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하는 이유

다들 그랬지만 예전엔 버릴게 없어서 버리지 못했다. 적어도 오두막이라도 내 집을 갖기까지는 말이다.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하나라도 모으면서 산다는 게 행복이었다. 살림살이 가재도구, 책 한권이라도 늘어나는 게 대견스럽고 며칠을 두고 보고 또 보곤 했다. 주거문화가 바뀌어 아파트 바람이 불고 난 한참 뒤에야 지인의 도움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버리는 문제로 고민을 해봤다. 이재(理財)에 관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좀 자주 이사도 하고, 집도 사고팔면서 살았다면 그때마다 불필요한 것을 버렸을 텐데 말이다.

꼭 20년 하고도 6개월 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노인네를 모시고 살다보면 아무리 젊은 사람들이 이사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하여 10여 년을 살고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니 환갑을 갓 넘긴 노모께서는 아침 식사 후면 3년 반을 어김없이 버스를 타고 예전에 살던 동네로 출근을 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는 아예 다시 이사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10년 쯤 살고는 혹시나 싶어 직장 가까이로 집을 옮기면 어떨까 하여 노인에게 뜻을 비쳤다가 “내 죽고 나거든 가거라!” 하는 한마디에 말문을 닫았다.

한 집에 20년 쯤 살다보니 자연히 이곳저곳 손 볼 곳이 생기고 불편한 점이 많아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간신히 노인네의 허락(?)을 받았다. “너희가 좋다면 가자.”는 석연찮은 대답을 듣고 이사한 지 한 달이 된 지금도 전전긍긍이다.

‘포장이사하면 쓰레기도 다 가져다 놓는다’는 말을 듣고는 몇 주일을 고민하여 이웃의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 아예 버릴 것, 텃밭에 갖다 놓을 것 등을 분류하면서 고민했다. 집의 크기는 비슷했지만 정말 이제는 빠듯한 것보다는 여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신적 물질적 여유도 중요하지만 시간적 공간적 여유도 찾고 싶었다. 전자와 후자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삶의 공간적 여유는 무언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작 이사를 해 놓고 보니 버리지도 못하면서 짐이 되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때는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좋아라 보던 가족사진들, 아내가 학창시절에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들어 가지고온 가리개와 곡식과 잡곡들로 모자이크된 작품들, 십여 년 전 교사불자회 회원들과 통도사 극락암에 들렀을 때 ‘경봉 큰스님’께서 주석하셨던 ‘삼소굴(三笑窟)’의 허물어진 담장 앞에서 아내와 같이 찍은 사진을 후배가 커다란 액자에 넣어 준 것, 예전에 직장 동료로부터 받은 40호 크기의 ‘관음보살’ 그림, 작고하신 선배의 개인전에서 가져온 유화, 40년 넘게 교단에 머물고 있지만 내세울 만한 제자가 없는 나에게 30년 전 문학동아리 ‘여명’의 제자이자 무명화가로부터 받은 정물 유화 1점,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 입주할 때 ‘외솔회’ 친구들이 입택 축하로 가져온 100호짜리 서화 등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어느 것 하나 사연이 없는 가재도구나 작품은 없다. 57년 전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집 재산목록 1호로 구입한 ‘재봉틀’, 52년 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들어온 ‘쌀뒤주’도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우리 서부 경남 방언에 ‘벌다’(일을 하거나 하여 돈이나 물건을 얻거나 모으다)의 쓰임에 ‘버리다’(예; “어디 갔다 왔니?” “돈 버리러 갔다 왔다.”)가 있다. ‘버리러’의 바른 뜻인즉 ‘벌이 하러’가 줄어서 되었겠지만, 방언에서의 겉모습의 으뜸꼴은 ‘버리다’로 겉모습이 같다. 따지고 보면 애써 ‘벌이’하여 잠시 곁에 두었다가 ‘버리’게 마련인 것 같다. 인연 따라 잠시 내 곁에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버리’든지 가치를 인정받으면 인연 따라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다.

당장은 좀 부담스럽지만 언젠가는 내 곁에서 떠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한결 가뿐하다. 언젠가 돌아가신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그 옛날의 집’ 마지막 행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의 심경을 빨리 닮고 싶을 뿐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2월 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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