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 (5)중아함경

『중아함경(中阿含經, Madhyamagama)』은 60권으로 되어 있는 경으로, 불교의 근본 교리가 이론화되는 초급 경전 구실을 하고 있다. ‘중아함(中阿含)’이란 본래 중간쯤 되는 길이의 설교를 모았다는 뜻으로 ‘장아함(長阿含)’처럼 길지도 않고 ‘소경(小經)’처럼 짧지도 않은 중간의 경이란 뜻이다.

이 경의 중요 내용은 그 교의가 4제(四諦) 12인연(十二因緣) 등이며 그 외 많은 인연 비유가 설해져 있다. 다소 지리한 교설이 거듭 설해지고 있지만 수도자의 언행에 대한 것과 소승의 불타관을 명시해 놓은 전형적인 경이기도 하다. 불교의 근본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교의로서 불교의 인생관, 생활관 그리고 수행자의 수도관을 명시해 놓은 것이 사성제 법문이다. 다시 말해면 불교 교리의 핵심인 이 사성제(四聖諦)는 『중아함경』에 설해진 부처나 말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모든 불교 경전에 공통으로 설해지고 있다.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라는 뜻인 사성제(四聖諦, Cat?ri-?ryasatyvni)는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이다. 불교의 관점은 인생을 괴로움이라 보는 데서 시작된다. 괴로움을 직시하고 이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것이 불교이다.

고(苦)란 범어로 ‘Dubkh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이 드는 것을 말하며, 현대적 개념으로 불안·초조·갈등 따위가 모두 고(苦)의 개념 속에 포함된다. 불교는 인생의 시작에서 끝까지가 고통이라고 설명한다. 태어나는 것에서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통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끼리의 관계와 세상의 갖가지 경계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애별리고(愛別離苦)라는 것이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느끼는 고통을 말하며 반대로 원증회고(怨憎會苦)는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괴로움이다. 사람에게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환경에서 볼 때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잃게 되면 괴로워지는 법이요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당하게 되면 또한 괴로워지는 것이다.

원하는 바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것 또한 고통이다. 이것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라 하여 구불득고(求不得苦)라 한다. 또 사람의 몸 육체의 생리적 욕구 때문에 우리는 괴로움을 당하는데 이것을 오음성고(五陰盛苦)라 한다. 오음(五陰)이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곧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다. 육체란 의식주를 필요로 하며 이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생리적으로 고통을 당한다. 배고픔이나 목마름 또 추위나 더위로 인해 육체가 겪는 고통은 모두 오음성고(五陰盛苦)이다.

고(苦) 자체의 성질을 나누어 설명하는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의 삼고(三苦) 설명도 있다. 고고(苦苦)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외부의 조건에서 오는 고통이다. 날씨가 추워지거나 더워지는 것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환경으로부터 오는 조건에서 당하게 되는 고통이다. 행고(行苦)란 변화되어 달라져 버리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현상의 모습에서 볼 때 본래대로 존속되는 것은 없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도 하나의 행고(行苦)에 해당된다. 괴고(壞苦)의 괴(壞)자는 ‘파괴된다, 부서진다’는 뜻이다. 좋았던 일이 끝장났을 때 아쉽고 허전해진다. 부서진다는 것은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요 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는 것은 크나큰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고(壞苦)이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말이 있다.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四法)에서 설해지고 있는 말로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는 것은 인생과 세상을 고통으로 보는 불교의 관점이다.

『아함경』에서 설해지는 대의(大義) 중 가장 중요한 네 가지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고(苦, dubkha), 무상(無常, anitya), 공(空, ??nya), 무아(無我, an?tman)이다. 괴로움과 덧없음 그리고 실체 없는 헛된 것과 ‘나’라는 것이 없다는 이 네 가지 말씀이 바로 『아함경』 전체에 설해져 있는 부처님이 가장 자주 말씀하신 대표적인 말씀이다. 이것을 설해 놓은 것이 부처님이요 이것을 설하지 아니하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비구여, 너는 저 일체의 모든 것이 멸하여 없어지는 것을 본다. 비구여 네 뜻엔 어떠하느냐? 색(色은) 항상한 것인가? 덧없는 것인가?”

“덧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덧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괴로움인가? 괴로움이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대화 속에 고(苦)를 설하고, 이 고(苦)가 무상(無常)과 연결되어 설해지고 있다. 고는 인간과 그 주변의 현실 경계가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임을 결과적으로 결론지어 놓은 것이다.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세상은 무상한 것이다. 이 정의를 내리고 다음에 고(苦)의 원인을 찾아낸 것이 집성제(集聖諦)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1월 (제26호)

초기경전 (4)장아함경

<장아함(長阿含經, Dirghagama-sutra)>은 남전 팔리어 본(本)의 {장부(長部)}와 같은 것인데 전부 22권으로 그 내용이 30개의 소품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과거 칠불(七佛)의 태어나고 출가하고 수도하고 성도하고 설법하는 등 8가지 장면을 설해 놓은 대본경(大本經)에서부터 기세경(起世經)까지 여러 가지 내용이 설해져 있는데, 결국 부처님의 해탈도를 설하고 더 나아가 중생을 교화하는 구제의 길과 신앙을 이야기한다. 미륵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일부 나오고 염불사상과 탑사(塔寺) 공양의 공덕을 찬탄해 놓은 내용도 있다.

그리고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말씀이 설해져 나온다. {전륜성왕 수행경}에 나오는 이 말은 불교의 인본주의(人本主義) 법본주의(法本主義)를 설파해 놓은 말로 진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법, 다르마(Dharma)라는 것이다. 때문에 무엇을 의지하여 수행하느냐 하면 그것은 곧 자기를 의지하고 법을 의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의지할 곳은 자기밖에 없으니 그 밖에 무엇을 의지할 게 있으리오.

자기가 자기를 조복할 때에 아주 희귀한 귀의처가 생기리라.

등명(燈明)이라는 것은 등불이 밝다는 말이다. 자신을 등불로 삼아 밝히고 법을 등불로 삼아 밝혀 간다는 뜻이다. 어느 때 부처님이 라자그라하에서 인간에 노닐다 일천이백 비구들을 데리고 바이살리에 도착하였다. 그때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말라. 자기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여 다른 데 귀의하지 말라.” 이것이 그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법문이다.

불교의 수행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하는 자력 수행이다. 물론 신앙적인 방편에서 본다면 불보살께 귀의하고 의지하는 의타적인 요소가 있겠으나 궁극적인 깨달음의 성취는 자기의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력 종교라 하며, 사람이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본위의 수행이므로 인본주의 종교라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특징이다.

<아함경>, 특히 이 <장아함경>에 불교의 대본(大本)을 바로 설해 놓은 것이다. 인본주의 자력 종교인 불교이기 때문에 부처와 중생은 깨닫고 깨닫지 못한 차이는 있지만, 그 근본은 같다는 것이다. 후에 대승경전(大乘經典)이 나오면서 이 뜻은 더욱 강조되어 설해진다. ‘내가 깨달으면 내가 곧 부처다’라는 이 논리는 부처를 인간 안에서 찾고 인간 밖에서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이 성불하여 부처와 동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시켜서 보는 높은 인격이 부처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아함경>은 제번국의 삼장이었던 불타야사가 축불념과 함께 후진 홍시(弘始) 16년(서기 413년)에 번역하여 <한역대장경>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장아함경>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속하여 경전으로는 다른 아함과 함께 부처님 초기설법의 전형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장아함경>을 읽다 보면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제9중집경>에 보면 부처님이 등이 아파 고통을 느끼자 부처님을 대신하여 사리불(Sariputra)이 설법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처님이 몸이 불편하여 제자가 대신 설법을 하는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대승경전에는 나오지 않는 아함경다운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12월 (제23호)

초기경전 (3)연기법을 설명한 아함경

모든 부처님 경전 가운데 가장 원형이 되는 경이 『아함경(阿含經)』이다. 부처님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과 수행가풍의 면모를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경은 역시 『아함경』이 으뜸이다. 흔히 이 경을 소승경전(小乘經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대승경전의 근거가 되는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의 근본 교리가 이 경을 중심으로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 천태의 5시설에서 말하듯이 부처님이 성도한 이후 8년간 설했다는 초기 설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5시설이란 부처님 일대 시교(時敎) 곧 평생 동안 하신 설법의 그 시기를 다섯으로 나누어 분류를 하는 것을 말한다. 아함시(阿含時), 방등시(方等時), 반야시(般若時), 법화시(法華時), 화엄시(華嚴時) 이렇게 대표적인 경전 이름을 들어 그 설법한 순서와 시기를 설명한다.

‘아함’이란 말은 범어 아가마(?gama)라는 말을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로 뜻을 번역하면 법을 전한다는 ‘전교(傳敎)’의 뜻이 된다. 처음 경을 결집할 때 대가섭의 물음에 대하여 아난이 대답한 것을 대중들이 다시 외워서 완성한 것을 부처님의 설법이라 하여 전해 왔다는 뜻이다. 어느 경전보다도 사실의 구체성이 밝혀진 경이므로 원시불교 시대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상태와 철학적 사상의 배경을 알아볼 수 있고 그 배경 속에 부처님의 해탈도(解脫道)가 어떻게 설해졌나를 알아볼 수 있는 경이다.

부처님의 해탈도라 말했지만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인데 그 깨달은 경지를 동적으로 말할 때는 해탈(解脫, mok?a)이라 하고, 정적으로 말할 때는 열반(涅槃, nirv??a)이라 한다. 해탈이란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요 열반이란 고요히 평화스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보충해 말하자면 해탈이란 나고 죽는 생사운명(生死運命)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고, 열반이란 번뇌를 일으키는 욕망·망상 따위가 완전히 쉬어졌다는 뜻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자유와 평화라는 뜻이 된다. 자유와 평화는 이 세상[此岸] 저 세상[彼岸]의 목표이다.

『아함경』에는 주로 해탈의 방법을 구체적인 수행 방법으로 제시하면서 설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아함경』은 다시 한역 경전에서도 네 가지가 있고 팔리 어 본(本)인 남전 계통에서는 五部[5Nik?ya]로 다섯 종류가 있다. 이른바 『장아함(長阿含經)』, 『중아함(中阿含經)』, 『잡아함(雜阿含經)』, 『증일아함(增一阿含經)』은 한역의 ‘4아함’이고 『장부(長部)』, 『중부(中部)』, 『상응부(相應部)』, 『증지부(增支部)』, 『소부(小部)』는 남전장경 팔리 어 본의 ‘5니가야’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11월 (제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