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스님─어떻게 수행 할것인가

어떻게 수행 할것인가

고산큰스님 법문

사람은 사람으로서 각자의 길이 있다.

남자의 길, 여자의 길, 농부의 길, 상인의 길, 이 길이 바로 道이다.

이길대로 점차적으로 수행하면 되는데 중생들은 신, 구, 의, 삼업을 끊임없이 지어 죄를 짓게 된다.

부처님께서 하신 마지막 법문 중에 입을 봉하여 꼭 한마디 할 때 열 번 이상 생각하고서 하라 하셨다.

간단하면서도 여기에 모든 도리가 다들어있다.

또한 뜻도 함부로 일으켜서는 안된다.

자기도 모르게 중생들이 수시로 업장을 일으키고 계속 십악을 지을 뿐 아니라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이 쉴 사이 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입을 모으고 생각을 가다듬으며 행동을 함부로 옮기지 않으면 모든 것이다 씻겨지게 되고 하루하루가 행복하게 될 것이다.

내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참회다.

우리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전부 이름이 있다.

손가락 하나하나는 따로따로 힘을 쓰지 못하지만 합치면 힘을 쓰고 사용할 수가 있다.

불자들은 우선 이웃부터 화합하여 불행한 일, 즐거운 일을 함께 하는 보살행을 실천해 나가야 하겠다.

우리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흔히 복을 말하고 있다.

복 중에서 제일은 오복이다.

경전에서 오복은 세 가지로 나오는데 그 한 가지는 수명장수, 부귀, 강령(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 호덕, 임종을 잘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오복은 수명장수, 부자로서 넉넉하게 사는 것, 몸에 병이 없는 것, 재앙이 없는 것, 도덕군자이며 세 번째 분류는 오래 사는 것, 부귀, 강령 아들 많은 것이라 했다.

이 세 가지 오복의 분류 중에서 요즘은 세 번째 것을 많이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오복을 말해도 이에 해당하는 자가 없어 자나깨나 걱정이 많은 것이다.

재산이 많으면 수명이 짧다든가 수명이 길면 재산이 없다든가 한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한 가지 성취되면 다른 것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이 전부 이와 같다고 하셨다.

즉 장단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갖출 수는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은 잘 하지 않으려 하고 나쁜 일 하기를 멀리 하고 좋은 일, 하기 어려운 일을 자꾸 실천해야 보살이 되고 성불도 할 수 있다.

이 점을 명심하고 부처님 말씀대로 선업을 쌓아 늘 행복한 하루하루가 되도록 하자.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보살행 보살행을 알기 전에 먼저 보살의 정확한 뜻풀이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아 보살이란 어떤 분인가를 대강 설명하고자 한다.

보살이란 보리살타의 준말로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보살이란 “깨달은 중생”이다.

이는 그 본 모습은 부처님이지만 짐짓 중생을 구제키 위해 중생으로 화현하는 하화중생적인 의미의 대성자를 가리킨다.

둘째, 보살은”깨달음으로 가는 중생”으로서 육바라밀, 팔정도 사홍서원 등을 닦아 나가는 상구보리적인 불국토 건설의 본원을 가진 모든 불자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보살행은 두 번째의 “깨달음으로 가는 중생”으로서의 보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보살행을 익히는 요령을 배워보자.

보살행이라고 하면 불경에서는 대체로 육바라밀, 사홍서원, 자리이타, 상구보리하화중생, 동체대비 등으로 말씀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러한 본격적인 보살행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기초적 소양으로서의 “세 가지 독한 마음을 여의는 방법”을 중점적으로 논의하겠다.

첫째, 보살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막연히”욕심” 하니까 그 한계가 본명치 못하나 대체로 분수에 맞는 삶을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욕심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재산에 대한 욕심, 성욕, 음식욕, 명예욕, 그리고 수면에 대한 욕심이 있는데 사실 이 다섯은 어느 하나도 생활에 필요치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욕심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재산도 열심히 땀흘려 많이 벌어서 좋은데 쓰면 되는데 사람이 그렇지 못해서 잡으면 놓을 줄을 몰라 집착하고 축적하려고만 하니 그것이 큰탈이다.

재물이란 항상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하니, 그로 말미암아 모든 죄악의 싹이 트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성욕도 종의 번식을 위해서 건전한 부부관계는 좋으나 함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다든지 방탕하고 무절제한 성관계는 사회윤리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종교적으로 볼때도 용인될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 색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도 그만큼 사람을 번뇌죄장으로 묶어 놓는 큰 힘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옛 어른의 말씀에 재색지화는 심어독사라 함도 이를 두고 하는 뜻이리라.

재산과 성욕에 의한 화가 독사에 물린 것보다 심하다는 이뜻을 눈 어두운 우리 중생은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식욕, 명예욕, 수면욕 등도 마차가지로 어느 것이나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면 인생을 망치는 욕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탐심이 되고 우리의 오관과 정신이 탐심에 물들어 경계마다 호상이요, 일마다 사고가 터져 일체 행동거지가 곧 죄업이 되고말아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니 조심할 일이다.

명심할 것은, 열심히 땀흘려 정당하게 별어서 바르게 쓰고, 남은 것은 중생과 부처님을 위해서 돌이켜 공양할 줄 아는 진정한’동체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보살은 화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 설명한 탐심을 제거했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성냄이란 자신의 구하는 바가 좌절될 때 일어나는 고약한 번뇌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당한 욕구라면 성취되지 않을 리도 없겠지만, 설사 만족치 못하더라도 정당한 성취를 위해서 부단히 쉼없는 노력만이 있을 뿐 성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잘못된 욕심의 근본적인 문제는 일시적 충동에 의한 욕구라는 것과 그러한 죄악에 물들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욕구의 물결 그것이 더욱 문제라는 점이다.

옛말에 견물생심이란 단어가 의미하듯이 보고 듣고 인식하는대로 보다 좋은 것, 맛있는 음식, 값진 의복, 편리한 시석, 훌륭한 주택 어느것 하나 마음이 이끌리지 않는 바가 없는데 현실이 그것을 취할 수 없을 때 (대개 자제력으로 순간을 극복하지만) 참지 못하고 울컥 흥분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정당한 방법, 노력을 수반한 성취를 생각해야지 비리로 얻어지는 순간의 기쁨은 영원히 고통만 증가시킬 뿐이라는 깨끗한 자각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심을 방지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화라고 하는 것은 초조, 긴장, 갈등, 불안 등의 심리적 현상을 동반하는 것으로서 이는 정신적 안정을 해치며 심성을 포악하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등, 결국은 미로를 헤매는 악순환을 거듭케 하므로써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화를 내면 육체적으로는 쉬 늙게 되어 수명이 단축되고 몸의 제기능이 정상을 유지하지 못하여 만병의 근원이 된다는 의학계의 보고에서 보듯이 , 화는 매우 경계해야될 성질이다.

옛말에 한 번의 화로 몸의 피가 서 말 석 되가 마른다고 하였고, 어떤 큰 스님이 평생을 수행하고도 한 번의 화냄으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뱀의 몸을 받았다는 일화를 보더라도 두렵고 두려운 것이 성내는 일이다.

셋째, 보살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어리석다는 단어는 퍽 이해하기가 곤란한 말인지도 모른다.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인지의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태를 어리석다 하겠는가? 이는 객관적인 판단기준에 맡겨야 한다.

경전에 의하면 어리석음이란, 첫째로 자신을 과신하는 상태로서, 자기의 수명이 무한할 것이라 믿는 고집,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는 고집, 모든 사물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고집 등을 들 수가 있고, 둘째, 너무 자신을 멸시하는 상태로서, 자신의 주관이 없고, 뚜렷한 신념이 없으며,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해 버리는 일종의 허무주의적인 견해로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마저 갖지 못하는 안타까운 중생의 상태를 말한다.

또한, 죄를 인정치 않고 도덕관념을 낡은 사상이라고 하여 배척하며, 자기만이 새시대를 창조하는 위력을 지닌 절대자적 존재로 믿고 교만, 방자하여 타인을 해치는 행위등도 지극히 어리석은 것의 범주 속에 들어간다고 본다.

이상의 세 가지 독한 마음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계율을 지키는 굳은 마음, 지극한 평화를 지키는 선정의 마음, 시비곡직을 판단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지혜의 마음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보살의 기초적 소양이기에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내적수행을 돈독히 하고 외적교화를 위해 부지런히 불법의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이웃과 사회와 가족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 보살행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서 실천해 나가기를 바라고 바란다.

여기에 육바라밀, 팔정도, 사홍서원을 닦아 나간다면 그보다 더한 공덕이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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