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스님─항상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십시요

항상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십시요 혜정큰스님 (법주사 회주) 오늘은 ‘인연’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우리 불교 교리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인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들여야만 하겠습니다. 불교는 어느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요, 마음을 찾아서 깨쳐가는 수행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마음’입니다. 이 마음 하나만을 주장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우리는 흔히 운명이다, 숙명이다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운명과 숙명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존재요, 우리는 그 속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늘 거기에 구속받고 거기서 시키는 대로 따라가야만 되는 운명적인 존재인가? 그러한 사상과 생각을 확 바꿔야 합니다. 운명론을 능히 부술 수 있는 것이 바로 불교 교리입니다. 무엇 때문에 거기에 길들어져서 질질 끌려 다니고, 눈물을 흘리고, 하늘을 보면서 한숨을 쉬면서 자기 일생을 그와 같이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불교는 운명과 숙명을 끌어안고, 산산이 때려 부셔서 다시 창조하고, 또 개조하고 이렇게 해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이 마음 하나로써 모든 것을 다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2500년 전 이 세상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선언하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화엄경)에는 ‘일체유심소조’라고 간단하게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중생계는 인연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때문에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늘 가져야 합니다.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인연이요, 하나는 좋지 않은 인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불어 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인연을 맺되 좋은 인연을 맺고 살아야만 마음도 편하고 서로 도움도 받고, 고민도 없고, 고통도 덜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지 않은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그것도 짊어지고 끙끙거리면서 가야만 되느냐? 운명론을 믿는 사람은 아마 그렇게 할 겁니다. 그 악한 인연, 좋지 않은 인연을 확 때려 부셔서 창조하고,또 바꾸고 그래서 좋은 인연으로 정립해서 회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노력하면 됩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게 보통 우리 업 많은 중생들의 생각입니다. 지금부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냉엄하게 사정없이 비판을 하고 다른 이에게는 관대하게 이해하고 용서하십시오. 내가 조금 양보하고, 조금 하심하고, 내가 조금 상대방을 이해하고. 이렇게 하면 능히 좋지 않은 인연이 좋은 인연으로 술~술 뚫려서 좋은 인연이 됩니다. 이게 바로 나쁜 인연을 좋은 인연으로 바꾸는 작업의 하나가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를 늘 안고 계십시다. 부처님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부처님 말씀을 어기고, 동쪽으로 가라면 서쪽으로 가는 청개구리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전부 안아서 끝까지, 이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그 대자비심을 발휘해서 고통이 다 없어지고 행복하게 살 때까지, 성불할 때까지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부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뭐좀 하다가 안되면 ‘기도를 그렇게 했는데도 소용없다’ 하고 맙니다.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잡념망상으로 하면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신심과 원력과 정성을 다 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뼈를 깎는 마음으로 살을 에는 마음으로 피 눈물을 흘려가면서 하는 그 기도 말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데 가장 무서운 적이 뭐냐? 바로 게으름입니다. 게으른 것, 이 게으름을 망치로 때려 부셔서 다 내쫓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부단히 담금질하는 것. 이것을‘절차’하고 ‘탁마’한다고 합니다. 담금질해서 아직 미완성 자리를 완성되게 만드는 것도 자기 마음입니다.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아무도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옛날 스님들은 공부하다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렀습니다. 멍이 들어서 피가 나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와 같이 졸음을 떨치면서 부처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하는 그 정신, 그 신심. 이게 있어야 합니다. 기도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도는 내가 뭔가를 갈구하고, 소원할 때 그것을 이룩케 하는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도, 주력도, 108배도, 간경도 모두가 기도의 개념에 포함이 됩니다. 그러한 포괄적인 기도, 수행 전체를 개념으로 하는 기도를 지금 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향에 맞는 것을 하나 잡아가지고 꾸준히 하되 게으르지 말고, 정성을 다 해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기도는 꼭 성취됩니다. 여러분, 두견새가 우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두견새는 모든 새들이 다 잠이 들고, 모든 짐승들이 잠이 들고, 사람마저 잠이 들고, 천지가 적막하고 오직 달빛만이 밝은 야삼경, 열두시나 한 시경 그 때 웁니다. 그 울음소리를 들어 보면 너무나 애절하고 너무나 간절합니다. 무슨 원이 있어서 무슨 한이 있어서, 모든 것이 잠든 적막한 이런 밤중에 홀로 저렇게 우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참을 울다가 또 흐느끼며 웁니다. 울다가 목에서 피가 맺히고 그 피가 올라왔다가 다시 넘어 갑니다. 피 맺힌 한이 있어서 그렇게 밤새도록 웁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저 두견새와 같이 한번 해보세요. 간절하게 두견새가 우는 그 마음으로, 낭떠러지에서 밑을 바라보는 그 마음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그러한 마음으로, 생사를 걸고 선방에서 일주일, 한 달, 석 달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 하는 마음으로, 철야기도를 일주일 또는 열흘 쉬지 않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장좌불와 하는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배가 부르면 나태해지니까 밥을 한 끼만 먹고 그 졸음을 쫓아가면서 일일일식으로 기도하는 마음, 공부하는 마음. 그런 지극한 마음으로, 그런 정성스런 마음으로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 극치가 뭐냐.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일체종지를 다 얻고, 깨쳐서 모든 것을 다, 아무 구애 없이, 고통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성인이 된다 그 말입니다. 기도해서 성인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돈이나 건강,애들 입학하는 것 같은 소소한 것들은 조금만 하면 다 이뤄집니다. 그 대신 기도할 때 아주 정성을 다해서 하십시오. 어느 스님이 운문 문언(雲門文偃, ?~949)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니라.”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했느냐, 여러분은 그 도리를 한번 깊이깊이 참구해 보십시오. 모든 것은 다 내 마음에서 이뤄지고, 불교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혜정스님

께서는“견성성불위해 24시간 화두 놓지말라” “산문 나설땐 시자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내가 있는 속리산에는 미륵부처님이 계십니다.

매달 16일은 미륵재일이라 철야기도를 하는데 한 번은 법당에 가봤더니 그 모습이 가관이라.

앉아서 기도하는 사람, 서서 기도하는 사람, 벽에 기대 염주 돌리고 있는 사람, 책을 펼치고 있는 사람.

이게 기도하는 것인지 놀러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눈에서 불이 번쩍 나도록 혼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 따위로 기도해서 뭘 성취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말이야.

정성을 다해서 해도 이뤄질 듯 말 듯 한데….”라고 늘 말씀하신다.

스님의 엄격한 수행 가풍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스님은 출가자들에게는 오직 견성성불을 위해 24시간 화두를 놓지 말라 이르시고 신도들에게는 참선, 간경, 염불 등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정진할 것을 당부하신다.

그 어느 쪽이나 뼈를 깎고 피 눈물을 흘리는 간절함과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수행 가풍은 일상에서도 드러난다.

30여년 주석하고 계시는 법주사 사리각에는 지금도 전화가 없다.

그래서 스님을 만나려면 사리각이나 스님이 정하는 법문 장소를 찾거나 시봉하고 있는 상좌 스님께 전화를 드려야만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다.

아직도 법문을 위해 외출할 일이 생길 때는 혼자 걸망 하나 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신다.

1933년 전라북도 정읍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19살 때 수덕사로 출가했다.

1953년 금오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1962~83년 1~8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1972년 중앙종회 부의장, 1977년 총무원장을 역임하셨다.

법주사 주지와 율주 소임을 거쳐 지금은 법주사 회주로 계신다.] – 자료출처:붓다뉴스 –

혜정스님─불자라면 인간적으로 살아야

불자라면 인간적으로 살아야 / 법주사 회주 혜정 스님

복잡다단한 세상.

시대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추락하고 만다.

살기위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우리들.

이제 단순함은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힘겨운 날개를 잠시 접고 미륵대불로 유명한 보은 법주사를 찾았다.

회주 혜정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서다.

선·교·율을 겸비한 선지식을 사리각에서 뵐 수 있었다.

스님의 처소에 들어서는 순간, 한지가 떠올랐다.

무서우리만치 흰색도 아니면서 적당한 흰빛을 머금은 종이.

만져보면 약간은 거친 듯한 느낌을 주지만 포근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한지.

스님의 방에서도 이 느낌이 났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스님의 방에 있는 것이라곤 가사, 죽비, 탁자, 시계 뿐.

조사어록 등이 담긴 그 흔한 액자 하나 없었다.

잠시 후 들어온 혜정 스님의 모습에서도 그 느낌이 다시 났다.

자그마한 체구에 엷은 미소만 뿐.

혜정 스님의 일상사는 ‘단순’ 그 자체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능인전에서 1시간 정도 예불을 드리고 30분 동안 정진을 한 뒤 다시 처소에 들어와 정진을 한다.

아침 6시 공양을 하고 사시마지를 올린 뒤, 오전 11시 30분 점심공양.

오후 6시 저녁예불 후 뒤 9시 취침.

특별한 건강 비결도 없었다.

참선이나 기도 그 자체가 건강 비결이기 때문이다.

다만 “난 참선이나 기도를 잘 못해 건강하지 않다”는 겸손뿐이었다.

스님의 이러한 생활태도는 은사 금오 스님의 영향이 크다.

스님은 서당 훈장이었던 할아버지 영향으로 책을 가까이 하던 중 우연히 불교잡지를 보게 된다.

그 불교잡지에서 “생은 어디를 좇아 왔으며 죽음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생은 곧 한 조각의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사라짐과 같으니라”는 대목이 가슴 깊숙한 곳에 꽂혔다.

그 가슴앓이는 김구 선생이 공부했던 마곡사 대원암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했다.

스님은 행자로 있으면서도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를 붙잡았다.

그러던 중 어느 깊은 밤 이상한 경계를 만나게 된다.

앉아있다는 의식도 없어지고 공중에 떠 있다는 느낌, 무엇인가 확 터지는 느낌, 그리고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 스님은 수덕사에서 은사 금오 스님을 만났다.

금오 스님은 ‘참선 이외의 것은 외도(外道)’라고 할 정도로 참선을 강조했다.

행자가 울력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참선에 들고 있으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 할 정도였다.

금오 스님은 또 무소유를 강조했을 뿐 아니라 계율을 중요시했다.

스님이라면 부처님 법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금오스님은 율장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철저히 배격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자연스레 혜정 스님 몸으로 전이됐다.

“요즘도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은사스님은 어떻게 처리했을까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은사스님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마음,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은사스님을 떠올리는 혜정 스님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

혜정 스님은 1970년대 중반 법주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법주사 강원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강원에 유명한 교수를 초빙했고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영어, 심리학, 비교종교학 등 내외전을 모두 교과과정에 도입시켰다.

이러한 교과과정과 함께 율반, 포교반, 외국어반, 편집반, 염불반, 미화반 등 6개 자율반을 편성해 활기를 띠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당시 종정이었던 서옹 스님의 부름으로 총무원장직을 맡았지만 곧 자리를 내놓고 월출산에 있는 토굴로 내려갔다.

도갑사에서 도보로 1시간 거리에 있던 이 토굴은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만 있을 뿐이었다.

시계도 없어 새 우는 소리로 시간을 짐작할 정도였다.

바람 불면 월출산 전체가 흔들리고 비오면 월출산 전체가 온몸을 흠뻑 적셨지만, 겨울밤 달빛에 비친 순백의 세계는 아직도 스님의 가슴을 뛰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회향도 토굴에서 하고픈 마음이다.

“토굴이나 암자 수행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대중 선원에서 기틀을 다진 수행자는 토굴에서의 집중 수행을 통해 더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요.

하지만 초심자가 토굴에 들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나태해지기 쉬우니까요.”

스님은 어떤 토굴이 열심히 정진하는 토굴인지 식별할 수 있는 방법도 귀띔해줬다.

“마당이나 부엌이 깨끗한 토굴이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토굴인 것 같죠.

아닙니다.

마당이나 부엌이 깨끗한 토굴은 수행자가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당에 풀이 우거지고 부엌은 더럽더라도 방에 좌복 하나 있는 토굴이 진짜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곳입니다.”

스님에게 법문을 청해 듣고 사리각 주변을 둘러봤다.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었다.

수많은 세월 비와 눈보라가 몰아쳐도 엷은 미소를 띤 채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마애불.

조금 전 사리각에서 보았던 선지식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글=남동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혜정 스님은 1933년 전라북도 정읍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19살 때 예산 수덕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62~83년 1~8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72년 중앙종회 부의장, 77년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법주사 주지와 율주 소임을 거쳐 현재 조계종 법계위원장, 원로의원이다.

이(理)와 사(事)를 겸비한 대표적 스님으로 수행자의 귀감을 보이고 있다.

혜정 스님의 가르침 불교는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종교입니다.

대신 인간을 중심으로 마음을 닦아 깨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혜정 스님은 불교는 인간 중심의 종교이기 때문에 불자는 인간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님께서 성도를 하시고 얼마 안돼 신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인도는 밤하늘의 별 만큼 많은 신들이 존재했습니다.

또 당시 인도 국민들은 신들을 절대시해, 신과 인간과 관계는 철저한 종속관계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신의 계시에 따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숙명적으로 정착된 때였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신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불교에도 신이라는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화엄경〉을 비롯해 여러 경전에도 나오는 신은 일종의 마음의 변형입니다.

즉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자립적이고 존재적인 신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종교라면 인간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이중구조로 돼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마음입니다.

육신은 사대(四大:地, 水, 火, 風)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환원됩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걸 우리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지만 가짜 나인 가아(假我)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 나입니까.

가짜 나와 상대되는 것, 그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마음을 찾아서 깨친다고 했는데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는 마음을 어떻게 접근해 깨칩니까.

그래서 고인(古人)들이 마음으로 마음을 찾으려고 하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비유컨대 물은 모든 것을 씻지만 물 자체는 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찾을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여기서 다른 학문이나 진리추구와는 다른 방법이 대두됩니다.

말도 문자도 생각도 일체 접근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직관을 통해서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3000년 전 직관의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역대조사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한 것, 중국에 와서 달마대사가 재창조한 것이 바로 간화선입니다.

간화선이라는 것은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두는 뭐냐, 의심덩어리입니다.

이 의심덩어리를 깨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을 깨치는 근본자리입니다.

화두는 양미간에 든다고 했습니다.

어느 노스님은 화두를 들면 산을 보되 산이 아니요 물을 보되 물이 아니요, 행하되 행하는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몸과 마음을 통해 오직 의심덩어리 하나만 끝까지 쉬지 말고 정진해야만 깨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두도 깨치기 전까지 공부하는 방법론이지 궁극에 가면 망상의 하나일 뿐입니다.

버려야합니다.

무심한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심한 경지란 허공 같아서 막힘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고, 목석과 같아 움직임도 없고 흔들림도 없는 것입니다.

버리는 경계를 무심이라고 했습니다.

무심한 경계에 도달하면 그것이 깨치는 것이고 우리의 구경처입니까.

아닙니다.

물이 흘러가다 멈추면 썩게 됩니다.

우리가 무심한 경지에 안주해 이것이다 하고 주저앉게 되면, 비유컨대 깊은 귀신굴에 떨어져서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신명을 바쳐 진일보하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목숨을 바쳐 한걸음 더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요 깨치는 구경처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 어느 외도가 와서 “아주 훌륭한 성자라고 들었습니다.

제 마음이 괴로우니 한 말씀 해 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끝까지 말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자 그 외도가 “제가 질문한 요지에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며 말하고 갔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한마디도 안 했지만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설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의 인연이나 근기가 마주치면 가능한 일입니다.

화두를 들고 끝까지 정진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화두를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신심을 견지하고 꾸준히 정진하면 구경에 도달한다는 믿음 말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먼 길이요, 고달픈 길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막막한 사막을 걸어야만 합니다.

걸어가다 보면 회오리바람을 만나 세상을 떠날 수 있고, 독충이나 맹수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으며, 작열하는 태양에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문의 본분은 수행입니다.

수행을 위해 집과 가족, 모든 것을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바쳐 한 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란 무엇이냐.

부처는 최고의 인격경지를 수행을 통해 체득한 사람, 생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경지를 체득한 사람, 모든 고통을 여의고 고통 없는 세계를 체득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마음을 깨쳐서 된 정신적인 대 혁명가입니다.

즉 부처님은 역사적인 인물이지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나무는 아래서 위로 자랐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렀습니다.

지금도 나무는 위로 자라고 물은 아래로 흐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인간이 부처가 됐다는 것, 마음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 깨칠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삼계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고 생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반신반의합니다.

요즘 위빠사나를 한다 요가를 한다 그럽니다.

안되니까, 답답하니까, 세월은 자꾸 가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으니까 방황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럴수록 신심을 굳건히 해서 원력을 세운 다음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불교는 신 중심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혜정스님─간절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라

간절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라 법주사 회주

혜정스님

여러분들은 지금 지장기도 100일 원력을 세우고 정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요,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취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지장 보살은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운 분이십니다.

관세음보살이 현생계의 중생을 위해서 주로 자비행을 행하신다고 하면 지장보살은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을 제도해서 저 지옥이 텅텅 비었을 때 마지막으로 성불하겠다다는 대원력을 세운 분입니다.

기도로 태어나 기도로 생 마쳐 우리는 일생을 기도로 태어나서 기도로 생을 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나올 때 웃고 나옵니까, 울고 나옵니까? 왜 우느냐? 세상에 막상 나와 보니 두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뭘 하고 싶은데 말로 할 수도 없으니 할 수 없이 유일한 수단인 울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럼 엄마가 젖도 주고 더운 날에는 부채도 부쳐 주지 않습니까?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은 그야말로 정성을 다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인류가 이 세상에 출현할 때부터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고 보니까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렵고 앞길이 막막하거든요.

제발, 내가 사는 동안 무사하게 건강하게 큰 피해 없이 살게 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아주 원천적이고 아주 소박한 기도입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은 물론 고목 앞에서도 기도를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나약하다면 나약한 것이고 원이 많다면 원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을 만물숭배 또는 애니미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타력 신앙과 자력 신앙이 거의 상반돼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한 90%가 타력신앙에 속한다고 보면 불교는 반반입니다.

오히려 자력 신앙에 더 포인트를 둔 것이 불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시간을 많이 할애해서 100일, 1000일을 해도 기도답지 않게 기도를 하면 별 효과가 없습니다.

기도는 시간과 결코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뭐냐, 기도할 때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해서 마음에 더 초점화 시켜서 일체 망상잡념 다 없애고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높은 낭떠러지 위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는 마음으로, 외나무다리를 밤중에 건너가는 그런 마음으로, 뒤에서 자신에게 총을 쏘려는 상황에서의 마음으로 절실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고 나면 지장보살과 내가 둘이지만 다음번에는 어느새 지장보살과 내가 한 몸이 됩니다.

이 때는 10분쯤 기도한 것 같은데 몇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것은 기도삼매경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간절한 기도를 한 후 가피를 기대 해야지 쥐꼬리만큼 기도하고, 입제 때와 회향 때 잠깐 기도하거나, 돈을 주고 대리인을 선정해서 여기 스님들에게 목탁 쳐 달라고 하면 아무런 소용 없습니다.

기도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뭘 바란다고 하는 것은 양심에도 어긋나지만 불자로서도 그런 자세는 허용이 안 됩니다.

자기가 해야만 합니다.

기도삼매경 체험해 보아야 이 기도로 가족이 잘 되고, 이웃이 잘 되고, 부산 시민이 잘 되고, 우리 민족이 잘 되고, 세계 60억 인구가 다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의 마음이 온 우주법계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범어사 기도에 동참한 것은 아주 잘 하신 겁니다.

전생에 이런 법회에 동참할 수 있는 복을 지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여기 오고 싶어도 못 옵니다.

또 복이 없는 사람은 이런 것을 들어도 다 귀에서 흘려버립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은 부산 시민 중에서도 가장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믿게 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눈물을 흘려가면서 아주 뼈가 으스러지는 그런 마음으로 아주 간절히 해야 합니다.

두견새가 밤을 새워서 울다가 목이 메면 다시 넘어오는 피를 머금고 울고, 또 웁니다.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들어 보셨습니까? 울다가 울컥 하고 흐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울다가 목에 피가 나와서 그 피를 삼키는 그 순간입니다.

얼마나 간절합니까?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법당이 가득 차도록 10만원 수표를 가져다 넣어 보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지장기도 원만성취가 되느냐 하면 안 됩니다.

마음 다한 기도가 正道 자기 자신한테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참선도 마음으로 하고, 주력도 마음으로 하고, 간경도 마음으로 하고, 절도 마음으로 하고, 지장 기도도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비록 형식은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를 것 같지만 백 천 강물이 한 바다로 들어가듯이 하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든지 자기 성향에 맞는 것을 딱 하나 잡아서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통불교이기 때문에 참선을 해야 한다 그래서 기도하다 참선하고, 금강경을 독송해야 한다고 해서 금강경을 독송하고, 주력을 해야 한다고 해서 주력하고, 그러다가 이것도 저것도 다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동안에 열심히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감히 대답을 못하겠지요? 어떤 사람은 서서 열심히 합니다.

옆 사람이 보면 참 열심히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엉망입니다.

오만 잡되고 허망한 생각으로 꽉 차 있습니다.

몸은 비틀어지고 누워있어도 마음을 하나로 해야 바른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기도만 열심히 하면 안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다양한 모든 수행이 다 기도라는 시각에서 보면 모두 기도입니다.

참선하는 것도 내가 화두 깨쳐서 부처가 되는 것이고, 기도라는 것도 내가 마음 맑혀 부처가 되는 것이고, 경을 읽는 것도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부처님 가는 길을 가기 때문에 전부 다 똑같은 겁니다.

지장보살의 위신력은 항하사겁수가 다하도록 설명해도 다 못쓴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기도는 집에서도 절에서도 항상 이어가고 또 100일 마쳤다고 해서 놓지 말고 일생을 걸고 해야 합니다.

일생을 걸고 하다보면 내생까지 연결 됩니다.

그래서 지장기도를 많이 하면 그동안의 업도 자꾸 소멸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얼굴이 훤해지면서 광채가 납니다.

눈도 아주 반짝반짝 해지고 몸도 건강합니다.

정신을 하나로 딱 모으기 때문에 웬만한 병은 다 사라집니다.

몸 아픈 사람이 기도해서 병 낫는다는 게 거짓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불자가 점을 친다거나, 또는 사주를 본다거나, 관상을 본다거나, 굿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삿된 짓입니다.

계를 받은 제자들은 절대로 그런 데 가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범망경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 오신 분 중에서 한 번도 안간 사람이 있습니까? 없죠? 그러나 그것도 가족과 자식을 위해서 가는 자비심이니까 그 근본마음은 괜찮습니다만 그 방법은 틀린 것입니다.

신심 없으면 송장과 같아 신심이 없으면 그냥 송장과 같습니다.

신심만 있다면 신심과 동시에 원은 한 50% 성취 됩니다.

어떻게 알지도 못하고 믿어야 되느냐 따지는 자체가 안 되는 겁니다.

불교는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논리나 시공을 초월한 경지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따지는 것은 박복한 짓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십시오.

부처님 마음은 허공과 같습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은 바늘과 같지만 이 마음은 망망대해 보다 더 크게 넓힐 수 있습니다.

기도와 함께 자비의 마음을 가지려 노력한다면 그 분이 바로 부처의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입니다.

좀 더 큰 원력과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법문은 8월 22일 범어사 제2회 지장 100일 기도 및 고승초청대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