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암의 겨울

며칠전 눈을 맞으며 신발에 아이젠을 하고서 천하의 명산이라는 중국의 황산(黃山)에 올랐다. 손님이 별로 없는 비수기라 산 위의 호텔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옷을 있는대로 껴입고 이불을 겹으로 덮었으나 추워서 잠들기가 어려웠다. 날이 밝을 때까지 반야암의 온돌방을 생각했다. 내가 자주 가는 반야암의 무명재(無名齋)는 추운 한 겨울이 더 좋다. 겨울의 산사는 걸쩍대는 사람들이 없어 좋기도 하지만 더욱 좋은 것은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온기를 즐기는 것이다. 엉덩이로부터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구들장의 온기는 어깨를 거쳐 가슴을 지나 배를 훈훈하게 한다. 아니 온 몸의 떨림 같은 안온함은 내 가슴 속에서 변주된 것이다. 따뜻한 기운으로 충만된 몸은 드디어 머리를 텅 비게 한다. 온돌 선(禪)이다.

죽비소리가 없으니 잠이 스며들기도 한다. 그대로 영원으로 갔으면 하지만 파도에 배가 흔들리듯 나를 깨우는 불씨가 있어 다시 팔다리를 움직여 물살을 탄다. 지난날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지워 나간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듯 잔가지, 굵은 가지, 못난 잡목, 제법 미끈하게 보이는 소나무 장작들을 구들장 밑으로 밀어 넣는다. 처음에는 미련을 떨치지 못해 꽁무니를 빼다가도 서로 몸을 기대면서 활활 타오른다. 쓰레기 같은 불쏘시개를 만나 어색해 하던 나의 기억들이 붉은 노을 넘어가듯 승화한다. 여기서 사리(舍利)를 찾는 건 또 하나의 어리석음임을 배운다. 희게 유골로 부서진 건 아궁이 속의 나무일뿐 나의 머릿속은 여전히 연기로 호도 속 같이 구들장 밑 돌받침을 헤맨다. 아직 무명(無明)이다.

처음 얼마간은 아궁이에 불 때는 일이 제대로 절을 하는 것만큼이나 내겐 어려운 일이었다. 불이 밖으로 나와 안쪽은 시커멓게 그을리기만 하다가 꺼지는 통에 눈물만 한 바가지 흘리고 포기한 적도 있으니. 이젠 얼마나 나무를 넣어야 방바닥의 온기가 내 몸에 적당한지 알 수 있다. 마치 목욕물 온도처럼 몸에 알맞아야 방구들과 내가 일체가 될 수 있다. 불 때는 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는 되어야 하니 추운 날에는 여간한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난 이 불 때는 시간도 연애하듯 즐긴다. 소나무 갈비로 불을 지펴 장작을 한 아궁이 가득 집어넣고선 숲속을 산책한다. 피에 굶주린 모기떼들이 끈질기게 달라붙는 여름보다 걷기가 훨씬 자유롭다. 잎과 꽃과 가지로 그렇게 자기를 드러내던 풀들도 모두 몸을 벗었고, 잎을 떨군 나무들은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다. 동안거에 들어간 것이다. 극락암 선방 수좌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저런 참선수행이 있기에 나무들은 봄에 그렇게 귀여운 순수의 잎사귀들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며 환희의 예쁜 꽃들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소나무들은 수십 철을 산 노장들이다. 그러기에 안거기간이 따로 없다. 사철 내내 산철이고 일 년 내내 안거기간이다. 극락암을 거쳐 비로암까지 산책하고 내려오면 무명재의 아궁이는 성이 차지 않는 양 그 큰 입을 다신다. 꺼져가는 숯덩이를 호호불어 달래가며 먹이를 조금씩 넣는다. 배를 한 번 더 채워주곤 방에 들어와 책상에 앉아 강의나 연구와는 관계가 먼 책 속으로 소요(逍遙)의 걸음을 옮긴다. 이렇게 또 한 시간쯤 지나면 발바닥을 간질이는 고양이 같은 유혹에 살며시 아랫목에 발을 넣게 되고 드디어는 눈 무게에 넘어지는 한 그루 설해목(雪害木)이 되어 몸을 눕힌다. 나는 숲 속에서 나무와 교감하며 노닐다가 그 나무들이 아궁이로 들어와 다비(茶毘)로 돌이 되고 내 몸 속에서 연꽃 되어 은은히 향기로 감도는 걸 즐기곤 한다.

아침에 일어나 황산의 진수라 할 수 있는 10대송을 둘러봤다. 수백년 된 나무마다 그 형상에 따라 이름이 붙어 있다. 1천 6백 내지 1천 8백 미터 고지에서 눈꽃을 피우고 있기에 더욱 돋보였다. 그래도 나는 그 꾸민 것 같은 유명한 아름다움보다 제멋대로 자연스럽게 서 있는 반야암의 무명 소나무의 소박함이 무명재 온돌방처럼 편안하다. 황산의 유명한 소나무들이나 반야암의 무명송들이 언젠가는 아궁이로 들어가 유(有)와 무(無)를 같이할 것인데, 지금 어느 과학자는 이 겨울의 철학을 모른 채 여름만 누리려다 추위에 떨고 있다.

박문현(동의대 철학과교수) 글. 월간반야 2006년 2월 제63호

반야암 10년

새해 경인(庚寅)년이 밝았다. 호랑이가 포효하며 아침 동산에서 내려온다. 이 동물이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올 한 해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이 정해질 것이다. 단지 어리석은 중생들은 스스로 지은 업(業)은 생각하지 않고 복(福)만 달라고 두 손 모을 뿐이다.

더불어 올해는 영축산 기슭에 부처님의 전법 도량인 ‘우리절’ ‘반야암(般若庵)’이 문을 연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 경내에 막내둥이 암자가 탄생하여 첫 법회를 본 지 꼭 10년이 된 것이다. 단순한 10년의 의미는 하잘 것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반야암 역사 10년은 우리에겐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어렵사리 우리 지안(志安) 큰스님께서 원을 세우셨고, 그간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인연 닿은 불자들의 정성이 모여 법당의 상량식을 하던 날 스님의 도반들께서 법당 터의 땅바닥에 둘러앉아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법당과 요사채와 해우소만 갖추고 법회를 가졌을 때의 그 환희심! 절을 찾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의 숙소가 마땅치 않아 컨테이너 하우스가 하나 둘 늘어가던 시절, 조금 여유를 찾고 해우소를 옮기고 반듯하게 정자를 올렸을 때는 한결 여유로와 보였다.

2002년 월드컵 축구 열풍이 불 때 ‘템플스테이’를 겨냥하고 지어진 고개 넘어 수련관, 이걸 자랑하고싶어 내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학생 간부수련회를 이곳에서 가지기도 했다. 법당에 단청(丹靑)을 하고, 매월 늘어나는 법회 참석 신자들을 보면서 추위나 더위, 비바람을 막아보려고 ‘텐트’를 쳤는데 그 수가 하나 둘 늘어갈 때마다 절의 살림은 뒷전이고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모른다. 큰스님의 바램대로 거사회가 조직되고 매달 그 회원수가 늘어가니 활기찬 모습이 온 통도사 경내에 소문이 나서 다른 암자에서 시샘을 하는가 싶더니 심지어 큰절에서까지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 큰스님께서 마음 고생을 하신 적도 있었다.

그동안 우리 절은 양적으로만 성장한 것이 아니다. 매월 첫째 일요일의 가족법회, 둘째 토요일의 철야 정진, 화요일의 경전 공부, 부산 포교당인 반야사의 불교대학, 마산 반야불교학당의 경전공부 등 웬만한 큰절에서도 하기 힘든 활동을 오직 큰스님의 원력과 정력에다 부처님의 가피로 이루어 내신 것이다. 여기에다 부처님오신날의 봉축법회와 작은 음악회, 매년 여름 1박2일의 철야 수련회는 이미 우리절의 전통으로 자리가 잡혀졌다.

지난 10년 간 우리절이 이처럼 질적ㆍ양적으로 성장 발전한 이면에는 큰스님의 마음고생은 물론 곁에서 지켜본 우리 도반들도 잊어버리고 싶은 씁쓸한 기억들도 있다. 농지를 불법으로 훼손하였다고 누군가가 고발을 하여 후원 앞마당을 다시 밭으로 조성하는 작업을 한 적도 있었고, 법당의 현판을 대웅전으로 했다가 다시 현재의 ‘반야보전(般若寶殿)’으로 바꾸기도 했다. 홍수 피해로 앞마당이 파헤쳐지기도 하였고, 자그마한 컨테이너 하우스 때문에 산림훼손이니 하면서 말썽이 일기도 하였다. 그때 이 지면을 통해 쓴 글이 ‘불법(佛法)과 불법(不法)’으로 기억된다.

이제 우리 반야암은 지나온 10년을 거울삼아 앞으로 10년을 설계하고, 100년 대계의 밑바탕을 마련하여야 한다. 외형적으로는 스님들과 우리 재가불자들이 누구나 언제든지 와서 수행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의 마련과, 월례회 등 대중들이 모여 법회를 열 때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보다 큰 ‘설법전’만 마련된다면 크게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다음으론 ‘인재불사’라고 하겠다. 한국불교의 한 단면이기도 하지만 사찰 불사엔 아낌없이 보시를 하는 사람들이 인재불사엔 지독히도 인색한 게 사실이다. 우리절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큰스님의 문하에 들어오는 상좌들을 비롯해 불법(佛法)을 깊이 공부하고자 하는 스님이나 재가불자를 찾아 다른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는 일이 꼭 필요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큰스님께도 사찰 운영 등에 좀 신경을 덜 쓰시게 하고, 여생을 오직 본인의 뜻대로 갖고 계신 경륜과 학문을 후학과 사부대중에게 남김없이 베풀어주시게 하는 것이 우리 반야암 가족의 의무가 아닌가 싶다. 우리절과 큰스님의 앞길에 부처님의 가피가 늘 함께 하길 빈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월 110호

손가락으로 장지문을 뚫을 수 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누구 없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자기 일을 잘해 보려고 마음먹는다. 지난날의 잘못된 일에 대해 후회도 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아니하리라고 다짐을 한다. 사람 산다는 게 후회 없이 살기가 참 어렵다. 잘 한다고 한 일들도 나중에 가서 생각하면 미처 생각 못한 본의 아닌 실수가 된 것들이 많이 느껴지기도 한다.

중국 송나라 때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이 스님이 남긴 어록(語錄)의 한 구절에 이런 말이 있다.

“철저히 살다가 철저히 죽어라.(全機而生 全機而死)” 어찌 생각하면 너무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인생을 혹사하는 말로 들릴는지 모르지만 속뜻은 인생을 최대치로 살라는 말이다. 완전하게 살다가 완전하게 죽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말은 생사해결을 목적으로 수도하는 세계에서는 필수적 과제가 되는 말이다. 생사라는 운명의 뿌리를 뽑아내자면 건성으로 하거나 적당히 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 것이다. 쉼 없는 정진을 거듭하여 내 삶에 바치는 정성의 도수가 최대치로 올라가야 한다. 마치 물이 100도C가 되어야 끓는 것처럼 정신적 에너지를 가일층 높여 생명의 불꽃이 연소하여 그 기운이 승화되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공부라 한다. 아니 인생 전체를 공부하는 기간으로 간주한다. 마치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학과 공부를 하는 것처럼 평생을 공부하고 산다고 한다. 흔히 “마음공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인생이 뭐냐?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공부에는 자기 최면에 떨어지게 하는 유혹이 있다. 이것은 사실 모두가 번뇌의 유혹인데, 예를 들면 공부를 하는데 졸음이 온다든지,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난다든지, 재미나는 놀이를 친구들과 어울려 하고 싶다든지 하는 등등의 생리적인 욕구나, 혹은 금전적 이익을 미끼로 하는 갖가지 유혹이 있는 것이다. 엄격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자기 갈 길을 잘못 가는 것은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를 챙길 때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하지만, 어쩌다 보면 막상 이러한 유혹에 어처구니없이 간단하게 넘어가고 마는 것이 범부들의 근기이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선수행(禪修行)에서는 경계에 진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바로 이 경계에 지고 마는 나약한 의지의 자기 최면에 걸려있다. 그래서 경계를 물리치고 이기는 사람을 상근기(上根機)라 하고, 경계에 끌려가 지는 사람을 하근기(下根機)라 한다. 상근기의 사람을 공부인이라 한다.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을 주장했던 우두법융(牛頭法融)선사도 경계를 물리치면 상근기요 경계에 끌려가면 하근기라고 하였다.

이렇게 근기의 약함이 나타나는 것은 스스로의 자기 최면에서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유혹에 끌려가는 것은 타성에 젖은 게으름으로 나약해 지는 습성에 스스로 빠지기를 은연중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기최면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자신을 성찰하여 자기최면에서 깨어나는 것은 지극히 쉽다고 한다. 그것을 비유하여 아무리 힘이 약한 아이의 손가락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의 손가락이 문에 바른 종이, 곧 장지문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최면에서 벗어나는 돌파구를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가령,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바꾸는 것이 무척 간단하고 전혀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 한 번 돌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사실 좋고 싫은 것은 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이 한 생각을 돌이키는 일념반조(一念返照)를 잘하는 것을 공부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