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운스님─죽음 앞에서도 신심 변치 않을 이 얼마나 되는가

죽음 앞에서도 신심 변치 않을 이 얼마나 되는가

-월운스님-

부처님 법은 저절로 펴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이 잘 펴지도록 돕는 이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성도 후 제일 먼저 만난 이가

법을 전하는 제자가 아니라 장자였습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겠지만 시멘트 바닥 위에서 꽃이 피는 것은 아닙니다.

시멘트 마당 위에 흙이라도 한줌 뿌리고 씨앗을 심어야 꽃이 피는 법입니다.

우리 삶에서는 이런 노력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이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해서 세제법으로 몰아버리곤 합니다.

요즘 우리 교단에서는 세제와 진제를 양분하는 나쁜 풍습이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세제란 세속적인 이야기고 진제란 깨달은 이야기를 뜻합니다.

요즘엔 세속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고 깨달은 이야기만 하자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실 때까지 고행하고 수행하고 공양 받은

이 모든 과정이 따지고 보면 세제입니다.

진제는 깨달음을 얻으신 그 이후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을 잘라 버리면 진제도 있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비가 오고 덥기도 하고 천둥번개도 치듯이

온 자연이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경시하고 결과론만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은

내가 생각하기엔 건전한 사고방식은 아닙니다.

결과는 원인 안에 있습니다.

나는 출가할 때 불교를 알고 생사를 벗어나려고 부모형제를 끊어버리고,

뭐 이렇게 위대하게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 가난해 굶어죽게 생겨서 나 하나라도 살려고 출가를 했는데,

다행히 부처님 말씀을 만나고 보니 이렇게 좋구나 싶어 지금껏

중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중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허망만 갖고 사니

부담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목표를 세웠으면 노력을 해서

목표치 이상을 달성해야 합니다.

출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공통의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2000만 불자를 이야기 하는데 2000만이면 우리 국민의 절반입니다.

그런데 국민의 반을 가진 종교가 이렇게 비실비실해서 되겠느냐 이겁니다.

그럼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도를 깨달으시고 하신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당집 이야기나 교회 이야기보다 구수하지가 못해요.

신만 믿고 의지하면 되는 종교에서는 ‘신만 믿으면 뭐든 다 해결해준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뭐든 다 들어 주겠다’는 식으로 해주니

아주 편한데 부처님은 안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는데 그 방법은 자기의

착각에 벗어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가 건전한 사고, 건전한 생활을 해라’ 이것입니다.

이것을 ‘성불’이라고 하니 너무 거창해졌어요.

‘성불’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를 해 놓으니 벽두에 말씀 드렸듯이

그것이 목적이 되서 그리로 치우치는 허물이 생겼어요.

‘내가 성불을 목표로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시시한 이야기나 해서 되는가’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시한 이야기가 쌓이지 않고서는 성불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사소한 일상이 쌓이고 쌓여서 거기서 축적된 힘이 성불의 힘이 됩니다.

성불한다고 해서 어디 딴 세상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이 자리에서 그냥 성불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에 보면

‘내 마음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닦아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 했습니다.

즉 그냥 두면 녹이 쓰니 열심히 닦으라는 뜻입니다.

시커멓게 녹슨 구리거울 속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요소가 갖추어져 있으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나를 경책할 줄 알고 나를 길들여서

자신이 길들여진 사람을 성불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보살님은 절에 다니는 목표가 뭡니까”하고 물어보면

“목표가 뭐가 있어요, 그저 열심히 빌어 부처님 복 받으려는 것이지”하는 정도지

“나는 불교인으로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개념이 없어요.

불교의 목표는 자타일시성불도입니다.

축원할 때 꼭 자타일시 성불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쩌다 빠졌어요.

전해 오는 말에 인불언(人不言)이면 귀불지(鬼不知)라,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귀신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젊어서 결혼을 했는데 부인이 첫 아이를 낳다 그만 산고로 죽어버렸습니다.

옛날엔 첫 아이를 낳다 죽으면 귀신이 되서 남편을 잡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 이 남자가 고민이 되서 잠을 못잘 지경이었습니다.

어쩌다 잠이 들어도 귀신이 된 부인이 나타나서는 피를 뿌리며 괴롭혀 잠을 못 잤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살 수가 없어 이 사람이 죽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는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도력이 높아 보이는 노스님을 만났습니다.

젊은이가 보기에 그 노스님이라면 자기가 죽지 않고 살 방법을 알려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노스님이 말하기를 살고 싶으면 내 말을 꼭 믿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그러겠다고 다짐을 하니, 노장은 나무해 와라, 불 때라, 청소해라, 밥하라며 온갖 일을 시켰습니다.

젊은이는 속으로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몸이 고단해 잠도 조금씩 잘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도 귀신이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다 보니 노스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믿고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스님이 젊은이에게 붉은 팥을 다섯 개를 주며

“귀신에게 이것이 뭔지 아냐 물어 모른다하면 귀신에게 확 뿌려라,

하지만 안다면 다시 몇 개냐고 물어본 후 또 모른다고 하면

귀신에게 이 팥을 던지면 귀신이 사라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그날 밤 잠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그래 귀신에게 이게 뭐냐 물었더니 팥이라고 딱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몇 개냐고 물었더니 다섯 개라고 척척 맞추는 것입니다.

결국 그날 밤 귀신을 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다음 날에 팥알 몇 개를 더 갖고 잤는데 귀신이 또 척척 맞춰 실패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스님이 “그 귀신이 개수를 척척 맞추는 이번엔 아예 세보지도 말고

그냥 한 움큼 집어 갖고 있어봐라” 했습니다.

그날 밤 역시나 그 귀신이 또 나타났는데 몇 개냐고 물어봤더니

이번엔 귀신이 ‘모르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 팥을 귀신에게 확 던지니 마침내 그 형상이 사라지고

젊은이는 오랜 만에 편한 잠을 실컷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왜 몇 개인지 몰랐을까요.

노스님 말씀하시길 “사람이 다 만든 것이지, 죽은 귀신이 뭘 알겠느냐.”

사람이 아니 귀신도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숨이 멈추었더라도 듣는 기능이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해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염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해주어야지 염불 소리와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면 중음신은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염불을 하면서도 부모님은 왜 재산을 나 안주셨나,

동생이랑 나눠가져라 하시니 속이 상한다는 둥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부모님 영가가 그 말씀을 듣고는 극락 갈래야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님 영가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뭘까요.

저 철없는 자식이 철드는 것을 봐야 마음 편히 갈 길을 가겠는데

어린아이를 우물가에 내놓은 것 같으니 극락이 아무리 좋다 해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칠월 백중에 부모님 천도하려는 마음만큼만 평소에 부모님 생각을 하면서

순간순간을 살고,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을 부모가 보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무렇게나 행동하며 살 수 없겠지요.

그러면 천도가 다 된 것입니다.

절에 가 법문을 듣는 것도 내가 그 생각을 똑바로 알고 있는가,

그 훈련이 잘 돼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문(聞), 사(思), 수(修) 삼단계입니다.

듣고 생각하고 닦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기만 하려고 합니다.

법문을 듣고 내가 할 역할이 무엇인지는 생각을 안 해요.

지금까지 네 명의 대법사가 다녀가셨습니다.

그 법문을 다 들으셨는데 그 법문에서 무엇을 강조하셨는지 마음에 남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게 헛장사한 것입니다.

내게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술 끊게 약 달라는 사람도 있고 부적 써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술 끊는 약도 없고 술 끊는 부적도 없습니다.

제일 잘 듣는 약이 딱 하나 있는데 사람들이 믿질 않습니다.

바로 본인이 안 먹는 것입니다.

누가 술을 먹입니까, 먹으라고 협박을 합니까.

자기가 먹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를 용서하는데 너무 관대합니다.

남을 책망할 때는 면도칼 같으면서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너무 관대합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관불용침 사통거마(官不容針 私通車馬)’라 했습니다.

관법으로는 바늘도 안 들어가는데 사사로운 일에는 수레가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관대하지 말고 자기를 조여서 그것이 관습화되는 것이 힘입니다.

그 힘은 우리 몸에 들어있습니다.

그 힘이 우리 몸에 간직돼 있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 ‘다섯 가지 색수상행식이 공한 것을 비춰보는 힘이 일체고액을 건너게 해준다’ 했습니다.

즉 평소에 다진 힘, 정법으로 다져진 힘이

다시 과오를 저지르는 길로 가려는 것을 막아준다 이겁니다.

그 힘이 묶이고 묶여 교단적인 힘이 되서 불법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사회가 아름답게 되면 그것이 ‘자성불 타성불’인데,

불교는 지금 늙은 코끼리 같이 되서 잘못 가고 있어요.

기독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온지 100여년 만에 천주교 순교가 사태가 났습니다.

천주교 신자 150여 명을 잡아다 놓고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한다고 해서 죽음을 재촉했습니다.

나는 비록 이교도지만 그들의 거룩한 마음을 존경합니다.

그들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폭군이 나와서 여러분에게 불교 믿으면 죽이고

안 믿으면 살려주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선거 때만 되면 불교신자도 아닌 사람들이 불교인척 하며 그럴듯하게 말하면 표 다 찍어주지요? 이게 꼴이 뭡니까.

이렇게 된 것은 너무 오랜 세월동안

불교가 나 하나 즐기면 된다는 쪽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이 언제 어디서나 부처를 향한 마음에 날 비춰보고

그 말에 내가 복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오온이 다 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자기 부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이 이 말입니다.

건방지게 내가 부처인데 누구한테 불공을 하냐며 막가라는 말이 아니고

어디를 가든 내 자신이 부처니 자신의 본래 양심에 위배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힘이 다져지고 그런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화 돼 세상을 끌고나가는 힘이 됐더라면

우리가 오늘 할 역할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좋은 불법을 만났으면

내가 체험해서 남에게 이야기 할 정도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뜻을 같이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온 지 200년도 안되서 저렇게 큰 세력이 돼

나라를 지배할 정도가 됐는데 불교는 구경이나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법회가 경학 하는 사람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경학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딴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중생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해서 오늘 당장 부처되자는 것만 떠들 것이 아니라

부처되기 위해 해야 할 단초부터 풀어가자는 것이 교학입니다.

선학이 단도직입으로 꿈을 깨는 것이라면,

교학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꿈을 깨는 절차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꿈이 저절로 깨지는 것이니 무책임해도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교학적 해석입니다.

교와 선은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부처님과 내 말이 연결되서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점검해보세요.

누가 내 얼굴을 한 번 때릴 때도 내가 ‘관세음보살’하고 말할 수 있는지,

처음엔 되더라도 나중엔 잊어버려서 화를 내는데 깜빡 잊어버리는 모습이 보이면

내 마음에 부처님이 아직 자리 잡지 않았다, 불교의 신앙이 말로 끝나고 생각으로

끝났다, 나의 체질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조석예불을 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부처님을 잊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바쁜 시대에 108염불을 어떻게 하겠냐고 하겠지만,

그것을 아침에만 하지 말로 하루 세 번 이라도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에는 염불을 하세요.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부처님을 깜빡 잊어먹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지만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고 싶으면 언제나 부처님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놓지 않는 그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체크해봐야 합니다.

실천하고 노력해서 우리의 체질, 혈액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불교 신자가 됐으면 부처님의 말씀을 나에게도 이익이 되고

내가 하는 행동이 공업이 되서 사회 사람들 모두가 건전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것을 넓혀가는 운동으로 이어져서 꽃이 피었으면 합니다.

혼자만 갈 것이 아니라 같이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노력, 실천 속에 불교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을 명심해 주시면 이 사람 오늘 법문 한 것이 되고 공덕이 되겠지만 여러분이 말자취만 따라가다 헛갈리면 이 사람은 도리없이 망어를 지은 죄가 되니 저를 봐서라도 노력하세요.

‘나는 불제자다’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월운스님─온 우주를 가슴에 품은 사람에게선 향기가 난다

온 우주를 가슴에 품은 사람에게선 향기가 난다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 신행-지계-겸비해야 진정한 불자 사회단체 가입해 봉사활동도 적극

7월 3일 범어사에서 열린 제2회 범어사 지장 100일 기도 및 고승초청대법회 법문에서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은 ‘향기나는 불자’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월운 스님은 이 자리에서 “진정한 불자는 한 가지의 계율만이라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원력을 가져야 한다”며 “사회봉사 활동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월운 스님의 법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 주-여러분 절에 나오실 때 가족들이 “절에 열심히 다니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시면 어떻게 답하고 있습니까? 또 “절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부처임을 알게 하리라” 우리가 청법가를 할 때 “사자후를 하옵소서”라고 하는데 ‘사자후’가 무엇인지는 대략 아시지요? 사자가 아침에 일어날 때 “잘 잤다”며 기지개를 펴면서 ‘어흥’ 하기만 해도 다른 짐승이나 새들이 자다가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린다고 합니다.

왜 정신을 차릴까요? 잡혀 먹을까봐 그러는 거겠지요? 부처님 법문 역시 중생의 정신을 딱 차리게 만들어 주신다고 해서 사자후라고 하는데, 맨 처음 상당하셔서 중생들을 향해 옳은 말을 쏟아놓으셨다고 해서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는 ‘제1 사자후’라 이릅니다.

부처님의 ‘제1 사자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중생은 나와 똑같은 부처이건만 망상 집착 때문에 스스로가 부처 아닌 길로 가니 딱하도다.

내가 이제 방편을 써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게 하리라.”

이것만 가지고도 불교 얘기는 다 되었습니다.

첫째, 중생은 누구나 부처다.

둘째, 그런데 스스로의 망상 때문에 부처를 놓쳤다.

셋째, 그 망상에서 건져내는 방법을 부처님이 방편으로 일러주시겠다.

넷째,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게 하리라.

이 네 가지뿐입니다.

그래서 첫째와 둘째를 ‘미혹의 길’이라 하고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을 ‘깨달음의 길’이라 합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부처님 말씀에 믿음을 꽉 찍어놓고 부처님 말씀 안에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이것 하나도 쉽게 지켜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방송에도 나오는데 ‘나는 왜 승복을 벗고 목사가 되었나’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손주 입시기도를 했는데 세 번이나 떨어졌다’며 교회 나갔다는 말도 합니다.

애초에 아예 다른 곳으로 갈 사람들이 불문에 들어온 것입니다.

참된 불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원 들어주면 불자되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내가 이 문중에 왜 들어왔는가?’하는 자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절을 떠나기 전에 내가 진정 불자인가를 되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불교의 특징은 누구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내 업으로 윤회에 들었으니 내 힘으로 윤회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매일 고기를 한 상자씩 갖다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고기 잡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겁니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나의 행복을 내가 찾아내 내가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불제자들은 이 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한 생각만 정신 바짝 차리면 천년, 만년이 필요 없습니다.

아들 하나만 주시면 불교를 믿겠다, 내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불교 믿겠다 하는데 사실 한 가지 이뤄지면 또 하나 달라 하고, 또 하나 이뤄지면 다시 또 하나 달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부처님의 본질로 들어가서 내가 본래 부처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우주만물이 모두 내 것이니 더 이상 구할 것이 없구나! 우주를 한 아름에 품을 수 있는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가슴을 가진 사람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기에 내 삶은 물론 타인의 삶도 품에 안습니다.

이런 불자에게는 향기가 납니다.

구경각을 이룬 사람이 되라는 말 대신에 저는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향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신도님들이 부처님께 좋은 향을 올린다며 일본에서 만든 향을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 마음이야 갸륵하지만 사실 일본제 향과 부처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제 쓰지 말고 국산 향을 써서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사회과학 원칙에 맞습니다.

우리는 절을 하면서 몸뚱이를 바치고 향과 같은 물질을 바치지만 실제 부처님께 바쳐야 할 것은 몸뚱이와 향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욕심내는 마음을 접고 욕심을 안내면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마음 바쳐야 최고 공양 그런데 그 욕심 안 내는 마음 하나 내는 게 솔직히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향기 나는 사람이 되려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5계는 다 못 지킨다 해도 평생 이 계 하나만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원력을 세워보십시오.

우리는 자유분방함을 좋아하지만 기본을 깨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기본이 계입니다.

5계가 아니면 불자가 지켜야 할 도리 단 하나만이라도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신행 생활에 철저해야 합니다.

행주좌와의 화두는 들지 않는다 해도 하루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관세음 정진이라도 반드시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힘이 나옵니다.

정례적인 신행생활을 하지 않으면 언제 불교를 자신도 모르게 떠나게 될지 모릅니다.

물론 인연이 없다 하면 그만이라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승가도 이 문제에 나서겠지만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을 점검해 보려는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계정신과 신행생활을 말씀 드렸는데 여기에 한 가지 더 당부하고 싶습니다.

바로 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참여에 적극으로 나서라는 말입니다.

이 사회에는 참 어려운 일들이 많은데 우리 불교계는 거의 참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도님 조직이 앞장서고 절에서 지원만 해주면 기독교 못지않은 활동을 할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탄탄한 신도조직에 힘써야승가와 재가가 모두 한결같이 사회를 너무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사회단체 중 하나를 택해서 사회 발전에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도 복전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부모님께 예배하고, 세 번째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복전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다못해 아파트 단지 내 주민 중 고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상담이라도 해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은 불자 공동체 속에서 사회에 이바지 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불교 단체도 좋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실천하는 방법도 좋습니다.

끝으로 오늘 이 자리에 어렵게 올랐으니 저도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불자를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역경을 갈망했는데 아직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일이 모금하러 다닐 여력도 없습니다.

오늘 법문 들으신 불자님들만이라도 우체국에 가셔서 한 달에 천원만 입금될 수 있게 들어가게 해주세요.

천원이 적으면 이 천 원도 괜찮습니다.

부산지사=주영미 기자 [법보신문]에서

월운스님─불행도 이겨낼 수 있다면 福

월운스님

, 도선사 생전예수재서 법문 “불행도 이겨낼 수 있다면 福”

서울 도선사(주지 혜자스님)는 지난 7월29일부터 매주 토요일 병술년 생전예수재 및 고승 초청대법회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일 여섯번째 법회에서 법사로 초청된 봉선사 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