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스님─어떻게 수행 할것인가

어떻게 수행 할것인가

고산큰스님 법문

사람은 사람으로서 각자의 길이 있다.

남자의 길, 여자의 길, 농부의 길, 상인의 길, 이 길이 바로 道이다.

이길대로 점차적으로 수행하면 되는데 중생들은 신, 구, 의, 삼업을 끊임없이 지어 죄를 짓게 된다.

부처님께서 하신 마지막 법문 중에 입을 봉하여 꼭 한마디 할 때 열 번 이상 생각하고서 하라 하셨다.

간단하면서도 여기에 모든 도리가 다들어있다.

또한 뜻도 함부로 일으켜서는 안된다.

자기도 모르게 중생들이 수시로 업장을 일으키고 계속 십악을 지을 뿐 아니라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이 쉴 사이 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입을 모으고 생각을 가다듬으며 행동을 함부로 옮기지 않으면 모든 것이다 씻겨지게 되고 하루하루가 행복하게 될 것이다.

내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참회다.

우리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전부 이름이 있다.

손가락 하나하나는 따로따로 힘을 쓰지 못하지만 합치면 힘을 쓰고 사용할 수가 있다.

불자들은 우선 이웃부터 화합하여 불행한 일, 즐거운 일을 함께 하는 보살행을 실천해 나가야 하겠다.

우리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흔히 복을 말하고 있다.

복 중에서 제일은 오복이다.

경전에서 오복은 세 가지로 나오는데 그 한 가지는 수명장수, 부귀, 강령(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 호덕, 임종을 잘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오복은 수명장수, 부자로서 넉넉하게 사는 것, 몸에 병이 없는 것, 재앙이 없는 것, 도덕군자이며 세 번째 분류는 오래 사는 것, 부귀, 강령 아들 많은 것이라 했다.

이 세 가지 오복의 분류 중에서 요즘은 세 번째 것을 많이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오복을 말해도 이에 해당하는 자가 없어 자나깨나 걱정이 많은 것이다.

재산이 많으면 수명이 짧다든가 수명이 길면 재산이 없다든가 한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한 가지 성취되면 다른 것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이 전부 이와 같다고 하셨다.

즉 장단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갖출 수는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은 잘 하지 않으려 하고 나쁜 일 하기를 멀리 하고 좋은 일, 하기 어려운 일을 자꾸 실천해야 보살이 되고 성불도 할 수 있다.

이 점을 명심하고 부처님 말씀대로 선업을 쌓아 늘 행복한 하루하루가 되도록 하자.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보살행 보살행을 알기 전에 먼저 보살의 정확한 뜻풀이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아 보살이란 어떤 분인가를 대강 설명하고자 한다.

보살이란 보리살타의 준말로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보살이란 “깨달은 중생”이다.

이는 그 본 모습은 부처님이지만 짐짓 중생을 구제키 위해 중생으로 화현하는 하화중생적인 의미의 대성자를 가리킨다.

둘째, 보살은”깨달음으로 가는 중생”으로서 육바라밀, 팔정도 사홍서원 등을 닦아 나가는 상구보리적인 불국토 건설의 본원을 가진 모든 불자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보살행은 두 번째의 “깨달음으로 가는 중생”으로서의 보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보살행을 익히는 요령을 배워보자.

보살행이라고 하면 불경에서는 대체로 육바라밀, 사홍서원, 자리이타, 상구보리하화중생, 동체대비 등으로 말씀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러한 본격적인 보살행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기초적 소양으로서의 “세 가지 독한 마음을 여의는 방법”을 중점적으로 논의하겠다.

첫째, 보살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막연히”욕심” 하니까 그 한계가 본명치 못하나 대체로 분수에 맞는 삶을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욕심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재산에 대한 욕심, 성욕, 음식욕, 명예욕, 그리고 수면에 대한 욕심이 있는데 사실 이 다섯은 어느 하나도 생활에 필요치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욕심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재산도 열심히 땀흘려 많이 벌어서 좋은데 쓰면 되는데 사람이 그렇지 못해서 잡으면 놓을 줄을 몰라 집착하고 축적하려고만 하니 그것이 큰탈이다.

재물이란 항상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하니, 그로 말미암아 모든 죄악의 싹이 트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성욕도 종의 번식을 위해서 건전한 부부관계는 좋으나 함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다든지 방탕하고 무절제한 성관계는 사회윤리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종교적으로 볼때도 용인될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 색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도 그만큼 사람을 번뇌죄장으로 묶어 놓는 큰 힘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옛 어른의 말씀에 재색지화는 심어독사라 함도 이를 두고 하는 뜻이리라.

재산과 성욕에 의한 화가 독사에 물린 것보다 심하다는 이뜻을 눈 어두운 우리 중생은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식욕, 명예욕, 수면욕 등도 마차가지로 어느 것이나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면 인생을 망치는 욕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탐심이 되고 우리의 오관과 정신이 탐심에 물들어 경계마다 호상이요, 일마다 사고가 터져 일체 행동거지가 곧 죄업이 되고말아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니 조심할 일이다.

명심할 것은, 열심히 땀흘려 정당하게 별어서 바르게 쓰고, 남은 것은 중생과 부처님을 위해서 돌이켜 공양할 줄 아는 진정한’동체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보살은 화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 설명한 탐심을 제거했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성냄이란 자신의 구하는 바가 좌절될 때 일어나는 고약한 번뇌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당한 욕구라면 성취되지 않을 리도 없겠지만, 설사 만족치 못하더라도 정당한 성취를 위해서 부단히 쉼없는 노력만이 있을 뿐 성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잘못된 욕심의 근본적인 문제는 일시적 충동에 의한 욕구라는 것과 그러한 죄악에 물들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욕구의 물결 그것이 더욱 문제라는 점이다.

옛말에 견물생심이란 단어가 의미하듯이 보고 듣고 인식하는대로 보다 좋은 것, 맛있는 음식, 값진 의복, 편리한 시석, 훌륭한 주택 어느것 하나 마음이 이끌리지 않는 바가 없는데 현실이 그것을 취할 수 없을 때 (대개 자제력으로 순간을 극복하지만) 참지 못하고 울컥 흥분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정당한 방법, 노력을 수반한 성취를 생각해야지 비리로 얻어지는 순간의 기쁨은 영원히 고통만 증가시킬 뿐이라는 깨끗한 자각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심을 방지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화라고 하는 것은 초조, 긴장, 갈등, 불안 등의 심리적 현상을 동반하는 것으로서 이는 정신적 안정을 해치며 심성을 포악하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등, 결국은 미로를 헤매는 악순환을 거듭케 하므로써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화를 내면 육체적으로는 쉬 늙게 되어 수명이 단축되고 몸의 제기능이 정상을 유지하지 못하여 만병의 근원이 된다는 의학계의 보고에서 보듯이 , 화는 매우 경계해야될 성질이다.

옛말에 한 번의 화로 몸의 피가 서 말 석 되가 마른다고 하였고, 어떤 큰 스님이 평생을 수행하고도 한 번의 화냄으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뱀의 몸을 받았다는 일화를 보더라도 두렵고 두려운 것이 성내는 일이다.

셋째, 보살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어리석다는 단어는 퍽 이해하기가 곤란한 말인지도 모른다.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인지의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태를 어리석다 하겠는가? 이는 객관적인 판단기준에 맡겨야 한다.

경전에 의하면 어리석음이란, 첫째로 자신을 과신하는 상태로서, 자기의 수명이 무한할 것이라 믿는 고집,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는 고집, 모든 사물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고집 등을 들 수가 있고, 둘째, 너무 자신을 멸시하는 상태로서, 자신의 주관이 없고, 뚜렷한 신념이 없으며,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해 버리는 일종의 허무주의적인 견해로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마저 갖지 못하는 안타까운 중생의 상태를 말한다.

또한, 죄를 인정치 않고 도덕관념을 낡은 사상이라고 하여 배척하며, 자기만이 새시대를 창조하는 위력을 지닌 절대자적 존재로 믿고 교만, 방자하여 타인을 해치는 행위등도 지극히 어리석은 것의 범주 속에 들어간다고 본다.

이상의 세 가지 독한 마음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계율을 지키는 굳은 마음, 지극한 평화를 지키는 선정의 마음, 시비곡직을 판단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지혜의 마음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보살의 기초적 소양이기에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내적수행을 돈독히 하고 외적교화를 위해 부지런히 불법의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이웃과 사회와 가족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 보살행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서 실천해 나가기를 바라고 바란다.

여기에 육바라밀, 팔정도, 사홍서원을 닦아 나간다면 그보다 더한 공덕이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리….

고산스님─수행은 ‘있을 자리’ 아는것

수행은 ‘있을 자리’ 아는것

고산 스님(하동 쌍계사 조실)

본래 하늘과 땅은 하나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둘로 나뉘어져 있을 뿐입니다.

범부와 성인도 본래 동일체인데 깨닫지 못한 이는 범부가 된 것이고 깨달은 이는 성인이 된 것입니다.

이 도리를 안다면 오늘 여러 불자님들은 더 이상 법문 들을 필요도 없고 수행할 것도 없습니다.

본래 하나인 진리의 자리가 어찌 둘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도 본래 다 공이고, 범부 성인 하는 것도 본래는 이름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벌어졌으니 마지못해서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태양을 보세요.

비추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밝게 비춰도 엎어놓은 그릇 속은 비추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어찌 바깥의 부처님 소리를 듣고 부처님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하동 쌍계사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데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산강이 있습니다.

영산강의 물이 흐르고 흘러서 섬진강의 물과 합세를 해서 내려오는데 이 것을 영산강 물이라 해야겠습니까? 섬진강 물이라고 해야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잘 답변한다면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요, 그렇지 못하면 꿈속을 헤매는 사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중국에 배효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불교공부를 참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당시 큰스님인 황백희원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배효가 절에 도착해서 조사전에서 참배하다가 한 스님한테 물었습니다.

“조사의 진영은 저기 있는데 조사님들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그 스님이 당황하고 대답을 못하자 배효가 황백희원 선사에게 가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희원선사가 “배효, 어디있나?”하고 크게 말하셨어요.

그때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듯 평소에 공부를 많이 했으면 살짝 건드려주어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불교 믿지요? 어떤 것이 믿는 것입니까?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너나없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한 마디로 하라고 해도 말 못해요.

여러분들이 불교를 믿어도 잘 연구해서 믿어야 합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말, 참선할 때 많이 들었지요? 본래면목이 뭡니까? 이정당체지자신이예요.

이정이 뭐냐면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이보(異報)고, 우주 안에 살고 있는 만물들은 정보(正報)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이보고 지금 설법을 듣고 있는 마음은 정보예요.

당체는 진여자리, 본성자리예요.

그것이 바로 본래면목입니다.

그것을 반추해서 찾으면 생사해탈이고 원만성불입니다.

생사해탈을 하려면 본래면목을 반추해서 찾아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생사해탈 하려면 첫째‘본무생사’본래 생사가 없다는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 ‘지무생사’ 생사가 없는 도리를 절실히 체험해서 알고 나서, 셋째‘직무생사’생사가 없는 도리를 중득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가 ‘용무생사’.

생사가 없는 도리를 중득한 다음에는 내 마음대로 사용해야 됩니다.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입고 싶으면 입고 싫으면 말고, 그게 마음대로 돼야 용무생사입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갈 때와 올 때, 있어야 할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깨달아서 성불하십시오.

고산스님─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고산 큰스님-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보다 더 나은 상태이고, 그 절대의 경지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다면, 과연 ‘궁극의 도달점, 최상의 경지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이 명확해야 한다.

무지개나 신기루를 쫓다가 귀중한 생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불교에서는 그러한 경지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말하는데 피안(彼岸),무상보리(無上菩提) 등이다.

그것은 모든 고통과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한 곳이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등 인과에 따라 받는 육도의 굴레를 벗어나 선정과 해탈, 신통명지(神通明地)에 이르는 것이다.

그 몸은 모든 세상에 나타나고 음성은 시방법계에 두루 미치며, 마음과 지혜는 거리낌이 없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무한 생명으로 살게 된다.

참으로 별천지 이야기 같고 이르기 어려운 경지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회복 불능의 시련이 될 수 도 있고 전화위복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

마음을 한번 바꾸면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그렇다.

우리가 초월적 가치에로의 지향성으로 마음 바꾸기를 끊임없이 계속한다면, 그것을 수생 동안의 과제로 생각하고 정진한다면 과연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앞으로 계속 전개될 이야기는 이상향,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의 마음자세다.

그것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동경할 가치가 있다고 긍정이 되면, 우리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되도록 추구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이 마음이다.

수미산(須彌山)을 싸고도 남을 만큼 크다가도, 때로는 바늘 하나 용납하지 않을 만큼 작아지기도 한다.

태양같이 밝다가도, 칠흑같이 어두워지기도 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모든 곳[十方]을 온통 품을 수 있으며, 어느 때[三世] 이거나 시종 관철할 수도 있다.

잘 운용하면 부처님도 될 수 있고, 나쁘게 쓰면 흉악한 죄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조화가 끝없이 펼쳐지면서도 신비하여 예측하기 어려운 것[神秘難測], 이러한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 생멸의 근본이 무엇일까? 중생들이야 의문만 더해갈 뿐 해답이 묘연하다.

마음은 예측하기 어려운 장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작용에 우리들은 또 얼마나 이끌리고 있는가? 어떤 사람과는 마냥 함께 있어도 좋은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그저 피하고만 싶어진다.

가만히 앉아서도 망망대해의 푸른 파도소리를 듣기도 하고, 심산유곡의 정상에 가 있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고, 고향이 그리우며, 지위와 명예욕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때없이 절대 고도에 혼자 남겨진 듯하기도 하고, 마치 주변사람들이 모두 나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기라도 한 것인 양 뿌듯해질 때도 있다.

찰나에도 지고(至高)한 선업(善業)을 짓는가하면, 세기의 파렴치한이 되게도 하는 것이 또한 마음이다.

실상은 언제나 한결같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함경(阿含經)』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마음이 더러운 까닭에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한 까닭에 중생이 깨끗하다.

마치 화가가 하얀 바탕의 종이에 갖가지 색을 칠하여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내듯이 마음도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오온(五蘊)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생사의 사슬에 묶이고 오온에 대한 실(實)다움으로 하여 해탈을 얻는다.

그렇듯이 우리들의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몸뚱이가 소중한 만큼 우리에게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음을 항상 가꾸고 다듬고 청결하게 간수하여 일체의 중생을 사랑하고 바른 진리를 깨우치는 대도(大道)에 주저 없이 동참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대도를 이룬 사람을 깨달은 자, 각자(覺者)라고 한다.

그러면 중생과 부처님이 둘이 아니고, 미혹함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고 했으니 우리도 부처님, 즉 각자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부처님이라 하겠지만, 미혹한 중생은 번뇌와 망상 속에 묻혀 사는 어두운 부처님이라 할 것이다.

광석을 뽑아내듯이, 우리들도 광석이 거쳐야 하는 제련과정을 요하는 부처님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6년 동안 갈고 닦은 고행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얻었고, 신과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셨기에 더러운 때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부처님이 된 것이다.

제련과정을 소홀히 하고 게을리 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될 수 없다.

『화엄경』에서처럼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는 심즉시불(心卽是佛)의 경지도 제련과정 없이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어서는 안 된다.

요즈음의 세태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경구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제련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부처님이 곳곳에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을 잘 가꾸고 다루는 사람에게 부처님, 보살, 현인, 위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부른다.

그렇지 못하고 마음이 삐뚤어져 엉뚱한 방향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악당, 죄인, 폭군이라 한다.

이 또한 마음이 부리는 조화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바른 마음을 쓸 줄 알면 신들도 기뻐할 것이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조절하여 부드럽고 순하게 가지라.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며 귀신이나 축생, 혹은 지옥까지도 만든다.

그러니까 마음을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

그러면 보살의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보살의 마음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 즉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대표한다.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마음이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보면 사무량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무량심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부끄러움을 알고, 나쁜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말이 부드러워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스스로 착한 행(行)을 하여 사람들에게 조경을 받으며, 지나치지 아니하고 실책을 범하지 않고, 자비를 널리 베풀어 펼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 경에서는,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은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없애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말 한다.

더욱이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17권에 보면, 중생에게 행복을 주는 자비가 몸과 말과 뜻의 삼업에 두루 통하여 있는 것이니, 이 평등의 조건은 마음뿐 아니라 몸과 말로써도 충분히 그 진의를 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자’는 사랑이다.

자식에 대한 모정이나, 부부 사이의 사랑이나, 연인들 사이의 사랑이 아니다.

끝이 없는 광대무변한 인연의 사랑이다.

어찌 불보살의 한없는 사랑을 감정의 틀로 재량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커다란 맹서의 사랑이며, 고통을 여의고 최상의 기쁨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대원력(大願力)에서 풍기는 덕심(德心)의 그늘이다.

보살은 사랑은 중생의 고뇌와 번뇌를 제거하는 사랑이요, 생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랑이며, 또한 중생에게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길을 열어주어 해탈과 열반의 저 언덕(彼岸)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진정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곧 보살의 대자비이다.

‘비’는 또한 일체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三毒)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가련하게 생각하여 대해탈문(大解脫門)을 열고, 네 가지 큰 바람[四弘誓願]의 실천을 쉴 사이 없이 행하는 것이 보살의 대비행(大悲行)이다.

‘희’는 기뻐하는 마음이다.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 환희심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과 불평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들에게 환희안락(歡喜安樂)하게 하는 것이 보살의 대희심(大喜心)이다.

‘사’는 오욕탐진(五慾貪嗔)과 번뇌망상을 버리자는 뜻이요, 나의 모든 것을 버려서 베푸는 보시행(報施行)에 아낌을 두지 말자는 뜻이다.

중생을 위하여서 무엇이든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정신이 곧 보살의 대사심(大捨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욕에 찌든 마음을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서, 보배로운 보살의 마음 씀씀이의 도리를 본받아 부처님이 중생 제도하는 참된 길을 밟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