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국(迦尸國)

고대 인도의 16대국의 하나. 카쉬라는 이름의 대나무가 많이 산출되었던 까닭에 생긴 지명. 加尸 國, 伽翅國이라고도 적는다. 중인도의 *마가다국(摩伽陀國)의 서쪽, *교살라국( 薩羅國)의 북쪽 에 위치한다. 수도인 바라나시(V r as )는 현재 베나레스에 해당한다.

숟가락은 밥맛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한다. 나라마다 식사법이 달라 서양 사람들은 포크나 나이프 등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밥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는 대부분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고 있다. 숟가락에 밥을 떠서 입에 넣어 이를 씹으면서 맛을 느끼며 식도락을 즐기는 것이 사람의 식사다. 먹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몸을 유지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은 일에 앞서 식사를 먼저 하는 것이다. “식사를 하셨습니까?” 하는 인사말은 “일 할 준비가 되었습니까?”라고 뜻을 바꾸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좋은 구경거리가 있어도 배고픈 사람에게는 식사가 우선이다. 먹는다는 본능, 이것이 가장 시급한 일차적인 생존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일차적인 생존의 문제가 걸린 식사가 맛을 즐기는 식도락의 차원으로 발전해 음식의 고급화를 추구해 온 것 또한 문화나 문명의 발달의 한 페이지이다. 더구나 경제의 지수가 높아진 시대에 와서 음식의 값도 엄청나게 높아진 것들이 있다. 서울의 어느 고급호텔의 식당에는 일인분 식사대가 20만원이 넘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밥 한 끼에 20만원이라면 하루에 60만원, 한 달에 18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매일 그러한 고급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의 고급화에 편승해 식사도 비용지수가 그만큼 높아진다는 이야기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가치비중의 제고에 의해 향상일로를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목하 우리 사회는 수많은 가치의식이 범람하여 매우 혼란스럽다. 사람 사는 생활에 있어서도 서로 추구하는 취향이 다르고 삶의 의미를 다르게 느끼고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A에게는 아무 의미 없고 몰가치한 것이 B에게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며 그것 없이는 못산다고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래서 가치의식의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

가치의식이란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이나 여기에도 보편적이고 타당하다고 자타가 수긍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일방적 편견으로 주장하는 가치는 개인의 사사로운 영역을 넘어서 보편화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음식에 미각을 느끼는 것이 다르고 선호하는 음식이 다르듯 개인의 사사로운 가치 의식이 무시될 수는 없어도 개인의 사적인 의식이 우선적으로 앞서 공적인 것에 반하는 상황이 된다면 이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주장하는 가치의식 때문에 남에게 피해가 끼쳐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의식이 앞선다는 것은 곧잘 남으로부터 도전을 받는 뜻하지 않는 복병을 만나기도 한다. 사람의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오래된 것이며, 자기화 된 것이듯이 때로는 사람 일이 무의식적으로 행해질 때가 더 좋은 수가 있다. 이것을 선수행에서는 무심도리(無心道理)라 한다. 번뇌가 가라앉은 무심의 경지에서는 자기 하는 일은 자기가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독서삼매에 든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읽는 줄 모르고 읽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른바 무아지경에서는 주위가 의식되지 않고 한 생각에 머물러 주객의 대립이 쉬어져 버리기 때문에 삼매 속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도 “국을 퍼는 국자는 국맛을 모른다.” 말이 있다. 숟가락은 밥맛을 모른다는 말과 똑 같은 뜻이다. 일을 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삼매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밥맛이나 국맛을 모른다는 것은 정신일도가 되어 맛을 느끼는 의식의 운동이 중지되었다는 뜻과 반대로 어떤 일을 하여도 왜 그 일을 하여야 되는지 본뜻을 깨닫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면서 자각을 못한다는 두 가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나는 무위심(無爲心)으로 함이 없이 한다는 주객의 대립을 벗어난 마음을 말하고 또 하나는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불각심(不覺心)을 경책하여 자각을 환기시키는 말이 될 수 있다. 한 편 나 아닌 남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괴로워 질 때 사람의 입속에 밥을 떠 넣어 주면서고 밥맛을 모르는 숟가락처럼 한결같이 남을 위해만 주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면 이 사람은 바보가 아니라 부처님이나 보살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무엇이든 쉴 새 없이 무심히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09년 9월 106호

도력(道力)이 업력(業力)을 이길 수 있으려면

스님들이 강원에서 배우는 ‘書狀(서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송나라 때의 임제종臨濟宗 승려인 대혜선사와 사대부 간에 주고받은 서간문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선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간화선(看話禪:公案禪)에 대한 독창적인 전개로 사상계(思想界)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의미있는 서간문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강원에서 서장을 읽다가 ‘선(禪)’의 미묘한 경계에 환희심을 내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선방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학인들도 있었다고 하니 대혜스님의 심오하고 뛰어난 경지와 문장력에 새삼 감탄할 따름입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잠시 일전에 배웠던 글들을 되새기던 중 꽤 의미 있게 다가온 구절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근기가 날카롭고 뛰어난 이는 무엇을 이루고자 할 때

힘을 들이지 않고 마침내 쉽게 이루려는 마음을 내어

문득 수행하지 않고 대게 눈앞의 경계에 끄달려 본 마음을 주재하지 못하니,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 미혹하여 돌이키지 못하다가

결국 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하게 됨이라”

우리들 개개인의 성격이 다르듯이 가지고 있는 근기 또한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그리하여 근기가 수승하여 조금만 기도하고 수행하여도 성취를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수행이나 기도에 있어 성취를 보기 어려운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저 또한 둔근기인지라 성취가 빠른 도반들을 볼 때면 늘 부러운 마음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저 스님은 전생에 얼마나 수행을 했기에 저렇게 빨리 성취가 되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근기가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이 안다고 ‘관문상(늘 들었던 법문이라 하여 소홀히 하는 자만심)’을 내어 스승님과 도반들의 가르침을 가벼히 여기거나 ‘용이심(쉽게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 무엇이든 손쉽게만 이루고자 한다면 결국 신심에 바탕한 꾸준한 정진력을 잃어버리고 대상경계에 휘둘려 본심(本心, 근본 마음자리)을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본심을 놓쳐버리게 된다면 모든 것을 자기 근본마음 자리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탐진치 삼독심이나 아만심, 집착심, 의구심이 만들어낸 업業의 자리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지혜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면 자기 주관적인 시각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시각, 즉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욕심과 집착, 어리석음으로 덧씌워진 ‘자기생각’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이 바로 업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업이란 불자님들도 다들 잘 아시고 계시듯이 욕심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세 가지 독한 마음을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짓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에 대하여 대혜선사는 “도력이 불승업력이라(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고 하여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남들보다 조금 나은 위치에 있다고 하여 사람이나 대상을 무시하고 가벼히 여긴다면 결국 업보의 굴레에 빠져들 것이며, 반대로 나의 주변상황과 능력이 남들보다 못하다고 퇴굴심을 내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려 하거나, 기도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목적지가 지척에 있는데도 어리석게 주저앉아 버린다면 이 또한 업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일만 참으면 인간 몸을 받을 구미호는 ‘늘 그렇듯이’ 마지막 단 하루를 참지 못해 인간의 몸을 받지 못합니다. 밤길을 열심히 달려가다 포기하고 주저앉았더니, 다음 날 아침 목적지가 바로 앞에 있었음을 깨닫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물은 99도가 아닌 100도에서 끓으며, 또한 1도가 아닌 0도에서부터 얼어버립니다.

늘 깨어있는 마음과 불퇴전의 정진심으로 기도하는 불자님들이 되십시오. 아만에 물든 관문상이나 쉽게 이루려는 용이심,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퇴굴심은 곧 우리 본마음에 갖추어진 도력(道力)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괴로운 업력(業力)의 굴레에 윤회하게 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습니다.

“달구어진 정진의 무쇠 솥에는

시련의 눈송이가 닿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립니다.”

정진합시다!

신경스님, 월간반야 2010년 10월 제1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