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스님─그렇지 스님

“그렇지 스님”

-성수스님-

경북 태백산 동암에는 열 여덟 조사가 나온 대 명당이라 많은 수좌들이 좌선을 하고 있었으나 항상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 중의 한 스님은 늘 걸망을 지고 마을로 탁발을 다녔다.

(탁발 다닌)그 스님은 일평생 한 말이라고는 한마디 “그렇지..” 뿐이였다.

문전에 서서 있으면 어른이나, 아이나 ” 동냥 줄까요? ” 하면 ” 그렇지..

” 라는 대답 뿐이였다.

남녀,노소,고하를 막론하고 주거나, 물으면..” 그렇지..”할 따름 이였다.

하루는 짓궂은 농부가 물이 가득찬 논에서 벼를 베다가 “이 벼 한 단 져다가 부처님께 공양 올려 달라”고 농담으로 말했다.

스님의 “그러지…”라는 대답에 농부는 볏단을 일부러 크게 묶어서 무논에다 둥글둥글 굴려 물을 흠뻑 적셔 논둑에다 내어 주었다.

스님은 “그렇지..”하고는 태백산 동암까지 하루 온종일 지고 올라갔다.

그때부터 스님을 천진불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한 스님도 탁발을 하여 절에 왔을 때 대중들이 조용히 공부하고 있으면 공부하는 방 앞에서 합장 배려했지만 만약 문 밖에 이야기 소리가 들리면 걸망을 큰방 앞에다 힘껏 던지고는 큰 한 숨을 쉬곤 하였다 한다.

일생동안 그렇게 탁발하여 대다가 하루는 대중 스님 모두 모이라 하고는 평생 처음 입을 열되,,, “이 우치한 산승을 도솔천 내원궁에서 부르니 하는 수 없이 대중시봉을 더 못하고 가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열반에 드니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한다.

스님은 일생동안 “그러지..”란 말로 보내며 평생 좌복에는 한번도 앉을 여가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 사부대중도 이런 훌륭한 도인 스님의 행적을 거울삼아 말없이 행동으로 근본을 삼고 수행과 덕을 쌓아야 한다.

우리 소인배들은 행(行)은 외면하고 말이 앞서니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

말 이전에 실천하기로 다 같이 노력하자.

무비스님─ 삶의 길을 물었더니

[삶의 길을 물었더니]

무비(無比) 큰스님

“진정한 불법이란 무엇인가, 요게 제 화두이지요.”

범어사 염화실(拈花室), 무비(無比) 스님은 선방시절을 회고하다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린 듯 한마디를 툭 던진다. 사실 늘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상식적인 물음이어서 정작 잊어버리곤 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어줍잖은 생각이 은연중 고개를 쳐들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수좌시절 스님의 화두는 그것이 아니다. 그 자문은 반세기 가까운 정진의 결실이 스며든 ‘무비식 화두’라고 할 수 있겠다. 무비 스님이 누구던가. 절집에서 첫 손꼽히는 강백(講伯)이 아니던가. 궁금증이 턱밑까지 파고들었지만 서둘러 묻는 행위는 도리가 아닐 듯 싶었다. 답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미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뿐. 뒤늦게 찾은 답은 실천의 문제로 다가왔다.

예부터 호국의 산으로 불리는 부산 금정산을 굽이돌아, ‘금빛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범어사(梵魚寺)를 찾아가는 동안 투기(投機)의 기연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스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의기투합의 기쁨을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기대로 그치고 말았다.

세속의 지식과 상식이 장애로 작용한 것이다. 투기라니.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기연이 투기인데, 그 숭고한 의미는 이 땅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고작 ‘부동산투기’처럼 망국적 병폐의 의미로 쓰일 뿐이니.

절집에는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의 고사가 전해온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행하라’는 뜻이다. 지극히 평범한 말이되 평범의 껍질을 벗겨내면 진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중국 당나라 시대 선의 달인 조과(鳥?)선사와 시의 천재 백낙천(白樂天)의 만남에서 회자(膾炙)된 게송이다. 둘이 나눴던 선문답의 일부를 옮겨보면 이렇다.

“무엇이 불법의 도리입니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행을 하는 것이라네.”

“세 살 먹은 아이라도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실망의 화살이 조과를 향해 날아왔지만, 그 화살이 도리어 백낙천의 오만과 아집을 산산조각내는 보검이 될 줄이야.

“세 살 먹은 아이도 말은 할 수 있겠으나, 여든 먹은 노인도 행하지 못함을 그대는 아는가!”

종교의 생명은 실천에 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그럼

무비스님

의 회향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인불사상(人佛思想)과 무아(無我)를 두 바퀴로 법륜을 굴려 세상에 다가간다.

인불사상은 사람이 곧 부처라는 스님의 지론이다.

무아란 ‘나는 없다’는 비움의 실천이다.

“그 동안 공부한 바로는 ‘사람이 부처님이 아닐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이며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뒤집어보면 사람이 곧 부처님이라는 거지요.

그러니 서로를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행복합니다.

남도 행복해집니다.”

이어진 말이 웃음을 자아낸다.

“이 말을 듣는 분들은 ‘중다운 얘기’라고 할지 모르지요.

허나 중이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세상에는 살인자나 범죄자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는데 그들마저 부처로 섬기라니.

아무리 스님이라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대뜸 그런 반론이 쏟아질 것 같다.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운 게 아니지요.

사람은 어떤 인연 또는 조건에 의해 잘못을 저지르는 겁니다.

한 번의 잘못을 마치 그 사람의 본 모습인 양 영원히 살인자, 범죄자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갈등과 대립이 끊이질 않고 범죄 없는 날이 없을까.

사람에게는 부처와 악마의 마음이 함께 갖춰져 있는 것일까.

“마음의 바탕은 선과 악도 아닙니다.

갓 태어난 생명의 마음은 티 한 점 없는 백지나 다름 없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마음이라는 화가가 그 안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겁니다.

선과 악은 인연에 따라 일어날 뿐이지요.

환경이 마음을 움직여 선과 악의 인연을 부릅니다.

마음이 거울처럼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사는 사회일 것입니다.

선한 마음이 많으면 그 사회는 백화로 장엄한 정토가 될 것이고, 악한 마음이 득세하면 이전투구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무아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그 무엇인가.

잠시라도 나를 놓는다는 것이 세상살이에 얼마나 손해를 가져오는데.

그러나 스님의 설명은 걸림이 없다.

무아는 나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본래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마련이다.

‘작은 나’에 매달리는 평범한 삶이다.

무아의 참뜻은 잠시라도 나를 잊고 이웃을 향해 눈을 돌리는 삶이다.

그것이 ‘큰 나’를 추구하는 삶의 길이다.

집착을 버릴 때 삶은 가벼워진다.

가볍다는 말은 무게를 저울질하는 세속적 표현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날아갈듯한, 걸림이 없는 기쁨을 말한다.

“삶은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기대와 희망을 癰奮求째?세상살이가 아닌가요.

그럴 때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요.

물질적인 가치를 최고의 기준으로 삼는 삶에선 만족이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탐욕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방법은 없으니까.

문제의 해결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줄여나가는데 있지요.”

스님은 하나의 화두를 내놓는다.

정직, 두 글자다.

삶의 모습을, 삶의 내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우리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말이라고 부연하면서.

정직이 실종된 사회는 구석구석이 부족해진다.

그 화두를 타파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부귀영화는 삶의 군더더기에 불과합니다.

비할 데 없는 보배를 지니고도 우리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 부귀영화에 집착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데서 불행의 싹이 자랍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저승길에는 동전 한 닢 넣어 가져갈 공간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통째로 버리고 가는데 생명보다 아까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깨달음의 도량이 어디메뇨

지금 이 세상 바로 여기라네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고 있는 해인사의 장경각 앞 뜰 표석에 새겨진, 스님이 좋아하는 게송이다.

원각도량은 깨달음이 충만한 이상향의 세계다.

그 이상향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인 것이다.

삶의 모습을 이토록 꾸밈없이 그려낸 그 게송에 우리의 마음을 살며시 담가보자.

지운스님─기도의 원리를 알고 기도합시다

기도의 원리를 알고 기도합시다 –

지운스님

(동화사 강주) – 1.

기도는 수행이 아니다.

요즈음 기도를 수행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와 수행은 염연히 그 성격이 다릅니다.

기도와 수행은 상보적이며 서로 병행할 수 있지만 수행이 기도이고 기도가 수행일 수 없습니다.

기도는 수행해 갈 때 마장을 만나거나 수행의 진전이 없을 때 불보살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기도가 그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기도로서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에게 부처되게 해달라고 기도드린다면 성취가 가능할까요? 기도는 단지 불보살을 신앙하는데 그칠 뿐입니다.

깨달음은 진리가 하나인줄 모르는 무지, 그리고 그 무지에서 파생하는 갖가지 번뇌를 타파해야 되는데 기도는 이 무명을 타파할 수 있는 기능이 없습니다.

무지는 내적 관찰이 필요하지만 기도에는 이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밖으로 불보살을 믿는 신앙(信仰)이 그 하나이고 내안에 부처의 성품이 있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신심(信心)이 또 하나의 믿음입니다.

기도는 신앙적 측면이 강하다면 신심은 수행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업(行)을 닦는다(修)는 뜻입니다.

행이란 조건 지어진 모든 것, 또는 형성시키는 힘, 즉 업을 말합니다.

업에는 생각과 말과 행위의 세 가지가 있는데 생각은 업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즉 맹목적이고 선악의 윤리적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각이 반드시 행위로 이어지고 결과를 가져옵니다.

즉 한 생각이 윤리적이라면 그 생각에 이어 행위로 이어지고 숨넘어가는 순간에 일어나는 생각의 성격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래 없던 것을 만들어 실제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은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업은 자기 반성적이거나 반조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각 없이 대상에 반응하는 데로 의미부여하거나 다른 것과 결부시켜 감정과 생각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합니다.

특히 분노 우울 불안초조 억압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 속에 빠져들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즉 창조적 삶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업의 진행을 중지시키고 감정과 생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그 본질을 꿰뚫어보는 방법은 기도에는 없습니다.

이는 수행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상중하로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불보살님께 기도하여 불보살님의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현세이익적인 기도로서 일반적입니다만 이는 하급정도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불교신앙만이 아니라 주로 민간신앙과 기능신앙이고 기도사(祈禱師)와 산복(山伏)에 의해 행해지는 악마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며 병을 치료하는 것 등에 이용됩니다.

사례를 들자면 잘 아는 도반스님에게 전화 한 통화를 받았습니다.

내용인즉슨 불전에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든 보살이 어느 날부터 절에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도 궁금해서 그 신도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제 절에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불보살님에게 그렇게 기도드리고 공양올리고 했는데 어떻게 우리 큰 아들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반이 저에게 하는 말이 만일 그 신도가 무상(無常)이라는 진리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러한 미신적 기도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교리강좌를 열어야겠다고 저에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앞의 예는 보편적으로 절에서 신도들도 하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불법학습이 되어 있지 않는 기도는 매우 위험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도하면서 뭔가 보이기를 바라고 꿈에 무엇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기도는 기도의 참뜻을 왜곡하고 미신으로 빠질 수 있는 기도입니다.

왜 기도가 필요하고 기도의 원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모든 것은 법문과 그리고 경전과 논서 공부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배워야합니다.

특히 수행과 혼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불법학습이 필수적이며 기도와 수행의 상호관련 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불교 기도의 특성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수행이 들어가 있는 기도가 불교적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죄를 참회하여 죄를 소멸하고 불보살님께 감사 보은 찬탄하는 등의 비공리적(非公利的)인 기도가 있습니다.

더러운 옷은 염색이 잘되지 않지만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염색을 하면 그 옷에 염색이 잘되듯이 기도도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면서 기도한다면 불보살님과의 감응이 빠르고 소원성취도 빠를 수 있습니다.

이 기도의 특징은 밖으로 불보살과 연결시키는 기도의 매개체로 안으로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참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보살님과의 감응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것이 중급수순의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고 불보살님의 명호를 반복적으로 외우고 부르는 방법은 이를 기도라고 하기 보다는 염불이라고 합니다.

염주 알을 굴리면서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 방법에는 수행이 들어가 있습니다.

염불을 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고요함과 편안함이 옵니다.

이 선정의 깊이에 따라 아미타정토의 경우에는 하품 , 중품, 상품의 연꽃에서 화생하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생들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기원해주는 기도야말로 최상의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수행과 관련되는 기도의 원리를 이야기하겠습니다.

2.

기도의 원리를 알고 기도합시다 기도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단지 복만을 비는 기도와 불법학습을 통해 수행과 연결시켜 기도하는 기도입니다.

제대로 기도하려면 불법학습이 필요하며 부처님가르침은 수행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기도했을 때 그 기도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선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고 기도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일 기도가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굳이 불교교리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느 종교든, 심지어 무속(巫俗)이나 아무종교도 가지지 않는 사람도 기도합니다.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원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초심학인문』에서 보조국사는 ‘능례소례能禮所禮는 진성연기眞性緣起한다’라고 설하십니다.

기도하는 자와 기도받는 불보살님은 참 성품이 연기한다는 말입니다.

연기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입니다.

이 연기의 뜻을 잘 이해했을 때 기도의 의미도 명확해 집니다.

연기라는 뜻은 상호의존을 말합니다.

즉 모든 존재는 그물과 같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생명은 다른 이의 생명에 의존해서 존재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상호소통임을 말합니다.

이 연기의 진리는 곧 기도하는 이와 기도를 받는 불보살님은 본래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마치 전화기를 드는 순간 전화선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과 같이 기도드리는 순간 불보살님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본래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떠한 매개체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기도에서의 의사 전달은 완전히 시공을 초월합니다.

또한 그 결과는 즉각적이므로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결의 이치를 잘 알아야 하고, 기도드리더라도 이 이치대로 실행해서 기도성취하려면 수행방법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아야만 됩니다.

왜냐하면 연기의 이치는 알아차림을 통해 반야가 계발될 때 비로소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에서는 기도하는 자와 불보살간의 관계소통이 이루어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게 하는 원리입니다.

기도 하는 자와 기도 받는 불보살의 연결이 연기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오느냐 아니냐는 이 연기라는 진리에 의해 결정됩니다.

연기의 진리가 아닌 절대적 실체로서 진리를 말한다면 기도의 응답이 있을까요? 만일 절대적 타자로서 神에게 기도를 한다면 기도의 감응이 있을까요? 그 신이 절대자로서 불멸의 실체라면 그 신에게 기도를 드리면 기도의 성취가 이루어질까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불멸의 실체로서 절대자라면 첫째는 다른 것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에 의해서 신에게 기도를 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다.

만일 기도의 응답이 있다면 관계를 가지는 것이 됨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변하는 존재이므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불변의 존재이면서 기도자와 감응을 한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합니다.

불변과 상호관계의 변화는 상반되기 때문에 모순입니다.

반면 불보살님과의 감응은 어떨까요? 불보살님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즉, 실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허공같이 비어있습니다.

허공같이 비어있기에 가고 옴이 없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불멸입니다.

하지만 허공같이 비어 있음은 마치 골짜기가 비어있기 때문에 메아리가 되돌아오듯이, 달리 말하자면 금은 사람들의 주문에 따라서 시공자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누런 금의 성품이 바뀌지 않음과 같이 중생들의 기도에 응답합니다.

이와 같이 기도의 응답은 연기라는 진리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불멸의 신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아서 연기의 진리가 아니며 당연이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의 원리는 연기의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는 현상의 측면으로 상호 관계성이며,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입니다.

또 하나는 변화하는 낱낱은 그 자체로는 자아와 실체가 없는 관계로 맺어진 변화이지만, 낱낱이 상호 관계하는 전체의 장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변화없이 상주하는 법계입니다.

이 두 측면은 본래 하나입니다.

곧 낱낱의 변화는 그 자체로 전체성에서의 연기이므로 무변화이며 전체성의 무변화는 낱낱의 변화 자체가 전체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기법을 깨쳐 연기법 그 자체인 부처님은 열반에 드신 법신(法身) 상태에서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을 내어 중생을 구제하시듯이 연기의 진리대로 현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기법의 이러한 두 측면은 기도의 원리이자 존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수행의 원리입니다.

연기의 이러한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기도라면 어떻게 기도해야 진리가 드러나고 그 진리를 타고 (能禮所禮眞性緣起) 기도의 응답이 있을까요? 바로 알아차림과 자비심 그리고 보시행이 필요합니다.

기도자와 불보살님과의 상호소통이 이루어짐이 이어져 있어야 함은 곧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망각해버리면 기도라는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음은 바로 기도자와 기도를 받는 불보살님과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연기의 이치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다른 경계로 달려가는 마음을 안으로 챙기게 되며(집중) 모든 생명은 그물과 같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이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생기면서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심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과거를 생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몸은 현재에 있어도 마음은 현재에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통해 마음이 ‘지금, 여기’에 존재할 때 기도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며 기도할 때 마음챙김이 절로 이루어져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불보살님과 감응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부족하면 아무리 용을 써도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으면 누가 이 자리에서 기도를 하겠습니까? 이 알아차림과 마음챙김, 그리고 통찰의 지혜가 생기면서 의식이 깨어나는데 이때 바로 기도하는 사람과 불보살님, 그리고 모든 생명이 기도로 연결됨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곧 반야지혜의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이러한 통찰로부터 기도가 나올 때, 그 기도에는 사랑과 연민심이 실리게 되며 자기 몸의 안위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도 진정으로 필요한 최상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통해 반야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 기도는 자비심을 담고 있지 않아, 단지 자신의 부귀영달만을 바라는 미신적인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단지 복만을 비는 기도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빌어서 될 것이 있고 될 수 없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불보살님께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난 열반을 얻게 해달라는 것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바로 연기의 두 가지 측면인 변하는 현상계는 위빠사나관으로, 불변의 측면은 사마타관으로 수행하여 연기의 진리를 깨칠 때 비로소 생사가 없는 불생불멸의 열반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연기의 이치를 알아 기도하는 것은 수행과 연관되는 기도로서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고 생사가 없음을 아는 깨달음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단지 복만을 비는 것은 수행과의 차이점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기도의 효과가 즉각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어떤 이치일까요? 그리고 보시행이 기도에 왜 필요할까요? 3.

기도의 효험과 기도로 안되는 것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기도의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리고 보시행은 기도에 왜 필요할까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거나 그 효과가 즉각 나타나지 않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기도하는 마음에는 정성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흔히 기도하는 분들이 범하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기도 중에 무엇이 나타나기를 바라거나 꿈에 무언가 보이기를 바라는 의도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은 바라는 마음을 낸 순간 그 의도에 딱 맞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다른 것과 결부시키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곧 영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례를 들어보면 오행생식이란 말을 들어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음식을 오행에 맞추어서 생식하는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어느 목사님이 찾아와서 본인은 기도만 드리면 예수님과 여러 성인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기도를 했느냐를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여러 날 동안 기도를 드리면 본인이 의도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다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을 찾으면 부처님, 관세음보살을 찾으면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형상으로 무언가 보이고 들리는 것은 모두 자신이 만들어 보고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바라거나 무언가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기도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순수하게 기도해야 기도의 성취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기도를 할 때 기도드리는 순간순간 기도를 하고 있다는 알아차림을 하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알아차림이 미리 바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보시행을 겸해야 기도의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보시행이란 곧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무소유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는 음덕을 쌓는 것으로 음덕이란 남몰래 선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와 나의 관계를 소통시키며 기도하는 자와 기도받는자의 감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기도드리는 마음은 무소유이며 순수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20여년이 넘은 이야기입니다.

대구 서야동에 대성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관음전에 아침저녁으로 지극정성으로 기도드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는데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음보살님께 매달려보자는 심정으로 일념으로 관음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두 부부가 손을 잡고 길을 가는데 저 앞에서 누덕누덕 기워 입은 승복차림의 스님이 오시더니 ‘보살님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보시를 하시지요’ 며 지나가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불자는 주머니에 100원짜리 동전만 서너 개 있어 이걸 어떻게 스님께 드릴 수 있냐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치다가 그래도

하는 마음에 그 동전을 스님께 보시를 했답니다.

그때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살님의 심정을 잘 압니다.

하고는 약방문을 일러 줄 터이니 받아 적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방문을 받고 꿈에서 깨었는데 부부가 동시에 그 꿈을 꾼 것입니다.

부부는 신기해 하며 그 약을 지어먹었는데 암이 완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기도의 효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꿈속의 스님은 다름 아닌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삼십이응신으로 나투신다고 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이 분은 기도를 할 때 미리 나타나기를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정성을 드린 것뿐입니다.

누구든지 위급할 때는 마음이 순수해지니까요.

그리고 적은 액수이지만 꿈속에서 동전을 보시함으로써 음덕을 쌓은 것이며 그 음덕의 힘에 의해 관세음보살님과 소통이 생기고 감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한 공덕을 일체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향하지 않으면 ‘내가 기도 성취를 했다’든지 ‘기도만이 최고라든지’ 하는 자만과 아집에 빠집니다.

이것이 연기緣起의 이치입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선인선과 악인악과(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인과법칙을 잘 알고 믿고 있으면 기도의 효험과 관련하여 미혹이 생기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로 되지 않는 것 하나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게 해달라거나 부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천만년 흘러도 불가능합니다.

이는 기도의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심에서 오는 것이며 생사문제는 불생불멸의 불성을 믿는 신심에서 촉발되는 수행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효험을 수행의 결과로 보거나 그 성취가 삶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기도는 수행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 중에 마구니의 장난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으려면 불보살님께 기도하여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