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값 파동

“배추이파리(만원 권) 하나로 배추 한 포기 못산다.”는 말이 나오고, ‘김치가 금치’라는 오래 전의 망령이 되살아난 몇 주간이었다. 서민을 위한 정치, 생필품 가격 안정을 외치면서 5~6십개 품목을 정해놓고 중점 관리한다던 현 정부가 뒤통수를 맞았다. 중점 관리를 한다던 농산품, 공산품, 수산물 등은 항시 원자재나 자연재해 특히 기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 많다.

불과 2~3십 년 전만 하더라도 기후를 비롯한 자연재해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면서 생산자인 당사자만 피해를 입고 끙끙 속앓이를 하였고, 소비자는 얼마간 소비를 자제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자포자기하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태풍이 불어도, 냉해가 와도, 우박이 떨어져도, 폭설이 쏟아져도, 산짐승이 헤치고 지나가도, 병충해가 만연해도 내 탓이 아니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해결해 주고 보상해 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재해의 원인을 ‘천재(天災)’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인재(人災)’로 몰아가서 대책을 세우고 물질적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존립 근거는 물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물질중심주의가 지나치게 팽배하여 설령 자기 잘못이 어느 정도 인정되더라도 자기는 물질적 손해를 감수하지 않겠다는 사고에다,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다운 삶’에 대한 확실한 요구 또한 드센 상황이다. 이에 국가는 국민들의 강력한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요구를 수용하고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다.

정말 배추가 밥상에 올라오지 않으면 안 되는가. 배추를 먹지 않으면 못사는가. 배추가 매스컴을 타니까 덩달아 ‘굴’을 채취하고 양식하는 어민들이 김장철이 다가오니 걱정이라고 한다. 조금 있으면 마늘도, 파도, 고추도, 생강도 덩달아 시비를 걸어올지 모른다. 이렇게 ‘배추’가 매스컴의 머리기사가 되니 국회에서까지 시끄럽다. 그러나 정작 배추를 재배하는 농가와 농민은 별 말이 없다. 배추 값이 올라도 별로 득 보는 것이 없고, 배추 값이 내려도 별로 손해 보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미 밭의 배추는 대부분 수집상인 중간도매상들의 손에 넘어가고 없으니 말이다. 간혹 매도되지 않은 농가에서는 수입 물량을 비롯해 배추가 시장에 과다하게 출하되어 몇 해 전처럼 또 배추밭을 갈아엎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눈치다. 모자란다고 아우성치면 수입하면 되는데 남아돌 때면 어떻게 처리해주고 책임져 주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유별나게 언론이 다루어 주니 배추 값이 그나마 빨리 제자리를 찾아 다행이지만 극성스런 보도로 무심코 배추를 찾지 않고 넘어갈 사람들마저도 식당에서나 가정의 식탁에서 배추 생각을 하게 하지나 않았을까.

정부나 국정의 책임자가 진정으로 챙겨주고 사랑해야 할 백성은 누구인가.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애민’편에서 여섯 조항을 들어 제시한 게 있다. 힘없고 약한 노인들을 보살펴 주는 ‘양로養老’, 어린 아이들에 대한 부양과 교육인 ‘자유(慈幼)’,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진궁(振窮)’, 상을 당한 집안에 대한 배려인 ‘애상(哀喪)’, 장애인이나 중환자들에게 가능한 모든 특혜를 주는 ‘관질寬疾’, 끝으로 천재지변이나 인재를 당한 사람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넣어주는 ‘구재(救災)’를 강조하였다. 진실로 이번 배추파동에서 챙겨주어야 할 사람들은 이 마지막 ‘구재(救災)’에 해당하는 농민들이 아닌가.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이나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보살피고 챙겨주지 않아도 잘 산다. 진수성찬에 김치 하나 빠져도 괜찮다. 위에 열거한 여섯 부류의 사람들은 국가와 사회, 위정자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사람들이다. 부자나 대기업을 외면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중소기업, 소상인, 일반 서민들을 위하고,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을 돕는데 국정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배추 값의 안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애민정책愛民政策’에 귀를 기울이고 힘써야 할 것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1월 120호

발심(發心)과 욕망(慾望)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그 뜻한 바가 잘 이루어질 때, 그는 참으로 인간이 갖고자 하는 것을 얻어서 기쁘다. 그러나 욕망을 이루고자 탐욕(貪慾)이 생긴 사람이 만일 욕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그는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괴로워한다. 뱀의 머리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처럼 모든 욕망을 피하는 사람은 바른 생각을 하고, 이 세상의 애착을 넘어선다.”고 부처님께서는 ‘수타니파타’ 제4장 의품(義品)에서 이르셨다.

인간이 갖는 희망이나 꿈은 건전한 욕망이다. 바람직한 목적의식이나 사명감은 탐욕과는 다르다. 우리의 수행과정에서 발심(發心) 또한 어떤 목적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탐욕은 아니다. 조그만 소망이 아니라 궁극의 진리를 깨닫겠다는 마음 즉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것은 그릇된 욕망이 아니다. 신심(信心)과 발원(發願)은 탐욕이 아니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큰 원을 세워 그 ‘원의 힘[願力]’에 의해 태어나지만, 중생들은 자기가 지은 ‘업의 힘[業力]’에 의해 태어난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면서 어떤 꿈, 어떤 희망, 포부,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따라 삶의 향배가 결정된다. 기업이나 조직, 국가 또한 마찬가지다. 얼마 전의 일이다. 두 해 겨울을 무사히 넘기신 노모께서 대동강의 얼었던 물도 녹는다는 ‘우수’를 지난 즈음, 갑자기 고통스러워해서 휴일 오후에 입원을 했다. 검사 시간이 길어져서 병원 근처에 가서 당장 끼니를 때우려고 ‘죽’을 사와서 먹었다.

그 ‘죽’의 상표를 보면서 인상 깊게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그 죽을 만드는 회사의 직원들은 ‘가맹점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점주店主들의 성공을 돕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무릇 기업이라면 이윤의 창출과 극대화가 지상과제이겠지만 ‘이윤 추구’와 ‘가맹점 점주의 성공’, 어느 목표를 머릿속에 새기고 일에 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까.

외국계 어느 호텔에서는 종업원들에게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심어주기 위해 독특한 모토를 설정하여 교육한다고 한다. 내용인즉 ‘우리는 우리 호텔을 찾는 신사 숙녀들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진정한 신사 숙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멋진 슬로건이 아닌가.

우리나라 굴지의 보험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가 더 생각난다. 선대의 가업을 잇기 위해 대학교수직을 던지고 보험회사의 오너 사장이 부임하여 보험설계사(보험 모집인)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단다. “당신의 존재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사장의 물음에 설계사는 “보험을 팔기 위해”라고 답하니, 재차 사장은 “보험을 파는 것은 왜 중요한가?” 하니, “어려움이 생길 때 도움을 받을 수가 있어서”라고 답하였단다. 다시 사장은 “도움을 받는 것은 왜 중요한가?” 라고 물으니, “미래의 역경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물론 이 보험회사의 경영목표는 ‘고객이 미래의 역경에 부딪쳤을 때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리라.

허황된 욕망과 집착은 끊임없이 더 욕망을 향해 나아가 탐욕과 파멸만 남게 할 뿐이다. 뱀의 머리를 피하듯 모든 욕망을 피하라고 하셨으니, 가시적인 물질적인 것들을 탐내면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이 무력해져서 그들이 자기를 이기고 위험과 재난이 그를 밟는다. 결과적으로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마치 파손된 배에 물이 새어들듯 한다고 하셨다.

항상 바른 생각을 지키고, 욕망을 회피할 따름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3월 124호

손에 붙은 밥을 왜 먹지 않는가

사람이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을 두고 “손에 붙은 밥을 왜 먹지 않는가”라고 묻는 속담이 전해진다. 우리나라 속담인데 이는 “지금 무얼 하기에 손가락에 밥풀을 붙인 채 그냥 있느냐”는 질타성의 말로, “정신 차리라”는 뜻도 된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참으로 묘하다. 흔히 우리가 엉뚱한 생각을 왜 하느냐고 하듯이 정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엉뚱한 생각으로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팔려 쓸데 있는 일을 놓치는 수도 허다하다.

어느 날 부처님이 설법을 마치고 숲 속의 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청년 몇 명이 부처님 앞에 나타났다. 급히 서둘러 뛰어오던 청년 한 명이 부처님께 물었다.

“실례합니다. 오시던 길에 혹시 여자 한 명이 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보지 못했네. 그런데 여자를 왜 찾는가?”

“예, 우리가 야유회를 오면서 흥을 돋우기 위해 한 기생을 돈을 주고 데려왔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이에 지쳐 피곤하여 잠시 쉬면서 그만 낮잠에 떨어졌는데, 그사이 그 기생이 우리들의 소지품을 몽땅 훔쳐 달아나 버렸습니다.”

청년들의 설명이 끝나자 부처님은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말씨로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은 여자를 찾아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기 전에 먼저 찾아야 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대들이 유흥과 환락에 빠진 탓에 실종되어버린 그대들의 올바르고 참된 정신이다. 그대들은 잃어버린 정신부터 찾아야 하겠네.”

현대 사람들을 두고 자아를 잃어버리고 산다고 비평하는 말들도 오래 전에 나왔다. 롤로메이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Man’s search for himself)』라는 책이 나온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소지품을 잃고는 아까워 찾으려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는다는 매우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를 통해, 자기 점검을 하고 자기 회복에 힘쓰는 것이 인생의 책무라고 할 수 있다. 『맹자』의 「구방심장(求放心章)」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기르는 개나 닭과 같은 가축이 집을 나가 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집밖에 나가 그 가축을 찾으면서도 정작 정신 팔려 엉뚱한 곳에 보내 놓은 자기 마음은 불러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성품론(性品論)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이미 자기 자성 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내 행복이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으며, 나는 나로서 충분하다는 것이다. 나는 나 이상일 수도 없고 나 이하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에 나 홀로 가장 높다고 하였다. 자신은 언제나 절대적 자리에 자유롭게 처해 있다는 뜻이다.

언필칭 우리는 세상 살기 힘들다는 탄식들을 종종 한다. 사회제도 속에서 갖춰져야 할 조건이 미비하여 우리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감이 기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불만이 많을수록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갖는다. 사실 우리 현실에는 그릇된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현안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객관 경계를 평가하는 우리들의 주관기준에 기인한 판단일 뿐이다. 마음이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을 때 그 판단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문제는 내 마음을 비우고 전체를 정중(正中)하게 볼 수 있는 내 안목이 열려야 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친 편견으로는 옳은 관점을 가질 수 없다. 이치에 맞는 경우나 이치에 틀린 경우가 결국은 마음작용의 차이일 뿐으로,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 쓰는 용심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이 있다. 선도 있고 악도 있으며 정의도 있고 불의도 있다. 사랑도 있고 증오도 있고 진실도 있고 거짓도 있다.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미혹으로 인한 번뇌와 망상 때문에 마음은 항상 그릇된 쪽으로 잘 기울어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장애를 만드는 업장에 묶여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 업장을 푸는 일이 나를 바로 하는 일이다. 또한 내가 나를 찾는 일이다.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제쳐놓고 망령같은 미혹의 거짓자기에 속고 살아서는 안 될 일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548년 6월 제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