있다. 연등은 연꽃의 청정과 깨달음의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지혜를 닦고 자비를 실천하자는 것이다. 또한 연화대에 앉은 부처님들이 본래 연꽃 속에서 탄생하시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5월 제54호

만법귀일 일귀하처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물었습니다 (僧問趙州).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萬法歸一),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一歸何處)”

조주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州云). “내가 청주에 있을 때(我在靑州), 베 적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作一領布杉), 그 무게가 일곱 근 이더라(重七斤)”

여기에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은 승조의 저서『보장론(寶藏論)』에서 처음으로 쓰인 말로, 그 내용은 만법(萬法)은 온갖 존재의 뜻으로 차별이요, 일(一)은 그런 차별이 감춰진 평등의 세계를 이르는 것으로 우주의 모든 것은 궁극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하나로 귀착된다는 뜻입니다. 또한『유마경』에서도 만법즉진여(萬法卽眞如)라 하여 비슷한 용례가 있습니다.

승의 물음에 조주스님께서는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적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 이더라”라고 말하셨습니다. 이는 승의 물음이 알음알이의 개념적인 물음에 관계없는 조주스님의 선의 절대 경지를 무심한 말로 표출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즉 차별과 평등을 여읜 절대 중도를 일상사에서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인해스님 (동화사강사) 글. 월간반야 2005년 2월 제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