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스님─불교란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

불교란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

-무진장스님-

우리는 지금 정신적으로 대단히 황폐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고상한 시민의식은 없고 시민의식이 점점 천박해져서 실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까지 이르렀다.

불교적으로 보면 ‘탐진치’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 차 있다.

이런 점에서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근본을 생각해서 청렴하고 담백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다.

그 이치를 깨달으면 인격을 완성시킬 수가 있다”고 설법하셨다.

그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무엇이 옳은 길이고 무엇이 옳지 못한 길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자기만이 최고이면 스승이 있을 까닭이 없다.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지혜롭게 살아야 된다.

불교는 엄격히 말하면 믿음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단순한 믿는다가 아니다.

불교는 수행 이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우리는 부처님과 같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

부처님과 같은 판단력을 가지고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은 어떠하냐.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여러분은 육신이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몸뚱아리는 여러분 마음이 갖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중요한 거지, 육신이 중요한 건 아니다.

육신에 치우친 인생은 중생적인 것이고, 마음을 바로 쓰면 부처님과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컵 속의 물은 물일 때는 얼음그릇 속에 비워도 꼭 맞는다.

무슨 그릇에 비워도 꼭 맞는다.

그러나 이 물이 한 번 얼어버리면 맞는 그릇이 없다.

이 물이 꽁꽁 얼어서 얼음물이 돼서 얼음그릇에 담지만 맞는 그릇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어떠하냐.

각자 마음이 경색돼서 얼어붙어서 부부도 안맞고 부모와 자식도 안맞고 형제도 안맞고 이웃과 이웃이 서로 안맞는다.

각각 살고 있는 것이다.

얼음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처럼 살아야 될 것이다.

그래서 노자도 물처럼 사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 했고 공자는 물처럼 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에서 “적정을 길러라, 고요하게 살아라, 고요 속에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적정이란 말은 고요 ‘寂’, 고요 ‘靜’자를 쓴다.

“ 고요하고 고요하게 살아라.” 지금 여러분들은 그 고요 속에 들어가면 길이 열릴 것이요, 그 고요를 모르면 인생은 실패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익한 것만 추구한다.

자기에게 이익되는 것이 아니면 안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익한 것 속에 ‘화(禍)’가 들어가 있다.

만약 물고기가 미끼 속에 낚시가 있다는 걸 알면 그걸 물겠는가.

낚시가 있다는 건 뭐냐.

사람이 어떤 ‘이(利)’ 것을 추구하는데 그속에 ‘화’가 들어있다는 걸 알면 덥석 물지 않는다.

요새 그것을 알지 못하고 덥석 물었다가 교도소에 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익한 것 속에 ‘화’가 있는 줄 모른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항상 습관적으로 자기를 구한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부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심지라 했는데 마음 ‘心’, 땅 ‘地’.

마음의 바탕이다.

그 마음의 바탕이 어떤 거냐.

마음을 너그럽게 쓰는 사람과 인색하게 쓰는 사람이 있다.

마음을 너그럽게 쓰는 사람은 탱자를 심어도 유자가 되는 수가 있다.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옹색한 사람은 유자를 심어도 탱자가 된다.

자기를 돌아 볼 줄 아는 의식이 있어야 된다.

지금 여러분이 자신을 돌아볼 때 굉장히 어리석은 존재임에도 자기를 돌이켜서 반성해 본 적이 없다.

무엇이 바쁜지 무엇에 시달렸는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려는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법문은 신비하고 이상한 얘기가 아니다.

인간이 바르게 살아나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유마힐 거사 어록 중에, “마음을 곧게 쓰는 것이 보살 정토다”란 말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직심(直心)’이 없다.

곧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없다.

마음이 깊고 깊은 것이 보살 정토고 마음이 깊고 깊은 사람이 극락정토에 가는 것이다.

지혜의 마음이 이 극락 정토에 가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란 판단력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에 대해 판단이 명석한 그런 이해를 돕기 위해 부처님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바깥 세상만 바라보면 온통 뒤집히는 것 같아도 여러분의 심성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부동의 세계가 있다.

동요하지 않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

그래서 사자가 사람에게 달려들 때 사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흙덩어리를 주물러서 휙하고 던지면 그것에 관계없이 사람을 무는 건 사자의 지혜다.

개에게 흙덩어리을 주물러서 휙하고 던지면 사람에게 달려들다 말고 흙덩어리을 물고 가는 건 개의 습성이다.

중생은 사자와 같이 살아야 된다.

그 지혜의 능력이 그만큼 이치의 세계가 다르다.

마음의 바탕에 어지러움이 없는 정당한 마음과 지혜를 닦아야 된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여러분의 심성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마음을 연주할 줄 아는 마음도 있어야 된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거문고가 있어도 그 나라 국민이 연주하는 솜씨가 있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그런데 연주할 만한 솜씨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서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을 못 만나면 피장파장이다.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 마음을 살피지 못하면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유익한 바가 없다.

항상 자기가 자기 마음을 살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그 성품이 궁하여 다하지 못하면 좌선염불해도 이익한 바가 없다.

정법을 믿지 못하면 법이 밝은 것을 믿지 못한다.

애써서 고행 수도를 해도 이익한 바가 없다.” 결국 불교라는 게 뭐냐.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다.

“ 닦아라.” 마음을 닦아야 될 것이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불교를 믿는 사람의 절개가 있어야 된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경전을 알고자 할진데 마땅히 그 뜻을 밝히기를 허공과 같이 하라.

망상과 모든 고뇌를 멀리해서 마음에 향하는 바가 다 걸림이 없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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