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스님─ 자비무적(慈悲無敵)

자비무적慈悲無敵

지운스님

2007.05.10 우리가 계율을 잘 지킬 때 계율이 귀신의 장애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하지만 귀신과의 원한을 풀거나 조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비심이야말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 해줍니다.

말하자면 천도의식만이 귀신을 천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진정한 자비심을 가지기만 해도 그 원한을 풀거나 조복시키거나 감복시키기 때문에 굳이 천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경전을 통해 일체중생에 있어서 어떠한 존재도 자비심을 갖추고 있는 자를 해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매우 날카로운 창을 상상하라”고 제안한 뒤, “그 창을 맨 손으로 구부리거나 토막 내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고 묻습니다.

제자들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그리할 자가 있다면 헛되이 고생만 할 것이라 대답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자비심으로 마음을 해탈시키면, 어떠한 귀신이 그 수행자를 해치려고 하여도 헛된 수고만 하는 셈이 될 것이다.” 라고 설하셨습니다.

사랑과 연민심이 칼보다도 더 강하다는 말이 이러한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비심을 갖추고 있으면 어떠한 해도 입지 않는다.” 라는 가르침은 다른 경전에서 도적의 비유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각각 100 그릇의 음식을 공양하는 것보다 아침, 점심, 저녁 중 황소를 끌 정도의 짧은 시간일지라도 자비심으로 마음을 해탈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자비심의 효능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잡아함경』대정장 11, p.344下;Samyutta Nikaya 11, p.264;안양규 저,『붓다의 비유설법』,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정각원, pp.54~55 이 자비심은 밖으로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아주 작은 생명, 즉 꿈틀거리는 중생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비심이 이르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개인의 깨달음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고통도 자기만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리경전 주석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례를 들자면, 자비관을 하시는 스님께서 숲 속에 들어가서 한철(3개월)수행하시고 그 숲 속을 떠날 때 나무 신(神)들이 모여와서 스님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스님께서 여기에 오시기 전에는 나무 신들이 서로 헐뜯고 싸워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오셔서 자비관(慈悲觀) 수행을 하심으로 해서 저희들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게 되었는데 만일 스님께서 떠나신다면 또다시 신(神)들 간의 싸움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제발 떠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라고 간청한 이야기가 전해져옵니다.

자비심이 귀신의 장애를 막아주고 귀신을 감복시키는 힘은 부정적인 심리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주는 자비심의 속성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심리는 곧 귀신이 침범할 수 있게 하는 빌미가 됩니다.

귀신의 종류는 수만 종이라고 합니다만,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는 것은 귀신이 될 수밖에 없는 평소의 심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갈래 중에서 아귀계에 속합니다.

물질계와 몸을 구성하는 흙,물,불,바람의 4대(大)원소가 있습니다.

이 4대는 각기 심리를 일으키는데, 흙은 자만심, 물은 분노, 불은 탐욕, 바람은 질투입니다.

아귀는 탐욕이라는 불의 요소가 지배하기 때문에 배는 크고 목은 가늘어 늘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입에 넣지만 곧 불로 화하거나 물이 말라버리는 현상 때문에 고통스러워 음식과 물을 잘 먹고 마시지 못합니다.

이처럼 살생을 많이 하거나 자기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끝없는 탐욕을 추구할 때 죽어서 귀신이 될 심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소 고기를 즐겨먹거나 허망한 대상을 소유하려고 온갖 욕심을 부린다면 귀신과 서로 응하는 불기운이 형성되므로 귀신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마음이나 정신활동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초월적이거나 세속적인 성질의 기운을 동반합니다.

즉 분노는 눈에 띌 정도의 거친 호흡을 야기합니다.

그러나 고요한 정신 집중상태는 생각과 호흡을 고요하게 만듭니다.

미묘한 문제를 풀기 위해 사색에 잠기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멈춥니다.

분노나 자만심, 질투심, 수치심, 사랑, 탐욕 등 마음 작용은 그에 상응하는 호흡과 기운이 생겨나며, 그 기운을 자기 내부에서 직접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운이 밖의 모든 것과 교류합니다.

즉 귀신의 심리가 형성되면 몸의 그 기운도 따라 일어나며 그 기운에 따라 실제의 귀신과 교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때 귀신으로부터 침범이나 장애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소 자비심을 키우면 이러한 장애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비慈悲는 자비에 반대되는 마음을 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즉 무명과 그에 편승하여 일어나는 갖가지 마음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미움, 성냄, 원한, 적대감, 두려움, 잔인한 폭력성과 남에게 피해를 주는 모든 마음이 녹아 사라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번뇌가 마음에서 나와 몸에 영향을 주면 몸이 아프고 몸은 또 마음에 영향을 주어 번민하게 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괴로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 영양분을 주듯이 몸과 마음을 자비로 감싸 주면 번뇌를 일으키던 마음이 번뇌를 소멸시키는 지혜로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자비심의 성품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자비심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므로 연기緣起이며 개체의 실체와 자아를 세울 수 없으므로 공이며 무아입니다.

그래서『유마경』관중생품에서 “중생을 볼 때 물에 뜬 달같이 보고, 돌 여자가 아이 낳는 것처럼 중생은 중생이 아니고 공임을 보라, 그럴 때 자비심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비심의 속성은 공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심은 배타적이고 대립적이지 않으며 단절을 유도하지 않으며 오히려 귀신과 융합하여 귀신의 천도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의식이 완전히 변형되며 그 의식에 따르는 기운 역시 커다란 변형을 겪기 때문인데 이는 자비심에 의해 마음이 각성되는 순간순간에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기분과 생각은 단순하건 복잡하건 그에 상응하고 융합하는 기운을 동반합니다.

여기서 마음과 기운이 동일하다는 원리를 알게 되면 마음 밖에 현상계가 없고 현상계 밖에 따로 마음이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윤회와 열반, 현상과 본체 등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를 뜻합니다.

자비심과 귀신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비심은 귀신과 더불어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되니 자비심에 의해 오히려 귀신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마치 향 연기나 담배 연기가 허공을 만나면 사라지듯이 번뇌를 일으키는 귀신의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어 귀신의 탈을 벗어나게 합니다.

따라서 평소에 자비심을 키우면 설령 귀신을 천도할 정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귀신의 침범은 막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비심을 어떻게 일으키고 강하게 키울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모든 생명의 고통을 자각할 때 자비심이 일어납니다.

이 자비심을 강하게 일으키려면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모든 사람들이 전생에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모든 생명에 대해 나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나 자신을 비난하더라도 그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하기에 앞서 무엇 때문에 비난하는가를 상대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생각하면 강한 자비심이 생겨서 어렵고 힘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도와주고자하는 생각과 함께 실천행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자비심을 강하게 일으키는 것이며 또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 이 글은 동화사 회보 (월간 동화) 5월호에 게재한 원고입니다.

지운스님─ 왜 원을 크게 세워야 하는가

왜 원을 크게 세워야 하는가

-지운스님-

원을 크게 세우면 큰 원으로 인해 작은 번뇌와 업이 소멸됩니다.

그래서 병이 낫기도 합니다.

원을 세운다는 것은 보리심을 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은 반조의 의미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뇌세포는 마음따라 움직이니 서원을 따라 온몸의 세포가 나란히 섭니다.

원은 내 성격을 인도합니다.

이와같이 발원한다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의미가 됩니다.

대원으로 인해 사소한 일에는 동요가 되지 않으며 마음이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니 꼭 큰 원을 세우고 기도하십시오.

무념무상이란 생각이 없다는 멍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념과 망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생각은 다 나쁘고 망념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으면 무념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좋고, 싫고, 더럽고, 깨끗하고, 예쁘고, 밉고 등 표면적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자취(흔적)는 남지 않습니다.

대상에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상에 마음이 동요되고 머물면 착각을 일으킵니다.

생각은 하되 대상에 머물러 자신의 의견이나 상상을 덧붙이면 망념 망상이 됩니다.

깨달은 사람은 어떤 느낌도 없는줄 아는데 그건 죽은 마음입니다.

그 죽은 마음으로 어떻게 중생구제를 합니까.

기도가 잘 되었으면 분별심이 없어야 합니다.

즉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지는게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과 내가 같은 불성이라는 것)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어 법을 설합니다.

내 마음을 동요케(일어나게) 하는 것은 모두 경계입니다.

수행중 무얼 느끼려는 의도를 버려야 수행이 잘 됩니다.

보려고 하고 느끼려 하고 깨달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 기다리는 마음이 번뇌가 되어 깨닫지 못합니다.

상념은 버리려 하면 더욱 성하게 일어납니다.

모든 생각은 관찰대상입니다.

불보살에 의지하며 사는 것은 신앙이고 내안에 있는 부처의 성품에 의지하는 것은 신심입니다.

신앙심이 강하면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형상에 취하는 사람은 사이비에 빠지기 쉽습니다.

(부처님 모습만 봐도 좋다며 형상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 신심이 있으면 신앙은 자연히 생깁니다.

기도만 하는 사람은 불법을 모를 수 있습니다.

법을 먼저 듣고 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학습을 하다보면 지혜가 밝아져서 신심이 생깁니다.

불교신심은 체험을 동반합니다.

믿기만 하고 앎이 없으면 광신자가 됩니다.

앎이 있으면서 믿음이 없으면 탁상공론이 됩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시작되어 믿음으로 끝납니다.

앎은 있지만 수행이 없어 증명되기 힘듭니다.

기독교는 세월따라 변질되었지만 불법은 세월이 흘러도 똑같습니다.

신의 사랑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게끔 해주어야 진짜 사랑입니다.

종속 관계로 묶어두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은 중생도 똑같이 부처되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장 좋아하는 공양은 ‘저도 깨달아 부처되겠습니다’ 하고 발원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절대로 깨달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 깨달음 자체가 무아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지혜가 곧 법신입니다.

그래서 법신은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든 종교중 가장 수승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종교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 , 불법은 모든 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최고는 굳이 최고라고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종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갇혀있는 사람입니다.

스승은 복덕과 지혜를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복을 짓는 사람은 연민심을 갖고 있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고 복만 짓는 것을 치복(어리석은 복)이라 합니다.

연민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가장 좋습니다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것도 중생을 제도하려는 연민심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80종호 32상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보리심을 냈기 때문에 갖춘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항상 중생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깨달은 사람도 습업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감정적인 뿌리는 잘 해결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선지식을 대할 때는 그의 과거지사를 물을 필요도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그가 설하는 법만 보면 됩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복덕이 많아야 합니다.

복덕이 적으면 하는 일마다 걸림이 많습니다.

영험은 정성을 드리는 그 마음에 있지 도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이란 재미없는 것을 재미로 삼는 일입니다.

자비롭고 부드럽게 사람을 대하는 사람은 지혜가 개발된 사람입니다.

곧 모든 존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직 중생제도의 방편으로만 화를 냅니다.

그러나 화가 마음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멀리서 볼 때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은 계행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멀리서 볼 때 뜀박질을 해도 고요한 기운이 넘치는 사람은 선정을 닦은 사람입니다.

법 없이 살수 있을 만큼 착해도 어리석으면 착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착함에는 지혜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인상하나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법을 닦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했을 때는 반드시 회향을 해야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공덕을 불보살에게, 위없는 가르침에, 일체중생에게 회향해야 합니다.

회향이란 내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공덕이 생기므로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