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스님─오늘을 사는 지혜

오늘을 사는 지혜

무진장스님

제일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출가를 했는가.

출가 동기를 먼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적어도 6∼7세에서부터 거의 12년에 걸쳐서 베다사상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그 사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하나는 업사상이요, 나머지 하나는 윤회사상입니다.

업사상과 윤회사상을 들면 불자들은 상당히 익숙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교의 중심사상이 아니라 베다사상 가운데 있는 것이지만, 교육의 타당성에서 불교가 상당수를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에 중류 이상의 사회의 아들들은 이와 같은 교육을 다 받게 되는데, 일반인으로서 국왕 대신에 아들들은 업사상이나 윤회사상 이외의 어떠한 사상도 생각해 낼 수가 없던 때입니다.

우리는 성도자로서의 부처님을 두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6∼7세에서 12년동안 그 사상을 공부한 부처님과 29세에 출가해서 35세에 성도한 부처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그 사상을 공부함으로써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부처님은 대단히 활발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했습니다.

업사상이나 윤회사상 이외의 어떠한 사상이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하고 생각했습니다.

카스트 제도라는 사회의 모습을 볼 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것인데 왜 이러한 계급이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번민이 있었고, 나를 낳아준 우리 어머니는 어째서 일주일만에 서거하셨는가 하는 이러한 번민도 거듭한 것입니다.

계급문제의 타파와 개개인의 생로병사에 시달리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에게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존재하는데 그러한 행복들은 왜 순간적인 것일까.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부처님은 출가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출가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중류 이상 사회의 아들들은 출가해서 수도하는 것이 거의 풍습처럼 되어 있어서 부처님께서도 그러한 풍습에 의해서 출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29세에 출가한 부처님은 청년기를 그렇게 지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만 그러한 청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에 그러한 청년이 존재하는데, 오늘의 시대에 사는 청년의 고민은 무엇인가.

과연 부처님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오늘의 청년들의 고민은 매우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고민, 그 욕망 하나만 해결되면 안되는 일이 없고 모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의 고민입니다.

부처님의 시대에 살았던 청년들의 고민과 오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고민은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설문조사에 의하면 노인을 공경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오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답변 80퍼센트가 공경할 필요가 없다.

왜 노인들은 권위주의를 가지고 있느냐, 버스 안에서 어째서 자리를 양보해야 하느냐 그럽니다.

인과응보를 모르는 오늘의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러한 문제점도 바로 경제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60년대 초 군사혁명 이후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 맛을 알게 된 것은 불과 30∼40년밖에 안됩니다.

경제적인 욕망 하나 때문에 부모를 해치고 형제를 괴롭히고 남편을 죽여서 보험금을 타 먹고, 그런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사회가 돈 때문에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범죄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백의민족이니 슬기로운 배달민족이니 위대한 단군의 자손이니 하는 구호가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을 할 때, 이 시대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하게 사는 시대가 될까 하는 그러한 고민은 누구나 했을 것입니다.

유사이래로 오늘처럼 정치가 부패하고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종교사회마저 병리현상을 낳으며 부도덕하게 망가져 버린 적은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지붕 아래에 일곱 식구 여덟 식구를 위해서 죽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어떠합니까? 일곱 식구 여덟 식구가 다 죽어도 나는 못 죽는다는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부지런히 돈 벌어서 부모님께 효도 한 번 하려고 했는데, 일찍 돌아가시고 나면 하늘이 노랗죠.

그래서 부지런히 벌었던 돈도 형제에 나누어줘 버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다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눈물 한 방울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죠.

녹음기 하나 갖다 놓고 우리 몰래 땅 사 놓은 것 있으면 빨리 말하고 죽어라.

지금 우리는 그런 처지에 살고 있습니다.

전국의 교육계에도 세월이 흐르면 월급타면 그만이고 잘되고 못되는 것은 네 운명이지 성의있게 교육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될대로 되라.

기술교육을 하지 인성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국민이 과연 살 수 있는 길이 될까.

불교사상을 통해서 볼 때, 컵 속에 물이 담겨져 있는데 그 물이 물일 때는 어느 그릇에 부어도 꼭 맞습니다.

이 물이 얼어 버릴 때는 맞는 그릇이 없습니다.

지금 완전히 얼어 버린 우리 국민들의 정서를 녹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이 잘 사는 길이 무엇이냐.

석정을 즐겨라.

고요를 즐겨라.

와글와글 들끓고 있는 인식이 비정상적인 지금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적정과 고요를 즐길 수만 있다면 잘 살 수 있다고 봅니다.

들끓고 있는 한 자기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자기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안목으로 조국을 보고 국제를 보아야 합니다.

棄濁染하고 發妙明하라.

능엄경에 나오는 아주 짧은 말씀입니다.

우리 한 생각 가운데 탁한 생각을 버리고, 묘명을 발하라.

원각경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斷無明하여 顯佛性하라.

어리석은 무명을 끊고 불성을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인이 말하고 있는 이 마음의 본성, 청정한 본성이라는 것은 닦아서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청정한 것입니다.

본래 청정한 본성, 닦을 필요조차 없는 본성을 아는 깨달음의 종교가 불교요, 알아야 하는 것이 불교인 것입니다.

부처님만 믿어서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믿고 있는 내가 身·口·意 三業이 청정해야 된다는 지도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정마니보주, 우리 본성 본래의 성품이 다이아몬드와 같아서 무색투명한 것입니다.

오색찬란한 것이 아닙니다.

오색찬란한 것은 바깥 경계를 받아 들여서 빛나는 것이지 그 자체는 색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조스님은 전렴청정을 후렴청정이 부촉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성품도 그와 같아서 원래 아무것도 없는 것, 전혀 없는 것을 일러 우리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한 마음의 세계가 전렴인 것입니다.

여기에 생각을 일으키면 후렴이 일어날 때에는 매우 정당한 것입니다.

전렴청정을 후렴청정에 부촉할 때만 인식이 정당해지는 것처럼 우리 일상 생활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적정을 즐겨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물질로 푸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의 안식을 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말씀으로 끝맺음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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