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양스님─ 정토를 얻으려면 마음을 깨끗히 하세요

정토를 얻으려면 마음을 깨끗히 하세요***

-혜양스님-

우리는 ‘도(道)를 닦는다’ 또 ‘도를 얻겠다’고 흔히 말합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 것인가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도를 얻겠다고 출가한 스님들은 물론이고 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불자라면 한번쯤 이 문제로 고민해 보았을 것입니다.

내가 한번 묻겠습니다.

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나요.

만약 그 진리를 알고자 하면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마음을 모으고 그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마음만 알면 되는 것입니다.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 둘을 세든지, 염불을 외든지, 일념으로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을 해서라도 마음을 한데 모아야 합니다.

옛날 스님들은 스스로 도를 통하지 못하면 어느 누가 와서 참선법을 물어도 ‘나는 모른다’고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았지요.

꼭 도를 통한 사람만이 그 도리를 가르쳐 주는 법입니다.

도통한 스님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저 사람이 지난 생애 참선하던 습관이 있어서 이 생에도 저렇게 참선을 하려는구나.

그러면 저 사람이 전생에 공부하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화두를 주시지요.

도를 통했으니까 모든 이치를 확연히 알고 계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옳다.

이 화두였구나’하고 화두를 찾아 주시는 셈이지요.

그러니 이 화두를 받은 사람은 지난생부터 자기가 공부하던 화두를 아니까 용맹정진할 수가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출가승이 정진을 잘하려면 반드시 깨우치고 말겠다는 금강과 같은 발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잘 이끌어 줄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화두란 전생에 공부하던 것을 그대로 이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제대로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화두가 제대로 안 맞으면 시간만 낭비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근기에 맞는 화두를 만나기 어려운 사람은 주력을 일심으로 하면 됩니다.

수월큰스님도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로 득도했습니다.

수월스님은 천수관음의 삼매를 표시하는 이 다라니를 수지 독송하면 온갖 죄업이 소멸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관법 하나로 도를 이루셨지만 말법중생은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참선과 주력 모두 해야 합니다.

또 아미타불을 많이 부르십시오.

아미타부처님은 저 멀리 서쪽 하늘에 계신분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고 믿으십시오.

바로 마음속에 있는 아미타불을 일심으로 부르면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지고 이승살이가 즐겁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빛을 볼 수 있게 되는 법이지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 희미한 등불하나를 의지해 목적지까지 순탄하게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에 사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라도 생활환경이나 정서와 감정에 따라 이 빛을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이 모든 법을 만들고 마음에 의해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정토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짐으로써 이 땅은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13살 때 하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한학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고 싶어 아버지 몰래 집을 나와 대구에서 고학으로 계성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당을 다니다가 외국에 나가 신학문을 공부하고 싶어 찾아간 곳이 바로 서울 봉익동 대각사입니다.

이때 대각사에서 만난 분이 용성큰스님이셨지요.

용성스님은 신학문을 배우려면 원력을 세워 3년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고 유학을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용성스님으로부터 독립사상과 불교를 배우게 됐습니다.

대각사에서 3년기도를 마치고 용성스님의 허락으로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초 일본으로 건너가 입명관(立命館)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두고 온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니 공부에만 전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에 유학중인 23명의 학생들을 모아 ‘한국학생사상동지회’를 만들어 조국독립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대각사에 있을 때 대각사 용성스님으로 부터 배운 대각·독립사상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태극기를 그리고 기회를 보아 만세운동을 벌이려고 비밀결사를 하던 중 졸업시험을 앞두고 발각돼 일부는 일본경찰에 끌려가기도 하고 일부는 피신을 했습니다.

당시 가장 친한 일본친구의 삼촌이 경찰서장이었는데 그 친구의 귀띔으로 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숨어있는 내가 어찌나 비겁하고 초라하게 생각되던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대한독립만세’나 실컷 부르고 죽고 싶은 생각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도와주던 주변사람들이 너무 고통을 받을 것 같아 상해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1923년 부산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북만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중국 절강성 항주대학원에서 정치학공부를 하던 중 배재학당시절 애국상호회와 애국상친회 등을 조직하여 애국운동에 앞장섰던 서한기, 서기호, 서한수, 진호영 등이 찾아와 독립 운동을 하자고 권했습니다.

모든 희망을 다 버리고 일본에서 못다한 독립운동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동참했습니다.

그 때의 결심은 대단했지요.

독립운동은 화합과 힘이 결집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 신조였습니다.

그래서 북만주, 몽고, 소련, 중국 지역에 있던 독립단체인 애국중진협회, 한국독립단, 독립동지회, 여성애국협력단, 소년회 등을 한데모아 ‘배달독립협회’를 조직했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단체들을 조직하여 독립을 위한 화합을 견고히 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대로 한국인 마을을 방문해 독립사상 고취를 위한 모임을 갖고 연설을 했습니다.

또 ‘배달신보’라는 주간지를 발간, 한국인들의 애국심과 단합을 키워주었습니다.

이렇게 1년여가 지나자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심지어 싸움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일본의 앞잡이들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후 애국단체대표회를 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명예와 안락, 권세를 모두 버리고 애국심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온것인데 서로 세력을 차지하려고 같은 동포들끼리 싸운단 말입니까.

독립운동을 앞장세워 허세를 부림은 우리 애국동지들의 가장 큰 적입니다.

이제부터 과거의 모든 잘못을 청산하고 참된 애국정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합시다”고 호소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일체의 명리야말로 헛된 것이니 미혹하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탐욕의 잔가지, 어리석음의 잔가지를 비롯하여 온갖 악의 잔가지들을 잘라버릴 때 성불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눈앞의 명예에 안주하는 것은 눈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잠든채 죽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싸움은 계속되었지요.

이같은 싸움으로 인해 결국 나는 요즘말로 테러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습니다.

하도 분해서 몇몇동지들과 함께 동포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마을을 찾아다니며 연설을 했습니다.

결국 태평촌이라는 마을에서 또다시 테러를 당했고 몸도 많이 다쳤습니다.

그때 ‘이제는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한 상황에 이르니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부처님이셨습니다.

아마 내 마음자리어디엔가 불심이 자리잡고 있었나 봅니다.

그 당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불리우는 수월큰스님이 생각나 마지막으로 스님 뵙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대각사에서 부터 불교 공부를 해 오던 터라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염불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수월스님이 계신 화엄사스님과 신도 몇 분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이 인연으로 수월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불교에 심취하게 됐습니다.

당시 화엄사에서 열흘간 있었는데 스님들은 독립운동은 그만두고 출가할 것을 은근히 권했고 수월스님은 제자들에게 “자네들이 이 독립군의 출가를 권하지 않아도 불법에 인연이 있어서 반드시 승려가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몽고에서 온 마루오사대 고승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그대들이 원하는 독립은 꼭 올것이네.

출가수행자가 되어 한나라 민족을 구하는 일과 함께 천하중생을 제도하는 원력을 세워보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독립운동 단체간의 파벌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때 나는 조국을 위한다는 대의 명분앞에서 세력다툼을 벌이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동족의 다툼을 보고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천하중생을 제도하자는 대원력을 세워보라는 마루오사대 스님의 법문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곧바로 몽고로 들어가 모루웨나 사원의 마루오사대화상를 은사로 득도했습니다.

득도이후 약 10여년간 몽고에서 호마루 불교전수대학과 우루무치의 메이오 불교대학원을 졸업하고 신강의 히브롯다 종립 원각사내 브로늬오조사 문하에서 선학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불교공부를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보니 해방이 되더군요.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조국으로 돌아와 오대산 월정사에서 본격적인 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니 여기저기 선방에서 오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거절했습니다.

중이란 모름지기 이런저런 명리에 끄달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후 내 가고 싶은 대로 제방선원을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선방 다니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지요.

불교공부 한답시고 출가해 부처님 밥을 먹고 사는데 성불 못하면 대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이곳 도화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50여년간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공양시간만 되면 무섭습니다.

공양물들이 어떤 음식입니까.

여러 선남선녀들이 스님들 뒷바라지 한다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 모아온 양식인데 허투로 받아먹어서야 되겠습니까.

가기 전에 밥값을 해야 하는데 큰일입니다.

아마 내가 이제 갈 때가 되었나 봅니다.

이런 생각을 다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방에서 수행중인 스님들은 쌀 한 톨, 김치 한 조각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스님들은 선방의 좌복이 가시방석일겝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양의 의미조차 모르고 포식하며 수행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의 공양을 받을 때에는 오직 그 배고픔의 괴로움을 겨우 없앨 정도로 먹어야 합니다.

함부로 많은 음식을 취하면 착한 마음을 헐게 돼 잡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업이 쌓이면 그림자가 사람을 따라가듯 수행의 장애는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때는 떨어지는 폭포처럼 막을 수도 없고 대신 받을 자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당나라의 고승 백장회해스님도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이란 다름 아닌 불작수행(佛作修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와 지혜를 기르는 가장 쉽고도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삶, 바르고 옳은 삶을 위해 펼치는 행위,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정리=김중근 기자 혜양큰스님 약력 ·1900년 경남 하동 生 ·23년 일본 경도 입명관대학 수료 ·25년 몽고 모르웨나사원 마루오사스님을 은사로 득도 ·27년 몽고 호마루불교전수대학 卒 ·46년 귀국 지암스님 은법사로 재득도 ·48년 대전 대흥사 대광선원 창건 .2000년 세수 101세로 원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