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선진국에서 그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한다. 한 사람의 사회적 명예와 권력과 부(富)가 높고 강하고 많을수록 그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나 사회적 헌신의 필요성은 비례해서 늘어난다는 것이다. 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달 5월은 가정의 달이었다. ‘어린이날’에다 ‘어버이날’이 있었고, ‘성년의날’이 있었는가 하면 ‘부부의 날’이 있었다. 여기에다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탄신일’까지 겹쳤었다.

그 한 달 동안에 가장 괴로웠던 부모와 자식 중의 한 사람은 아마 한화그룹의 김모 회장과 그 둘째 아들이었을 것이다. ‘별 두 개 달린 모자를 쓰고 가죽장갑을 낀 채 150센티미터 짜리 쇠파이프를 휘둘렀다’고 보복 폭행 당한 술집 종업원들이 경찰에서 진술했다고 한다. 그의 옆에는 몽둥이와 전기충격기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조직폭력배처럼 도열해 있었다고 한다. 좀 에누리해서 보아도 우리나라의 재계 순위 9위에다 33개 계열기업에 2만 5천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재벌그룹 총수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세계 제1ㆍ2차 대전에서 영국의 고위층 자제들이 주로 다닌다는 ‘이튼스쿨’ 출신자만 2천 여명이 전사했는데 이 숫자는 노동자나 일반인들 자녀들의 희생자의 몇 배나 된다고 한다. 또한 워터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치고 개선한 윌링턴 장군은 승리의 영광을 자기의 모교인 ‘이튼스쿨’의 운동장에 바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영국의 고위층 귀족 자제들은 이튼스쿨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배웠던 것이다.

오늘의 초강대국 미국이 있기까지에도 역시 자본주의의 부를 앞세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본받을 만 하였다. ‘US스틸’의 철강왕 ‘카네기’는 축적된 부로 ‘카네기재단’을 설립(1911년)하여 당시 돈으로 자그마치 5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고, 그가 지어 사회에 헌납한 도서관만도 2천5백 개에 달했다고 한다. 석유왕 ‘록펠러’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혐오스런 인물의 대명사였지만 ‘록펠러재단’으로 자선사업을 시작한 후로 가문 자체가 자선의 명가로 대대로 칭송 받고 있지 않은가. 미디어왕 ‘테드 터너’도 1998년에는 자기 재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30억 달러를 유엔에 출연하였는가 하면 원래 자선에 관심이 없었던 ‘빌 게이츠’에게 구제의 기쁨을 가르쳐 준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스승인 ‘테드 터너’의 선행에 감동받은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비영리재단 ‘빌멜린다 게이츠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수십억 달러를 아프리카의 말라리아 퇴치운동에 쏟아 붓고 있으며, 미국 내 소수민족 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한 액수만도 5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독과점이 도마에 올랐을 때 사람들이 그를 욕심 많은 기업가보다는 기부왕으로 평가했던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선조 중에는 정말 품위를 갖춘 선비들이 많았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신 분들이 부지기수였다. 미국의 청부(淸富)들도 대단하지만 우리 역사 속의 청백리(淸白吏)들은 더 존경받아야 한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려면 희생ㆍ절제ㆍ봉사가 따라야 한다. 오늘날 우리네 대기업처럼 도덕성이 결여된 부귀의 세습은 결코 존경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부(富)’보다는 ‘귀(貴)’를 중시하는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얼마 전 2551번째 생신을 맞으신 인류의 영원한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생전에 무엇을 얼마나 지니셨고, 열반 후 무엇을 남기셨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김형춘 향암 (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6월 제79호

평화의 음미

전쟁과 평화는 반대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전쟁상황에 처해 있는가. 어느 상황까지가 전쟁이고 어느 상황까지가 평화인가. 이즈음 한반도는 이라크와 더불어 온 지구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먹구름은 좀처럼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잇는데 오히려 이라크전이 터질 경우 북한의 오판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미국이 한반도 주변으로 병력을 이동 배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

거기에다 나라 안은 대통령 선거와 정권 교체기를 맞아 어수선할 대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아주 껄끄러워져 있다. 한국내의 반미 시위와 미국내의 반한 분위기 등이 맞물리면서 한ㆍ미관계는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그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다. 우리 정부나 언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미국 내에서 일고 있는 주한미군 철수론이 한반도에 가져올 파장을 생각한다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심각하게 대응논리를 찾고 대처해야 할 것인데도 우리는 그 실상도 모른 채 태평이다.

오래 전 외국잡지에서 인용한 글 가운데 ‘지구상에서 한국인만큼 간이 큰 민족은 없다’는 글을 읽었다. 현재 남북한을 합치면 한반도에 쌓여 있는 재래식 무기만 하더라도 지구 전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정도의 화력인데 이 화약고 위에서 태연히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을 보면 가장 간이 큰 민족임에 틀림없다는 말이다. 이 재래식 무기에다 미사일을 보태고, 핵을 더하고, 생화학무기까지 있으니 소심한 민족이라면 한반도 전체에다 철조망을 둘러치고 ‘접근금지’ 팻말을 곳곳에 붙여놓고 중무장한 군경들로 하여금 철통같은 경계를 서게 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전쟁이든 평화든 상황을 사실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렸을까. 왜 우리의 감각은 이다지도 무디어졌을까. 우리나라의 시나 군 단위의 자치단체마다 ‘충혼탑’이 세워져 있지 아니한 곳이 있는가. 우리 산하의 곳곳에 서 있는 ‘전적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곳저곳에 서 있는 ‘전쟁기념관’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6.25 때에 우리나라에 와서 피흘린 외국인들의 ‘참전기념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작동이나 대전의 국립묘지를 지나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 참혹한 전쟁을 겪은 지 불과 50년인데. 보훈병원에서 신음하는 전상자들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누리는 평화스런 분위기는 진정한 평화인가.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진정 어떠한 것인가. 뒤늦게나마 한반도의 반전, 반핵, 평화를 호소하는 평화행진을 보면서 자라나는 세대ㆍ후손들이 걱정스럽다.

김형춘 香巖 글/ 월간반야 2003년 2월 (제27호)

테러와 보복

요즘 우리는 일찍이 인류역사에서 찾아보지 못했던 치밀하면서도 대담했던 그래서 그 피해가 전쟁에 버금할 정도인 테러참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테러가 지구촌 자본주주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와 초강대국으로 세계의 경찰를 자처하는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펜타곤에 가해졌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달리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의 해석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의 충돌’이다. 야만에 의한 문명의 파괴다. 야성에 의한 지성의 파괴다.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의 표출이다. 특정 종교의 극단주의적 소행이다. 사회적 동물의 자살 공격이라는 등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문제는 왜 이들이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문명의 충돌’로 바람을 일으킨 저자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고 독일의 한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전쟁과 테러들의 인간 살상 행위는 탐진치(貪瞋痴) 삼독의 전형적인 표현인 것만은 틀림없다. 자기든 종족이든 특정 종교를 위함이든 간에 그들의 순수하지 못한 야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고, 대중의 증오와 선동에 휘말린 분노의 표현이자, 무지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또한 이들이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왜 저질렀느냐 하는 것과, 왜 하필 미국이라는 대형(大兄)의 나라가 공격을 받고 양키의 코가 납작해질 정도로 자존심의 손상을 입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죽음으로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었는가. 자신들의 종교의 포교에 도움이 되었던가. 자신과 동료들의 죽음 뒤에 다만 더 많은 적과 불특정 다수를 죽였다는 산술적 계산에 만족하는가. 그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것인가. 이제부터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보복을 통해 자기 동료들의 무참한 희생은 어떻게 계산되어야 하는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미국 또한 그들의 방어망과 자존심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이유에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가진 자의 오만과 횡포’가 낳은 당연한 귀결(?)로 보려는 시각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지. 행여나 전세계를 무대로 자국의 이익만을 탐하지는 않았는지. 세계 테러의 진원지인 이슬람을 상대로 몹쓸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이슬람인들이 종교나 인종, 민족문제를 고민할 때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두둔하지나 않았는지. 여차하면 힘으로 무력으로 약소민족·국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나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 이슬람인들도 ‘이슬람’의 어원대로 평화와 신에 대한 복종, 평화의 추구와 비폭력 절충과 화해를 강조하여 인간의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살의와 증오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전 세계인들도 모든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 세상을 만들기에 고민해야 한다. 모두가 탐진치 삼독을 버리고, 인간에 대한 존엄과 신뢰와 사랑을 갖도록 중생제도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10월 (제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