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은 어디인가
월서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피안은 결코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생각 버리면 저절로 찾아와 어느 때 세존이 사밧티 교외의 제타 숲에 있을 때였다.
그 때 제자 아난다가 세존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여래, 아라한, 옳게 깨달으신 분이 세상에 없는 동안 외도들이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존께서 나심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동안에는 반딧불이 빛을 낸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그 빛은 점점 사라져 반딧불은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된다.
외도(外道)의 빛 또한 그와 같다.” 세상은 항상 ‘양극단(兩極端)을 이루고 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기 마련이다.
이 극단은 하나가 멸(滅)하면 다른 하나가 새롭게 생성된다.
부처님이 반딧불의 비유를 통해 외도들의 멸을 예견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을 꾸짖는 이 설법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던져준다.
이와 같이 세상은 바른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고 옳지 않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바른 것이 더욱 빛을 발한다.
여기에 수행의 깊은 정신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숨을 쉬며 살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두고 항상 이상형의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형의 세계가 다름 아닌 피안이다.
원래 피안(彼岸)이란 이쪽이 아닌 ‘저쪽 언덕’이란 뜻이다.
수행자는 언제나 저쪽 언덕을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있으며 그 피안에 가기 위해 모든 성력(誠力)과 수행을 기우려 정진하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피안의 실체를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 피안을 두고 해탈의 경지, 성불, 깨달음, 꿈, 희망 등 수많은 언어로서 그곳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막연한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도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쪽 언덕’이란 과연 어떤 곳이기에 우리들이 그토록 열심히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을까? 또 ‘저쪽 언덕’이란 현실적으로 우주 어느 한구석에 정말 있는 것일까? 이 피안을 두고 불교에서는 극락이라 하고 예수교에서는 천당이라 하였으며 혹은 유토피아니 파라다이스니 하는 이상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불교에서는 이 피안을 두고 극락이란 뜻과 동일한 어의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불교에서는 피안을 두고 하나의 가설된 세계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이 우주 안 어느 구석에 실재한 세계로도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피안이니 극락이니 하는 말들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소화시킬 것이며 어떻게 합법화 할 수 있을까? 아니 합법화가 아니라 대성(大聖) 석가세존의 참마음이 무엇이며 이러한 세계는 실재 어느 곳에 있을까? ‘피안으로 건너간다.’ 이를 단순하게 풀이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개념이다.
마치 강물이 있는데 이쪽 기슭에서 배를 타고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 같은 관념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반드시 죽어야만 피안으로 가는 줄로만 알고 있다.
『화엄경』에 보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와 중생성불찰나중(衆生成佛刹邪中)’이란 말이 있듯이 피안이란 곳에 도달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든 어리석은 생각만 완전히 제거가 되면 찰나에 그것이 피안인 것이다.
결국 피안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사악한 생각들과 어리석은 생각들을 버리면 자연히 피안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