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고산 큰스님-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보다 더 나은 상태이고, 그 절대의 경지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다면, 과연 ‘궁극의 도달점, 최상의 경지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이 명확해야 한다.
무지개나 신기루를 쫓다가 귀중한 생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불교에서는 그러한 경지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말하는데 피안(彼岸),무상보리(無上菩提) 등이다.
그것은 모든 고통과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한 곳이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등 인과에 따라 받는 육도의 굴레를 벗어나 선정과 해탈, 신통명지(神通明地)에 이르는 것이다.
그 몸은 모든 세상에 나타나고 음성은 시방법계에 두루 미치며, 마음과 지혜는 거리낌이 없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무한 생명으로 살게 된다.
참으로 별천지 이야기 같고 이르기 어려운 경지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회복 불능의 시련이 될 수 도 있고 전화위복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
마음을 한번 바꾸면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그렇다.
우리가 초월적 가치에로의 지향성으로 마음 바꾸기를 끊임없이 계속한다면, 그것을 수생 동안의 과제로 생각하고 정진한다면 과연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앞으로 계속 전개될 이야기는 이상향,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의 마음자세다.
그것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동경할 가치가 있다고 긍정이 되면, 우리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되도록 추구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이 마음이다.
수미산(須彌山)을 싸고도 남을 만큼 크다가도, 때로는 바늘 하나 용납하지 않을 만큼 작아지기도 한다.
태양같이 밝다가도, 칠흑같이 어두워지기도 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모든 곳[十方]을 온통 품을 수 있으며, 어느 때[三世] 이거나 시종 관철할 수도 있다.
잘 운용하면 부처님도 될 수 있고, 나쁘게 쓰면 흉악한 죄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조화가 끝없이 펼쳐지면서도 신비하여 예측하기 어려운 것[神秘難測], 이러한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 생멸의 근본이 무엇일까? 중생들이야 의문만 더해갈 뿐 해답이 묘연하다.
마음은 예측하기 어려운 장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작용에 우리들은 또 얼마나 이끌리고 있는가? 어떤 사람과는 마냥 함께 있어도 좋은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그저 피하고만 싶어진다.
가만히 앉아서도 망망대해의 푸른 파도소리를 듣기도 하고, 심산유곡의 정상에 가 있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고, 고향이 그리우며, 지위와 명예욕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때없이 절대 고도에 혼자 남겨진 듯하기도 하고, 마치 주변사람들이 모두 나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기라도 한 것인 양 뿌듯해질 때도 있다.
찰나에도 지고(至高)한 선업(善業)을 짓는가하면, 세기의 파렴치한이 되게도 하는 것이 또한 마음이다.
실상은 언제나 한결같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함경(阿含經)』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마음이 더러운 까닭에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한 까닭에 중생이 깨끗하다.
마치 화가가 하얀 바탕의 종이에 갖가지 색을 칠하여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내듯이 마음도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오온(五蘊)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생사의 사슬에 묶이고 오온에 대한 실(實)다움으로 하여 해탈을 얻는다.
그렇듯이 우리들의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몸뚱이가 소중한 만큼 우리에게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음을 항상 가꾸고 다듬고 청결하게 간수하여 일체의 중생을 사랑하고 바른 진리를 깨우치는 대도(大道)에 주저 없이 동참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대도를 이룬 사람을 깨달은 자, 각자(覺者)라고 한다.
그러면 중생과 부처님이 둘이 아니고, 미혹함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고 했으니 우리도 부처님, 즉 각자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부처님이라 하겠지만, 미혹한 중생은 번뇌와 망상 속에 묻혀 사는 어두운 부처님이라 할 것이다.
광석을 뽑아내듯이, 우리들도 광석이 거쳐야 하는 제련과정을 요하는 부처님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6년 동안 갈고 닦은 고행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얻었고, 신과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셨기에 더러운 때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부처님이 된 것이다.
제련과정을 소홀히 하고 게을리 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될 수 없다.
『화엄경』에서처럼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는 심즉시불(心卽是佛)의 경지도 제련과정 없이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어서는 안 된다.
요즈음의 세태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경구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제련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부처님이 곳곳에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을 잘 가꾸고 다루는 사람에게 부처님, 보살, 현인, 위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부른다.
그렇지 못하고 마음이 삐뚤어져 엉뚱한 방향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악당, 죄인, 폭군이라 한다.
이 또한 마음이 부리는 조화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바른 마음을 쓸 줄 알면 신들도 기뻐할 것이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조절하여 부드럽고 순하게 가지라.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며 귀신이나 축생, 혹은 지옥까지도 만든다.
그러니까 마음을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
그러면 보살의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보살의 마음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 즉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대표한다.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마음이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보면 사무량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무량심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부끄러움을 알고, 나쁜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말이 부드러워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스스로 착한 행(行)을 하여 사람들에게 조경을 받으며, 지나치지 아니하고 실책을 범하지 않고, 자비를 널리 베풀어 펼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 경에서는,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은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없애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말 한다.
더욱이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17권에 보면, 중생에게 행복을 주는 자비가 몸과 말과 뜻의 삼업에 두루 통하여 있는 것이니, 이 평등의 조건은 마음뿐 아니라 몸과 말로써도 충분히 그 진의를 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자’는 사랑이다.
자식에 대한 모정이나, 부부 사이의 사랑이나, 연인들 사이의 사랑이 아니다.
끝이 없는 광대무변한 인연의 사랑이다.
어찌 불보살의 한없는 사랑을 감정의 틀로 재량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커다란 맹서의 사랑이며, 고통을 여의고 최상의 기쁨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대원력(大願力)에서 풍기는 덕심(德心)의 그늘이다.
보살은 사랑은 중생의 고뇌와 번뇌를 제거하는 사랑이요, 생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랑이며, 또한 중생에게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길을 열어주어 해탈과 열반의 저 언덕(彼岸)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진정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곧 보살의 대자비이다.
‘비’는 또한 일체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三毒)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가련하게 생각하여 대해탈문(大解脫門)을 열고, 네 가지 큰 바람[四弘誓願]의 실천을 쉴 사이 없이 행하는 것이 보살의 대비행(大悲行)이다.
‘희’는 기뻐하는 마음이다.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 환희심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과 불평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들에게 환희안락(歡喜安樂)하게 하는 것이 보살의 대희심(大喜心)이다.
‘사’는 오욕탐진(五慾貪嗔)과 번뇌망상을 버리자는 뜻이요, 나의 모든 것을 버려서 베푸는 보시행(報施行)에 아낌을 두지 말자는 뜻이다.
중생을 위하여서 무엇이든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정신이 곧 보살의 대사심(大捨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욕에 찌든 마음을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서, 보배로운 보살의 마음 씀씀이의 도리를 본받아 부처님이 중생 제도하는 참된 길을 밟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