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문화

6년 전 고등학교를 맡아 학교 경영에 전념하다 다시 대학 강단에 돌아왔을 때 가장 당황했던 점은 강의실 안에서 모자를 쓰고 있는 학생들이 유난히 많은 것이었다. 남녀학생 가릴 것 없이 모자를 눌러쓰고 있으니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뿐더러 남녀 구분조차 힘들었다.

실내에서 모자를 벗는 것이 옳은지, 그냥 쓰고 있게 두는 것이 옳은지 쉬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속으론 모자를 벗기고 싶은데 섣불리 말했다가 학생들의 반발에 내 논리가 궁색해지면 학기 초부터 수강분위기를 망칠 수 있기에 신중히 대처하기로 하고 첫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와 얼마간 고민한 적이 있었다. 결론은 모자를 쓰는 게 그 즈음의 유행이고 의상의 일부로 보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고, 우리 옛 어른들도 방안에서 갓을 쓰고 있었으니 그대로 인정해 주기로 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또 눈에 거슬리는 게 휴대폰이었다. 아예 첫 강의시간에 공개 경고를 하였다. 강의 중에 휴대폰을 사용하거나 벨이 울릴 때와 책상 위에 두어 내 눈에 띄면 무조건 압수하여 1주일 동안 연구실에 보관하였다가 다음 주 강의 후에 돌려준다고 하였다. 이 처방은 그 후 2년 동안은 그런대로 유효하였다. 그래서 올해 신학기에도 같은 처방을 썼는데 이젠 통하지 않았다. 이미 휴대폰은 학생들의 손에서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심각해진 것이다.

이제는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로부터 노인에 이르기 까지 휴대폰은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아니 손에서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되는 장신구가 된 것 같다. 길을 걸으면서도, 승강기 안에서의 짧은 시간도, 복잡한 버스 안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손은 연신 휴대폰 자판기를 만지고 있다.

이 사람들로부터 휴대폰을 빼앗으면 어떻게 될까. 허전함을 넘어서 공황상태로, 한걸음 더 나아가 알코올이나 담배 등의 중독 환자에서 볼 수 있는 금단현상 까지 있을 법하다. 이미 손에서 휴대폰은 떨어지기 힘든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우리가 모르긴 하지만 지구의 어딘가에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또한 죽어간다. 휴대폰 또한 광고에 나오지 않을 뿐이지 새로운 폰이 탄생할 것이다. 언젠가 IBM사의 영업사원이 PC 판매원은 야채장수와 같다고 했다. 시장에 나오면 이미 한물간 제품이고 벌써 새로운 제품이 개발되어 있다는 것이다.

휴대폰 또한 1973년 경 탄생하여 일본의 NTT에 1세대 무선 네트워크가 소개되었고, 1991년엔 핀란드에서 GSM 네트워크가 처음으로 소개되고, 1993년에 PDA 기능이 탑재된 휴대폰이 첫 출시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블루투스 기능이 선보이고, 2007년에 샤프에서 최초로 내장 카메라가 달린 핸드폰을 출시했다고 한다. 그 후 수많은 과정을 거쳐 2007년에 애플에서 아이폰이 탄생하고 이어 2008년에 안드로이드폰이 출시되는 등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새로운 기능을 가지고 커다란 화면에다 수백만 화소의 카메라를 지닌, 기존의 3G보다 10배나 빠른 데이터 속도와 게임 실행능력 등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사양을 갖춘 기종들이 잇달아 출시되는데 어떻게 이를 따라가야 하는가.

요즘 들어 아들이 내 ‘고급(古級)’의 휴대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꿀 것을 은근히 종용하고 있다. 어차피 바꾸기는 바꿔야 하겠지만 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도 막노동자들도 다 스마트폰을 쓰는데 명색이 교수라는 애비가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으니 꽤나 안쓰러웠나보다. 대학이라는 곳이 ‘첨단’의 학문을 하면서도 가장 ‘보수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대세를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시류時流만 따르다 보면 본질을 놓칠 수도 있으니 첨단(尖端)보다는 한물간 유행을 따르는 것도 처세의 한 방법일 것이다. 어쩌면 설익은 문화인보다 무식한 원시인이 되고플 때가 더 많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7월 140호

화장실 문화

사람이 집을 떠나 여행을 해보면 자기 집과 가족의 소중함을 확인할 수 있다. 제 나라를 떠나 타국에 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누구나 여행을 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겪는 문제는 먹는 것과 자는 것, 그리고 배설의 문제일 것이다. 일행들 가운데는 잠자리가 바뀌면 제대로 숙면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그런가 하면 물이 바뀌고 음식이 바뀌면 아예 먹지를 못하든지 배탈이 나서 고생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당장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로 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선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행과 더불어 단체로 이동을 할 때에 이런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건강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지 순례 차 인도를 여행해 본 사람은 다 겪어본 일이겠지만 허허벌판을 몇 시간씩 달리다 보면 생리현상을 잘 아는 안내자가 한적한 들판에 차를 세우고는 볼일을 보라고 하는데 화장실 시설은 상상할 수도 없고 적당히 해결하라고 하면 어쩌겠는가. 남자들이야 돌아서면 아쉬운 대로 가능하지만 여자들은 담요 같은 걸 가지고 다니면서 해결하기도 하지 않던가. 그래도 하는 체면차림의 마음에 풀숲 쪽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안내인이 “지뢰 조심!” 한다. 이런 곳에 ‘지뢰’는 무슨 지뢰? 아니나 다를까. 사람이나 짐승들의 배설물이 곳곳에 늘려 있으니 조심하란 뜻이란다.

일전에 십여 일 간 동유럽을 다녀왔다. 서너 해 전에 친구들과 어울려 만든 부부동반 해외여행팀이 있다. 이름하여 ‘나이야 가라’. 굳이 영어로 표기하면 ‘Niagara’. 다들 열심히 살아왔으니 늘그막에 즐겁게 여생을 보내자고 다짐한 모임이다. 20여 명이 독일 뮌헨으로 들어가서 체코와 폴란드,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다시 뮌헨을 돌아와 귀국하였다. 지금도 소름이 끼치는 ‘나치의 유태인과 장애인 학살 및 생체실험’이나, ‘여유로운 자연환경’과 ‘문화예술’에 대한 부러움은 아마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일행들이 모두 공감했고 서운했던 일화가 바로 독일의 화장실 문화였다. 10여 년 전 독일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라이카’회사(주로 카메라 망원경 따위의 렌즈 생산)를 방문하러 시원하게 뚫린 ‘아우토반’을 달리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는데 화장실에 가니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참 황당했다. 우리의 문화, 우리의 상식으론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안내인의 설명으론 당시 독일이 세계 제3위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다가 동ㆍ서 독일이 합쳐져 ‘통일’이 되었지만 과다한 통일비용 때문에 국가 재정이 어려워 얼마 전부터 휴게소 화장실이 유료화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휴게소의 공중화장실까지…. 하면서 볼일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한술 더 떠서 ‘식당’의 화장실 사용까지도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관광지라 그런지 ‘유료’화장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니 ‘무료’화장실 안내를 잘 하는 것도 ‘유능한’ 안내인이 되는 조건 중 하나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가 식사한 식당에서 ‘물’은 철저하게 사 먹었지만 ‘화장실’ 사용은 ‘공짜’였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뮌헨’ 시청 광장에서 정오의 종소리와 세 번의 목쉰 닭 울음소리를 듣고는 점심식사를 하려고 청사 바로 옆의 대형 식당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찾으니 ‘돈’을 받기 위해 한 여자가 지키고 있었다. 불평불만이 쏟아졌지만 도리가 없었다. 단순한 ‘근검절약’이 아니라 ‘철저한 깍쟁이’ 독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변명이라도 들어야 하겠기에 현지 안내인에게 따져 물었더니 ‘사용료’가 아니라 ‘봉사료’(?)라나.

다시금 우리나라의 화장실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한국 전통 측간의 모습이 수거식 뒷간이나 아직도 사찰에서 남아있는 해우소(解憂所), 잿간(뒤간에 아궁이의 재를 같이 섞는 곳), 통시(똥돼지 뒷간) 등이 있지만, 최근에는 서구의 수세식 변기의 바탕 위에 우리는 새로운 화장실 문화를 꽃피우고 있다. 이즈음 우리나라의 공중화장실은 가히 세계 제일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공원, 운동장, 공공시설 등 어디를 가도 남ㆍ여 화장실, 양변기ㆍ화식변기, 어린이용, 장애인용 등이 구분되어 있고, 벽면의 액자까지 갖추고 있다. 또한 ‘이동식화장실’에도 냉ㆍ난방기, 핸드드라이어기, 물비누, 위생시트까지 비치하고 있는 곳이 늘고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엔 샤워실과 세면실, 사물함 등을 볼 수도 있다.

최근에 대만의 한 공영방송이 우리나라의 화장실 문화를 탐방 보도한 프로그램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 방송은 “한국의 화장실은 위생안전을 넘어 미관과 창의까지 ….” 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의 소박한 욕심은 위생적인 시설에다 무료(?)로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독일을 비롯한 서구가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한 시설로 우리를 앞섰지만 이제는 시설도 인심도 결코 우리를 앞설 수 없게 되었다. 이 자부심이 빨리 다른 분야에까지 확산되길 염원해본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9월 118호

현대인의 도피의식

현대인은 근로방식만 다를 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로활동을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근로자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근로의 정신적·도덕적 가치를 높게 평가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근로의 고귀한 목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산업사회의 근로자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그들이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원하지도 않는 시간에 과중한 근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80·90년대에는 근로조건의 개선이나 사회 복지제도의 개선으로 삶의 질적 향상에 따른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89년의 IMF 이후로 이것마저도 잃었다. 그런가 하면 근로자의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마치 고아처럼 성장하면서 일찍부터 소외의식을 맛보게 된다. 근로자들은 여관이나 하숙의 떠돌이 나그네와 다를 바 없다. 각박한 도시생활에서의 이방인이다. 근로자들은 과중하고도 재미없는 기계적인 노동을 하고 나면 기분전환과 휴식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직장에서 사고를 하지 않는 습성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주어지는 여가조차도 자가수양을 위한 독서나 다른 사람들과의 진지한 교재를 하는데 선용하지 않고, 완전히 무위의 자기도피를 일삼는다. 때로는 과음과식을 한다든지 오락에 탐닉하곤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호기심이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외설 잡지나 비디오 영화 등을 본다. 그렇지 않으면 TV나 스포츠 오락물에 자기를 숫제 맡겨 버린다. 그래서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마침내 정신적 공허감에 빠지게 되고 여기에 소비경향을 부채질하는 매스컴은 인간을 황금이라는 유령의 노예로 전락하도록 촉진시킨다.

아무튼 현대는 날이 갈수록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중독자와 짐승보다 못한 성범죄자가 증가일로에 있다. 특히 정년퇴직을 한 근로자들은 핵가족화가 이루어진 후 더욱 심한 소외의식으로 고통받으며 노년을 살아간다. 오늘날 노인들은 사회나 가정에서도 완전히 버림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오늘날 근로자들은 소외의식 속에 살며, 이들의 삶은 아미노 현상 속에서 침잠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들은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윤리적인 자기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 자기 상실 속에서 망연자실한 채로 소외의식과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자기 위치를 돌이켜 보고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고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고의로 자기반성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사회로부터 도피하거나 숨어버리고 싶어한다.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자기소외와 자기상실감 속에서 자포자기하고 말 것인가.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온갖 지혜와 정성을 다해서 이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기술발달의 부작용과 인류문명의 몰락과 하강으로부터의 재건은 이제 과학적·기술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종교적 차원에서 실존적인 결단만으로 가능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하 慧頂 글/ 월간반야 2002년 12월 (제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