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스님─행복하려면 감사하고 미소 짓고 말 아껴라

행복하려면 감사하고 미소 짓고 말 아껴라

-고산스님-

고산 스님께서 사자좌에 올랐다.

스님께서는 주장자를 높이 한 번 들어보였다.

스님은 이미 주장자 법문을 마쳤는데, 주장자를 보는 이의 마음은 주장자를 떠나지 못한다.

달마대사는 (사행론)의 ‘시유관찰형색문(示諭觀察形色門)’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장자를 보고 주장자란 견해를 지으면 이는 주장자 상(相)을 보고 주장자 견해(見解)를 짓는 것이요, 마음으로 이 주장자를 보더라도 이는 주장자 상(相)이라.

법은 주장자도 없고 주장자 상도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주장자를 봄으로 곧 주장자 법을 얻는 것이다.

일체 형색을 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고산 스님은 (유마경)을 펴서 한 구절을 독송하고 나서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 주셨다.

“중생들은 생사에 윤회합니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려면 중생의 나고 죽는 곳에 들어가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중생을 다 제도하고 나서야 열반에 듭니다.

보살은 죽고 태어나는 것이 자유자재하여 돼지를 제도하기 위해서는 돼지로 태어나고, 개를 제도하기 위해서는 개로 태어나며,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보살은 영화롭고 욕되는 일에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공부하는 이를 업신여기지도 않아요.

이 세상 만물에는 배울 것이 다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 전체가 다 우리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강은 강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다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야 해요.

바라밀은 미혹의 언덕에서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으로 모든 보살이 육바라밀에 의지해 행을 닦을 때는 바라밀을 부모님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데는 끝이 없어야 하며, 한량없는 보시를 행해야 합니다.

늘 용맹정진하고, 한량없는 부처님의 공덕을 듣고 지혜의 보검으로 번뇌 도적을 베어내야 합니다.” 고산 스님께서는 매달 석왕사에서 약사재일을 맞이하여 법문을 하신다.

법문 때마다 어디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유마경)강의를 한품씩 해 주시는 것이다.

(유마경)강의를 끝낸 스님은 대중을 한 번 훑어보시고서는 다음 법문을 이어갔다.

“어떤 보살이 기도 잘하다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뇌경색이라 의식이 없는 거여.

그래서 산소호흡기 꼽고 병원에 누워 있으니 그 치료비가 엄청난거라.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야.

억지로 목숨 이으는 것도 그렇고 해서 자식들이 산소호흡기 빼줄라고 해도 병원에서 안 빼준다카데.

그래서 법원에 호소를 해도 1심, 2심, 3심 다 병원이 이긴다고 하데요.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것이 다 병원이 돈 벌려고 그런다고 해요.

여러분들은 죽을 때 병원에서 호스 주렁주렁 달고 죽지 말고 그냥 집에서 편안하게 죽어요.

그것이 본인에게도 좋고, 죽고 나면 자손들에게 피해 안 끼치고 좋은 일이야.

오래 살려는 것도 다 헛된 욕심이지.

아무 소용없어.” 고산 스님은 법문을 통하여 육신의 무상함을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육신의 공(空)함을 일깨워주는 소동파와 불인요원선사의 재미있는 일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홍주자사로 부임해 간 소동파는 명성이 자자한 불인요원 선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불인 선사의 방에는 앉을 의자조차 없었다.

선사는 소동파에게 말했다.

“마침 오늘 내 방의 의자를 누가 빌려갔으니 아무 데나 앉으십시오.”소동파는 선사를 좀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한마디 하였다.

“의자가 없으면 스님의 몸뚱이를 좀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동파의 말에 불인 선사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내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맞추면 자사의 의자가 되어드리겠지만, 만약 그대가 틀린다면 옥대(玉帶)를 풀어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대는 원래 공(空)한 것인데 자사는 어디에 앉으려 합니까?” ‘사대는 원래 공하다’는 한 마디에 말문이 막힌 소동파는 불인 선사에게 옥대를 풀어주고는 가르침을 청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저 염불 열심히 하여 자기 갈 날을 준비해야지.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죽는 것을 모르고 자꾸 욕심부리지.

어리석음, 탐욕, 세상에 대한 분노를 놓아버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마지막 가는 준비 잘 하는 것이지.

탐진치 만큼 무서운 것이 없어요.

그리고 빨리 성불하고 싶으면 교만한 마음이 없어야 되요.

상대방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낫다 싶으면 상대방을 얕보고 그래.

남을 업신여기면 염불, 간경, 기도 등 무엇을 해도 성불하기 어려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상불경보살로 살 때 돼지보고도 부처가 될 것이라 했고, 거리에 있는 무엇을 보고도 다 부처가 될 것이라 하면서 공경했어요.

우리는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내 앞에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공경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성불하는 길이고 부처 되는 길이지.

요즈음 우체국이다 하고 전화해서 돈 다 빼가지고 가는 그런 사기단이 있다고 하데.

보살들이 피해를 당하고 나서는 ‘스님 어쩌까에?’ 하는데 내가 뭐 판검사가 어찌 아노.

자신이 잘 해야지.

그리고 요즈음 뉴스 보니까 부모에게 몹쓸 짓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세상에서 가장 못된 짓이 부모에게 불효하는 거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힘들게 키웠고 세상에 내 보낸다고 또 키운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 은덕을 모르고 불효를 해.

타인을 해치는 것보다 부모를 해하는 것이 더 나빠요.

지금 말법시대라 하지만 부처님 시대나 지금 시대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요.

단지 부처님 재세에는 착한 사람이 많고 나쁜 사람이 적었을 것이고, 말법 시대에는 착한 사람이 적고 나쁜 사람이 많은 것이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고민을 안고 고산 스님을 찾아온다.

그럴 때면 고산 스님은 사람들에게 분별심을 버리라고 한다.

좋은 날을 택해달라는 이에게는 비가 오면 촉촉이 와서 좋고,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바람이 부는 날은 선선해서 좋고, 구름이 낀 날은 끼어서 좋으니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일러준다.

좋은 방위를 찾는 이에게는 불교는 무남무북무동무서(無南無北無東無西)라, 우주는 갓이 없기 때문에 동서남북이 본래 없으며 중앙이 본래 없는데 어디에서 중심을 잡아서 동서남북을 정할 것이며 방위를 정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한단다.

기도 염불을 해도 부자가 안 된다고 하는 이에게는 남에게 베풀어 복덕종자를 심으라 한다.

스님은 삿된 법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정법을 간곡히 일러주신다.

그래서 스님은 세납이 칠십이 훨씬 넘었건만 법문을 청하는 이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어디든 달려가 바른 법을 들려주신다.

“부처님 말씀에 첫 번째 생각할 때 종자가 마련되고, 두 번째 그 생각을 거듭할 때 싹이 틔고 세 번째 생각을 하면 스스로 열매를 거둔다고 했어.

그러니 부처님의 정법을 바로 배운 사람은 함부로 나쁜 생각, 잡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데,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모든 생각을 일으켜서 많은 종자를 심어서 그 열매를 거두는 거지.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사람들은 분주하게 끝없이 업을 짓고 과보를 받아요.” 고산 스님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요, 둘째는 항상 미소를 지을 것이요, 셋째는 말을 아끼라고 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일체만유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미몽을 깨우쳐주시니 감사한 것이요, 부모님이 나를 낳아 키워주시니 감사하지요,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으면 입 아프게 꾸짖어주는 것이 감사하지요, 나를 때리는 사람이 있으면 손 아프게 채찍질해 주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말을 아껴야 합니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 항상 침묵하고 말을 조심하면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인데, 들은 대로 본 대로 말을 쏟아낸다면 날마다 시시비비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니 행복할 수가 없지요.” 고산 스님은 출가 이후 64년 동안 수행과 포교, 불사로 일관된 실천적인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논어), (맹자), (중용), (대학)등 사서를 배웠을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다.

초등학교 때 뒷동산에서 친구랑 한시(漢詩)를 주고받으며 놀았을 정도이다.

일찍 너무나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여윈 고산 스님은 출가하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출가를 결심했던 분이다.

꿈에는 더러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100일 관음기도를 모시기도 여러 차례였다.

1000일 관음기도를 올리기도 했으며, 지금까지 조석 예불 끝에 삼십분간 관음 정근과 발원문은 빠진 적이 없다.

스님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라 한다.

고산 스님이 범어사에서 동안거 결제를 했을 때이다.

이때 가행정진까지 너끈히 해내었다.

입승스님이 죽비를 들고 돌아다니다 졸고 있는 고산 스님의 어깨를 힘껏 세 번을 내리쳤다.

그 죽비에 맞는 순간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한 생각이 번쩍 하고 일어났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진짜 나를 치지 못하고 송장만 치는 구나”하고 큰소리로 외쳤더니 입승 스님이 할을 했다.

입승스님의 할이 끝나기가 무섭게 ”역부여시 도봉타월(亦復如是 掉棒打月, 또한 그와 같은 할은 방망이를 잡아 달을 치는 격이라는 뜻)이라 했다.

그랬더니 조실스님께서 ‘니우끽철봉 석인유혈루(泥牛喫鐵棒 石人流血淚, 진흙소가 쇠망이를 맞으니 돌사람이 피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라 했다.

고산 스님은 조실 스님의 그 말씀을 듣고 순간 뇌리에 번개처럼 한 생각이 지나가서 큰소리로 “알겠습니다”라고 했단다.

고산 스님은 은사 스님이신 동산 스님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동산 스님은 대중이 차고 넘쳐도 방부를 받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대중과 함께 예불과 도량청소도 하셨어.

은사 스님의 이런 모습을 본받아 지금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상관없이 예불에 빠지는 일은 없어요.” 고산 스님은 비구계를 받은 후부터 경(經), 율(律), 론(論) 삼장을 꾸준히 익혔다.

28살이 되던 1961년 직지사에서 고봉 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았다.

그때 학업을 증장시키기 위하여 고봉 스님을 모시고 김천 청암사 극락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고봉 스님의 명성이 자자한 터라 청암사에 비구 비구니 학인들이 오십 명 가량 모여들었다.

청암사에서 고산 스님은 강사로 임명되어 자신의 공부를 더욱 증강시킬 수 있었다.

고산 스님은 1966년 고봉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새벽 예불 후 좌선 중에 홀연히 한 경계가 있어 게송을 지었다.

심행일장몽(心行一場夢) 마음 작용은 한 바탕 꿈이요 식심즉시각(息心卽是覺) 한 마음 쉰 것이 곧 잠깬 것이라.

몽각일여중(夢覺一如中) 꿈과 잠깸이 한결같은 가운데 심광조대천(心光照大千) 마음 광명이 대천세계에 비추도다.

고산 스님은 게송을 읊고 나서 “이 우주에 오직 나 하나뿐이라”고 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이제 되었다.

앞으로 매이지 말라”면서 인가하셨다.

스님은 강사, 율사, 선사로서 어느 한 분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하여 여쭈었다.

“옛 어른들 말씀에 ‘용력가중배 사력십중배 (用力加重倍 死力十重倍)라는 말이 있어요.

힘을 쓰면 평소보다 몇 배의 힘이 나오고, 죽을 힘을 다하면 평소보다 열배의 힘이 나온다는 말이지.

사람이 신심을 내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고산 스님은 살아가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초발심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학생이 입학할 때 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우등생으로 졸업 못할 사람이 없고, 결혼할 때의 마음으로 산다면 싸울 일이 없고 이혼할 일이 없을 것이며, 회사원이 입사할 때 마음으로 근무한다면 회사도 발전시키고 진급도 할 것이란다.

하는 일이 시들하게 느껴질 때면 첫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돌이켜볼 일이다.

첫 마음으로 잘 살고 있는지 점검한다면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기에 우리는 날마다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산스님─초발심으로 돌아가세요 무엇을 하든 성공합니다

초발심으로 돌아가세요 무엇을 하든 성공합니다”

-고산스님-

경기도 부천시 보운산(寶雲山) 아래 자리 잡은 석왕사를 찾아갔을 때, 고산 스님은 점심 공양을 위해 방문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런데 공양을 하러 가신다면서 스님은 왼손에 아홉 개의 커다란 나무 구슬로 만든 단주를 쥐고 계셨다.

“스님, 항상 그렇게 단주를 들고 다니십니까?” “단주가 어째 생겨났는지 압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옛날 부처님 제자 가운데 우반 존자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전생에 소로 살다가 죽어서 인간이 된 분이었는데, 전생의 업으로 항상 입을 우물우물하는 버릇이 있었어요.

왜 소가 여물 먹을 때 우물우물 하면서 먹잖아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욕을 하거나 불평을 한다는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런 우반 존자를 위해 처음으로 단주(염주)를 만드셨습니다.

단주를 돌리고 있으면, 누가 봐도 염불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거라면서 우반 존자에게 항상 단주를 손에서 놓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단주가 생겨 난거군요.” “처음에 아홉 개의 구슬로 만들었는데, 9라는 것은 숫자의 종극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어요.

그 종극을 넘어서 더 많은 것을 구하라는 뜻이지요.

아홉 개의 구슬로 만들었던 단주가 이후에 108개, 1080개 3000개 등으로 늘어 난겁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항상 오른손으로 밥을 먹잖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왼손으로 염주를 돌리라 하셨습니다, 균형을 이루도록 말이예요.” 고산 스님은 매월 초 여드레 정기법회 때 마다 이곳 석왕사를 찾아 법문을 하신다.

고산스님─참회는 왜 하는가

참회는 왜 하는가

고산스님

법문 우리 불자들이 생각생각마다에 공부할 생각을 지니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허송세월만을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중생사인 것이다.

이렇게 한 해 한 해 지나가고 점점 죽음의 문에 다다르게 되니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마치 도살장으로 향하는 축생들처럼 한걸음 한걸음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거늘 모두가 이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어리석은 중생인 것이다.

매일매일 자신의 지나간 행적을 참회하고 살펴본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들을 벌 수 있다.

참회는 왜 하는가 하면 모든 중생들이 본인도 알게 모르게 십악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 지은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참회를 하는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불효를 했거나 남편 봉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 등은 양심 때문에 참회를 잘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뚜렷이 죄지은 일이 없는 사람은 참회하는데 인색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중생들이 왜 참회를 해야 하는지 살펴 보자.

정초 참회 7일 기도를 할 때 10가지 죄악 중 첫째가 산 목숨 죽인 죄를 참회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생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무의식 중에 산 미물을 살생한 경우가 허다하며 몸에 이롭다고 닭이나 소, 돼지, 개 등을 마구 잡아 먹는 것이 중생들인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도둑질한 죄를 참회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도둑질 한 번 하지 않은 사람도 없다.

양심에 손을 얹고, 잘 반조해 보면 누구나 도둑질 한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세번째는 사음한 죄를 참회하는 것인데 정한 부부 이외에 다른 사람 생각만 내도 사음한 것이 된다.

네번째는 거짓말한 죄를 참회하는 것인데 세 살까지만 해도 거짓 말을 하지 않다가 네 살만 넘어 분별심이 생기면 벌써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중생들이 무의식 중에도 죄를 짓기에 참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부처님께서 사바 세계에 출현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중생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의지, 수행하면 밝은 세계가 되고 사람이 착하고 어질게 된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각자의 길이 있다.

남자의 길, 여자의 길, 농부의 길, 상인의 길, 이 길이 바로 도(道)이다.

이 길데로 점차적으로 수행하면 되는데…, 중생들은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끊임없이 지어 죄를 짓게 된다.

부처님께서 하신 마지막 법문 중에…, 입을 봉하여 꼭 한 마디 할 때 열 번 이상 생각하고서 하라 하셨다.

간단하면서도 여기에 모든 도리가 다 들어 있다.

또한 뜻도 함부로 일으켜서는 안 된다.

자기도 모르게 중생들이 수시로 업장을 일으키고 계속 십악(十惡)을 지을뿐 아니라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이 쉴 사이 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입을 모으고 생각을 가다듬으며 행동을 함부로 옮기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씻겨지게 되고 하루하루가 행복하게 될 것이다.

내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참회다.

우리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전부 이름이 있다.

손가락 하나하나는 따로따로 힘을 쓰지 못하지만 합치면 힘을 쓰고 사용할 수 있다.

우리 불자들도 분열하지 말고 화합, 단결하면 안락국토가 되는 것인데 분열된 생각이 서구에서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불자들은 서구의 개인주의 정신을 본받지 말고 우선 이웃부터 화합하여 불행한 일, 즐거운 일을 함께 하는 보살행을 실천해 나가야 하겠다.

불교의 대자대비 정신으로 화합하여 민족정신을 통일시키고 동강난 우리 민족도 통일시켜야 한다.

우리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흔히 복을 말하고 있다.

복 중에서 제일은 오복(五福)이다.

경전에서 오복은 세 가지로 나오는데…

그 한 가지는 수명장수, 부귀, 강령(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 호덕(好德), 임종을 잘 하는 것이고 두번째 오복은 수명장수, 부자로서 넉넉하게 사는 것, 몸에 병이 없는 것, 재앙이 없는 것, 도덕군자이며 세번째 부류는 오래 사는 것, 부귀, 기(氣)가 있는 것, 강령, 아들 많은 것이라 했다.

이 세 가지 오복의 분류 중에서 요즘은 세번째 것을 많이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오복을 말해도 이에 해당하는 자가 없어서 자나깨나 걱정이 많은 것이다.

재산이 많으면 수명이 짧다든가 수명이 길면 재산이 없다든가 한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한 가지 성취되면 다른 것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이 전부 이와 같다고 하셨다.

즉 장단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갖출 수는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을 잘 하지 않으려 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말라고 해도 하기 쉽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나쁜 일 하기를 멀리 하고 좋은 일, 하기 어려운 일을 자꾸 실천해야 보살이 되고 성불도 할 수 있다.

이 점을 명심하고 부처님 말씀대로 선업을 쌓아 늘 행복한 하루하루가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