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스님─온 몸이 자비에 잠길 때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온 몸이 자비에 잠길 때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지운스님 저는 강단에서 강의를 하는 강사인데 어떻게 수행에 대해 이야기 하는가 하며 여러분이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수행법은 자비수관이라는 명상법입니다. 불교의 수행법은 다양하고 많습니다. 자비수관만이 결코 유일한, 최고의 수행법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자비수관이라는 수행을 통해 다른 모든 수행의 원리를 알고 각 개인이 현재 하고… 지운스님─온 몸이 자비에 잠길 때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계속 읽기

지운스님─동물중에도 수행자가 있다

동물중에도 수행자가 있다

-지운스님-

브라함마 라는 스님이 호주에 선원을 열었을 때의 일화입니다.

스님은 한달에 한 번 교도소에 가서 법문을 하곤 하셨습니다 하루는 법문이 끝나고 재소자와 일대일로 상담을 하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한 재소자가 자신의 체험담을 얘기 하였습니다.

육식을 끊고 채식주의자가 된 사연을…

그 교도소 안에는 동물을 죽이는 날이 있었답니다.

재소자들의 식량으로 쓰기 위해 소.양.

돼지등을 키우고는 그 동물을 잡는 것도 재소자가 하였답니다.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재소자 중에서도 가장 힘세고 악랄한 이가 맡았습니다.

그는 동물을 죽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기분도 짜릿해 그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전자총으로 쏴 죽이곤 했는데, 대부분의 짐승들은 죽임을 당하는 통로를 들어오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몸부림을 친답니다.

그 몸부림치는 짐승을 총으로 쏴죽이는 쾌감이 대단했답니다.

그런 어느날 소 한마리가 그 통로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소는 다른 짐승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천천히, 요동도 치지 않고, 전혀 두려워 하는 기색도 없이 유유하게 걸어 왔습니다.

그러곤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편안한 눈으로 총든 사내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윽고 소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소의 표정은 죽이는 자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습니다.

살생을 업으로 삼고 사는자에 대한 한없는 측은지심의 표정이었습니다.

그는 순간 깜짝 놀라 총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이후 그는 더이상 짐승을 죽이는 일을 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 육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는 수행자였습니다.

사람만이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는 한 타락한 영혼을 정화시켰으며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자비심은 어떤 살인자도 감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비는 가장 수승한 마음의 언어이며 모든 생명체에 통하는 언어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자비심을 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도를 얻었다해도 자비심이 없는 수행자라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닙니다.

지운스님─기도의 원리를 알고 기도합시다

기도의 원리를 알고 기도합시다 –

지운스님

(동화사 강주) – 1.

기도는 수행이 아니다.

요즈음 기도를 수행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와 수행은 염연히 그 성격이 다릅니다.

기도와 수행은 상보적이며 서로 병행할 수 있지만 수행이 기도이고 기도가 수행일 수 없습니다.

기도는 수행해 갈 때 마장을 만나거나 수행의 진전이 없을 때 불보살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기도가 그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기도로서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에게 부처되게 해달라고 기도드린다면 성취가 가능할까요? 기도는 단지 불보살을 신앙하는데 그칠 뿐입니다.

깨달음은 진리가 하나인줄 모르는 무지, 그리고 그 무지에서 파생하는 갖가지 번뇌를 타파해야 되는데 기도는 이 무명을 타파할 수 있는 기능이 없습니다.

무지는 내적 관찰이 필요하지만 기도에는 이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밖으로 불보살을 믿는 신앙(信仰)이 그 하나이고 내안에 부처의 성품이 있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신심(信心)이 또 하나의 믿음입니다.

기도는 신앙적 측면이 강하다면 신심은 수행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업(行)을 닦는다(修)는 뜻입니다.

행이란 조건 지어진 모든 것, 또는 형성시키는 힘, 즉 업을 말합니다.

업에는 생각과 말과 행위의 세 가지가 있는데 생각은 업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즉 맹목적이고 선악의 윤리적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각이 반드시 행위로 이어지고 결과를 가져옵니다.

즉 한 생각이 윤리적이라면 그 생각에 이어 행위로 이어지고 숨넘어가는 순간에 일어나는 생각의 성격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래 없던 것을 만들어 실제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은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업은 자기 반성적이거나 반조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각 없이 대상에 반응하는 데로 의미부여하거나 다른 것과 결부시켜 감정과 생각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합니다.

특히 분노 우울 불안초조 억압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 속에 빠져들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즉 창조적 삶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업의 진행을 중지시키고 감정과 생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그 본질을 꿰뚫어보는 방법은 기도에는 없습니다.

이는 수행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상중하로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불보살님께 기도하여 불보살님의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현세이익적인 기도로서 일반적입니다만 이는 하급정도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불교신앙만이 아니라 주로 민간신앙과 기능신앙이고 기도사(祈禱師)와 산복(山伏)에 의해 행해지는 악마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며 병을 치료하는 것 등에 이용됩니다.

사례를 들자면 잘 아는 도반스님에게 전화 한 통화를 받았습니다.

내용인즉슨 불전에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든 보살이 어느 날부터 절에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도 궁금해서 그 신도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제 절에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불보살님에게 그렇게 기도드리고 공양올리고 했는데 어떻게 우리 큰 아들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반이 저에게 하는 말이 만일 그 신도가 무상(無常)이라는 진리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러한 미신적 기도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교리강좌를 열어야겠다고 저에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앞의 예는 보편적으로 절에서 신도들도 하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불법학습이 되어 있지 않는 기도는 매우 위험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도하면서 뭔가 보이기를 바라고 꿈에 무엇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기도는 기도의 참뜻을 왜곡하고 미신으로 빠질 수 있는 기도입니다.

왜 기도가 필요하고 기도의 원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모든 것은 법문과 그리고 경전과 논서 공부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배워야합니다.

특히 수행과 혼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불법학습이 필수적이며 기도와 수행의 상호관련 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불교 기도의 특성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수행이 들어가 있는 기도가 불교적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죄를 참회하여 죄를 소멸하고 불보살님께 감사 보은 찬탄하는 등의 비공리적(非公利的)인 기도가 있습니다.

더러운 옷은 염색이 잘되지 않지만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염색을 하면 그 옷에 염색이 잘되듯이 기도도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면서 기도한다면 불보살님과의 감응이 빠르고 소원성취도 빠를 수 있습니다.

이 기도의 특징은 밖으로 불보살과 연결시키는 기도의 매개체로 안으로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참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보살님과의 감응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것이 중급수순의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고 불보살님의 명호를 반복적으로 외우고 부르는 방법은 이를 기도라고 하기 보다는 염불이라고 합니다.

염주 알을 굴리면서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 방법에는 수행이 들어가 있습니다.

염불을 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고요함과 편안함이 옵니다.

이 선정의 깊이에 따라 아미타정토의 경우에는 하품 , 중품, 상품의 연꽃에서 화생하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생들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기원해주는 기도야말로 최상의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수행과 관련되는 기도의 원리를 이야기하겠습니다.

2.

기도의 원리를 알고 기도합시다 기도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단지 복만을 비는 기도와 불법학습을 통해 수행과 연결시켜 기도하는 기도입니다.

제대로 기도하려면 불법학습이 필요하며 부처님가르침은 수행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기도했을 때 그 기도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선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고 기도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일 기도가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굳이 불교교리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느 종교든, 심지어 무속(巫俗)이나 아무종교도 가지지 않는 사람도 기도합니다.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원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초심학인문』에서 보조국사는 ‘능례소례能禮所禮는 진성연기眞性緣起한다’라고 설하십니다.

기도하는 자와 기도받는 불보살님은 참 성품이 연기한다는 말입니다.

연기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입니다.

이 연기의 뜻을 잘 이해했을 때 기도의 의미도 명확해 집니다.

연기라는 뜻은 상호의존을 말합니다.

즉 모든 존재는 그물과 같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생명은 다른 이의 생명에 의존해서 존재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상호소통임을 말합니다.

이 연기의 진리는 곧 기도하는 이와 기도를 받는 불보살님은 본래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마치 전화기를 드는 순간 전화선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과 같이 기도드리는 순간 불보살님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본래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떠한 매개체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기도에서의 의사 전달은 완전히 시공을 초월합니다.

또한 그 결과는 즉각적이므로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결의 이치를 잘 알아야 하고, 기도드리더라도 이 이치대로 실행해서 기도성취하려면 수행방법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아야만 됩니다.

왜냐하면 연기의 이치는 알아차림을 통해 반야가 계발될 때 비로소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에서는 기도하는 자와 불보살간의 관계소통이 이루어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게 하는 원리입니다.

기도 하는 자와 기도 받는 불보살의 연결이 연기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오느냐 아니냐는 이 연기라는 진리에 의해 결정됩니다.

연기의 진리가 아닌 절대적 실체로서 진리를 말한다면 기도의 응답이 있을까요? 만일 절대적 타자로서 神에게 기도를 한다면 기도의 감응이 있을까요? 그 신이 절대자로서 불멸의 실체라면 그 신에게 기도를 드리면 기도의 성취가 이루어질까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불멸의 실체로서 절대자라면 첫째는 다른 것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에 의해서 신에게 기도를 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다.

만일 기도의 응답이 있다면 관계를 가지는 것이 됨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변하는 존재이므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불변의 존재이면서 기도자와 감응을 한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합니다.

불변과 상호관계의 변화는 상반되기 때문에 모순입니다.

반면 불보살님과의 감응은 어떨까요? 불보살님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즉, 실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허공같이 비어있습니다.

허공같이 비어있기에 가고 옴이 없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불멸입니다.

하지만 허공같이 비어 있음은 마치 골짜기가 비어있기 때문에 메아리가 되돌아오듯이, 달리 말하자면 금은 사람들의 주문에 따라서 시공자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누런 금의 성품이 바뀌지 않음과 같이 중생들의 기도에 응답합니다.

이와 같이 기도의 응답은 연기라는 진리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불멸의 신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아서 연기의 진리가 아니며 당연이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의 원리는 연기의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는 현상의 측면으로 상호 관계성이며,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입니다.

또 하나는 변화하는 낱낱은 그 자체로는 자아와 실체가 없는 관계로 맺어진 변화이지만, 낱낱이 상호 관계하는 전체의 장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변화없이 상주하는 법계입니다.

이 두 측면은 본래 하나입니다.

곧 낱낱의 변화는 그 자체로 전체성에서의 연기이므로 무변화이며 전체성의 무변화는 낱낱의 변화 자체가 전체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기법을 깨쳐 연기법 그 자체인 부처님은 열반에 드신 법신(法身) 상태에서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을 내어 중생을 구제하시듯이 연기의 진리대로 현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기법의 이러한 두 측면은 기도의 원리이자 존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수행의 원리입니다.

연기의 이러한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기도라면 어떻게 기도해야 진리가 드러나고 그 진리를 타고 (能禮所禮眞性緣起) 기도의 응답이 있을까요? 바로 알아차림과 자비심 그리고 보시행이 필요합니다.

기도자와 불보살님과의 상호소통이 이루어짐이 이어져 있어야 함은 곧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망각해버리면 기도라는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음은 바로 기도자와 기도를 받는 불보살님과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연기의 이치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다른 경계로 달려가는 마음을 안으로 챙기게 되며(집중) 모든 생명은 그물과 같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이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생기면서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심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과거를 생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몸은 현재에 있어도 마음은 현재에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통해 마음이 ‘지금, 여기’에 존재할 때 기도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며 기도할 때 마음챙김이 절로 이루어져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불보살님과 감응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부족하면 아무리 용을 써도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으면 누가 이 자리에서 기도를 하겠습니까? 이 알아차림과 마음챙김, 그리고 통찰의 지혜가 생기면서 의식이 깨어나는데 이때 바로 기도하는 사람과 불보살님, 그리고 모든 생명이 기도로 연결됨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곧 반야지혜의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이러한 통찰로부터 기도가 나올 때, 그 기도에는 사랑과 연민심이 실리게 되며 자기 몸의 안위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도 진정으로 필요한 최상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통해 반야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 기도는 자비심을 담고 있지 않아, 단지 자신의 부귀영달만을 바라는 미신적인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단지 복만을 비는 기도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빌어서 될 것이 있고 될 수 없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불보살님께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난 열반을 얻게 해달라는 것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바로 연기의 두 가지 측면인 변하는 현상계는 위빠사나관으로, 불변의 측면은 사마타관으로 수행하여 연기의 진리를 깨칠 때 비로소 생사가 없는 불생불멸의 열반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연기의 이치를 알아 기도하는 것은 수행과 연관되는 기도로서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고 생사가 없음을 아는 깨달음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단지 복만을 비는 것은 수행과의 차이점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기도의 효과가 즉각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어떤 이치일까요? 그리고 보시행이 기도에 왜 필요할까요? 3.

기도의 효험과 기도로 안되는 것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기도의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리고 보시행은 기도에 왜 필요할까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거나 그 효과가 즉각 나타나지 않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기도하는 마음에는 정성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흔히 기도하는 분들이 범하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기도 중에 무엇이 나타나기를 바라거나 꿈에 무언가 보이기를 바라는 의도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은 바라는 마음을 낸 순간 그 의도에 딱 맞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다른 것과 결부시키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곧 영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례를 들어보면 오행생식이란 말을 들어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음식을 오행에 맞추어서 생식하는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어느 목사님이 찾아와서 본인은 기도만 드리면 예수님과 여러 성인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기도를 했느냐를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여러 날 동안 기도를 드리면 본인이 의도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다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을 찾으면 부처님, 관세음보살을 찾으면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형상으로 무언가 보이고 들리는 것은 모두 자신이 만들어 보고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바라거나 무언가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기도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순수하게 기도해야 기도의 성취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기도를 할 때 기도드리는 순간순간 기도를 하고 있다는 알아차림을 하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알아차림이 미리 바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보시행을 겸해야 기도의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보시행이란 곧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무소유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는 음덕을 쌓는 것으로 음덕이란 남몰래 선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와 나의 관계를 소통시키며 기도하는 자와 기도받는자의 감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기도드리는 마음은 무소유이며 순수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20여년이 넘은 이야기입니다.

대구 서야동에 대성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관음전에 아침저녁으로 지극정성으로 기도드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는데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음보살님께 매달려보자는 심정으로 일념으로 관음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두 부부가 손을 잡고 길을 가는데 저 앞에서 누덕누덕 기워 입은 승복차림의 스님이 오시더니 ‘보살님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보시를 하시지요’ 며 지나가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불자는 주머니에 100원짜리 동전만 서너 개 있어 이걸 어떻게 스님께 드릴 수 있냐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치다가 그래도

하는 마음에 그 동전을 스님께 보시를 했답니다.

그때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살님의 심정을 잘 압니다.

하고는 약방문을 일러 줄 터이니 받아 적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방문을 받고 꿈에서 깨었는데 부부가 동시에 그 꿈을 꾼 것입니다.

부부는 신기해 하며 그 약을 지어먹었는데 암이 완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기도의 효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꿈속의 스님은 다름 아닌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삼십이응신으로 나투신다고 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이 분은 기도를 할 때 미리 나타나기를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정성을 드린 것뿐입니다.

누구든지 위급할 때는 마음이 순수해지니까요.

그리고 적은 액수이지만 꿈속에서 동전을 보시함으로써 음덕을 쌓은 것이며 그 음덕의 힘에 의해 관세음보살님과 소통이 생기고 감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한 공덕을 일체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향하지 않으면 ‘내가 기도 성취를 했다’든지 ‘기도만이 최고라든지’ 하는 자만과 아집에 빠집니다.

이것이 연기緣起의 이치입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선인선과 악인악과(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인과법칙을 잘 알고 믿고 있으면 기도의 효험과 관련하여 미혹이 생기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로 되지 않는 것 하나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게 해달라거나 부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천만년 흘러도 불가능합니다.

이는 기도의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심에서 오는 것이며 생사문제는 불생불멸의 불성을 믿는 신심에서 촉발되는 수행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효험을 수행의 결과로 보거나 그 성취가 삶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기도는 수행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 중에 마구니의 장난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으려면 불보살님께 기도하여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