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으로 장지문을 뚫을 수 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누구 없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자기 일을 잘해 보려고 마음먹는다. 지난날의 잘못된 일에 대해 후회도 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아니하리라고 다짐을 한다. 사람 산다는 게 후회 없이 살기가 참 어렵다. 잘 한다고 한 일들도 나중에 가서 생각하면 미처 생각 못한 본의 아닌 실수가 된 것들이 많이 느껴지기도 한다.

중국 송나라 때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이 스님이 남긴 어록(語錄)의 한 구절에 이런 말이 있다.

“철저히 살다가 철저히 죽어라.(全機而生 全機而死)” 어찌 생각하면 너무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인생을 혹사하는 말로 들릴는지 모르지만 속뜻은 인생을 최대치로 살라는 말이다. 완전하게 살다가 완전하게 죽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말은 생사해결을 목적으로 수도하는 세계에서는 필수적 과제가 되는 말이다. 생사라는 운명의 뿌리를 뽑아내자면 건성으로 하거나 적당히 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 것이다. 쉼 없는 정진을 거듭하여 내 삶에 바치는 정성의 도수가 최대치로 올라가야 한다. 마치 물이 100도C가 되어야 끓는 것처럼 정신적 에너지를 가일층 높여 생명의 불꽃이 연소하여 그 기운이 승화되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공부라 한다. 아니 인생 전체를 공부하는 기간으로 간주한다. 마치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학과 공부를 하는 것처럼 평생을 공부하고 산다고 한다. 흔히 “마음공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인생이 뭐냐?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공부에는 자기 최면에 떨어지게 하는 유혹이 있다. 이것은 사실 모두가 번뇌의 유혹인데, 예를 들면 공부를 하는데 졸음이 온다든지,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난다든지, 재미나는 놀이를 친구들과 어울려 하고 싶다든지 하는 등등의 생리적인 욕구나, 혹은 금전적 이익을 미끼로 하는 갖가지 유혹이 있는 것이다. 엄격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자기 갈 길을 잘못 가는 것은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를 챙길 때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하지만, 어쩌다 보면 막상 이러한 유혹에 어처구니없이 간단하게 넘어가고 마는 것이 범부들의 근기이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선수행(禪修行)에서는 경계에 진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바로 이 경계에 지고 마는 나약한 의지의 자기 최면에 걸려있다. 그래서 경계를 물리치고 이기는 사람을 상근기(上根機)라 하고, 경계에 끌려가 지는 사람을 하근기(下根機)라 한다. 상근기의 사람을 공부인이라 한다.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을 주장했던 우두법융(牛頭法融)선사도 경계를 물리치면 상근기요 경계에 끌려가면 하근기라고 하였다.

이렇게 근기의 약함이 나타나는 것은 스스로의 자기 최면에서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유혹에 끌려가는 것은 타성에 젖은 게으름으로 나약해 지는 습성에 스스로 빠지기를 은연중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기최면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자신을 성찰하여 자기최면에서 깨어나는 것은 지극히 쉽다고 한다. 그것을 비유하여 아무리 힘이 약한 아이의 손가락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의 손가락이 문에 바른 종이, 곧 장지문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최면에서 벗어나는 돌파구를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가령,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바꾸는 것이 무척 간단하고 전혀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 한 번 돌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사실 좋고 싫은 것은 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이 한 생각을 돌이키는 일념반조(一念返照)를 잘하는 것을 공부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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