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늘 함께하는 부처님 마음 느끼고 감사해하라

늘 함께하는 부처님 마음, 느끼고 감사해하라

-지광스님-

동체대비란 말을 자주 쓴다.

우리 모두는 한 몸이기에 누구나 크나큰 사랑 속에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일심동체는 또 어떤가.

한 마음으로 한 몸이 되라는 뜻이리라.

우주는 한 몸이다.

하나다.

인드라망이란 말 역시 우주가 하나로 그물처럼 연결돼 있다는 얘기다.

하나임을 모르면 단절이다.

주변과 단절된 사람의 미래는 어떨까? 진리는 만상을 하나로 만드는 위대한 힘이다.

그 힘을 깨달은 사람이 부처다.

위대한 힘의 화신인 부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그를 따르는 자를 진리의 세계, 하나의 세계 열반의 세계로 힘차게 나아가게 한다.

수행자는 진리를 연마하고 진리를 바르게 따르며 부처의 길을 간다.

진리를 깨달으면서 번뇌의 강을 건넌다.

번뇌를 떠난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과 하나이기에 그를 자각하는 정도에 따라 진보한다.

부처님은 모든 것의 본질이고 나 자신에 내재함과 동시에 우주보편적인 가피력의 실재이기에 항상 “부처님 감사합니다” 염(念)하면서 살아가라.

그 가운데 무량가피가 있다.

어려울수록 부처님을 생각하라.

일이 즐거워지고 힘이 샘물처럼 솟으리라.

항상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외동아들임을 잊지 말라.

우리들은 외동아들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금지옥엽이기에 온갖 정성을 다 쏟는다.

부처님께서도 우리 모두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신다는 사실을 아는가?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항상 부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다.

모든 위대한 일은 부처님과 신중계 영계로부터의 허락이 있어야만 한다.

항상 “부처님과 함께다”, “신장님과 함께다”, “신장님과 이 일을 함께 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라.

부처님과 일체가 돼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하면 지치는 일도 없고 일의 결과도 좋다.

진리는 이처럼 간단하다.

우리는 지금도 부처님과 함께 있으며 영원히 함께이며 부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우리는 항상 부처님 나라에 있음을 생각하며 매일 그 같은 자각 속에 살아야만 한다.

부처님께, 조상님께, 부모님께 감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번창은 없다.

감사를 모르는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이다.

우리는 항상 불평불만 속에 살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고마울 뿐이다.

우리의 생명 모두가 부처님이시기에 부처님의 위신력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이 같은 우리의 생명에 대한 감사함이 곧바로 부처님께 대한 감사함이다.

부처님께 대한 감사함을 모르는 자, 생명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번창은 없다.

반야심경에 시고공중(是故空中)이후 전개되는 많은 무(無)의 행렬들을 보면 문자 그대로 허공은 무한한 법과 위신력 그 자체이다.

허공은 우주를 움직이는 결정적 소프트웨어의 공급자이다.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호흡이다.

호흡은 허공을 마시는 것이고 호흡이 모든 것을 움직이기에 만생명의 원천이다.

우리의 몸이 하드웨어라면 그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호흡이요 공이다.

공은 바로 부처님 아니신가? 허공은 문자 그대로 생명이요 법이요 위대한 에너지다.

부처님이신 허공은 무한생명 무한의 소프트웨어이시며 어떤 것도 그를 능가할 수가 없다.

우리가 정녕 ‘감사’ 속에 살아야만 한다는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는 대단히 불행하다.

그의 앞날은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결국 기도는 부처님과 하나임을 선언하는 길인 동시에 부처님 지혜와 하나 되는 길이며 절망과 희망의 가교 역할을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번뇌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으며 기도는 당신의 가치를 제고시킨다.

동체대비의 길이다.

우주는 진정 하나요 동체대비의 세계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 영혼들은 참으로 불행하다.

상대방의 마음 가운데 대비심 사랑을 알게 하려면 그를 사랑하라.

크게 사랑하라.

크게 얻으리라.

좋은 사람을 얻으려면 많이 사랑하라.

많이 포용하라.

위대한 사랑을 얻으려면 크게 관대해야만 한다.

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한다.

기도는 동체대비의 세계요 무한가피의 세계다.

성수스님─모든 불자여

모든 불자여

성수스님

우주의 만물은 자기 나름대로 결과를 맺는데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실속없이 썩고야 마네 자 – 우리도 썩지 않는 진리를 자연 저이들에게 배워봅시다.

그이들은 나면서 자라 익어지면 헛된 이 몸 버릴 줄 안다 그 시기를 한 치도 어김없이 실천 수행하였기 때문에 전 인류들이 모두 함께 기뻐한다 우리 인류들은 나기도 어렵거니와 살기도 잘못살아 익기도 전에 늙어서 썩어지니 세상 모두가 싫어하네 자연은 열두달 내로 자신의 결실을 맺고 세존은 열두해 만에 성불하셨네 우리 범부는 열두생을 지내도 성취하기 어렵다.

자연은 밤이나 낮이나 남의 걱정 않은 결과요 세존은 한번도 헛점없는 결과니라 우리 범부는 잠시도 가만히 못 있으니 무슨 도를 이루겠나 그러나 오분만 헛점없이 노력하면 내가 나를 만나 보리라 물에 뜬 달 만지기 어렵고 가지고 있는 나를 보기 어렵네 부처님 진리를 알고 보면 범부 속에 부처있네 보이는 만물은 다 진리요 세상이 모두가 다 도니라 옥같이 귀한 말 아무데나 쓰지 말고 한발 한발 귀한 걸음 헛되이 갈 수 있나 금쪽같이 귀한 시간 허송이 웬말이냐 허물알고 고쳐가면 성인군자 되거니와 자기허물 외면하면 불보살도 소용없네 우리 중생 어느 누가 본래 부처 아니었나 중생 놀음 즐기다가 이 모양되었구려 천하의 중생들아 우주만물 모두가 내것 아님 없건마는 몇 생이냐 찾았더냐 가지고도 외면하고 쓰면서도 모른다니 억울하게 사는중생 고해바다 벗어나소 경문에서 도를 알면 사바세계 웬말인고 언어문자 밖에두고 사바에서 무엇하나 대지만물 그대로가 자기정체 보이건만 그를 두고 따로보니 병 중에도 병이로다 자기부처 썩혀두고 남의 부처 찾아가니 억만겁을 찾아가도묘한이치 백화일색 하나로다 산속에서 산을 찾아 몇 생을 헤맺던고 치구심만 쉬고나면 본래부처 그자릴세

지명스님─인과응보 법칙은 언제나 작동

인과응보 법칙은 언제나 작동 /

지명스님

장례식장에서 망인의 왕생정토를 비는 염불을 하다 보면, 다양한 방법으로 문상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던가.

일반인들이나 불교인들은 보통 영단을 향해 2배를 하고, 상주에게 1배로 맞절을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고 짐작되는 이들 중에는, 영단을 향해서 고개만 숙이며 묵념을 하고 상주를 향해서도 절을 하지 않는 이, 영단에는 절을 하지 않지만 상주에게는 절을 하는 이, 영단에 절을 하지 않지만 무릎을 꿇고 묵념을 한 뒤, 상주에게 절을 하는 이가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고개만 숙이는 것, 허리까지 굽히는 것,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이 형태만 다를 뿐, 망인에게 공경의 예를 올리는 자세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저분들은 왜 이 땅의 전통적 문상 방법을 무시 내지 파괴하면서까지 절하는 것을 “다른 신 섬기기”나 “우상숭배”와 연관지어서 생각할까.

여기까지 상념에 이르면서, 문득 “왜 내가 저분들의 교리나 그 해석 방법을 존중해 주지 못 하는가”며 반성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이는 저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엎드려 절하는 것이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는 망인에게의 절을 “우상숭배”나 “다른 신 섬기기”로 풀이할 수가 있다.

이렇게 물어보자.

내가 싫어하는 업, 풍습, 문화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어떻게 다른가.

또 나에게 친숙한 것들은 나에게 생소한 것들과 어떻게 다른가.

나에게 친숙하고 내가 좋아하는 행동들은 참답고 선하고 아름다우며, 그렇지 않을 행동들은 거짓되고 악하고 추한 것인가.

맘에 들지 않는 문화 만났을 때 흔들림 없이 대하는 ‘평화’ 중요 소나 말은 풀을 먹고 호랑이나 사자는 고기를 먹는다.

소나 말은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지만, 호랑이나 사자는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먹는다.

생명을 해치지 않는 소와 말은 숫자가 줄어들지 않고 종족이 번성되어 왔지만, 남을 잡아먹는 호랑이나 사자는 이제 멸종의 지경에 이르러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왜 공격하지 않는 동물이 공격하는 동물보다 더 번성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소나 말의 업, 삶의 방법이 호랑이나 사자의 업이나 삶의 방법보다도 선하다거나 좋다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서 공격성의 호랑이나 사자가, 사람의 보호를 받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랑이나 사자에게 그들의 공격적인 업과 육식의 생존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따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업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친숙한 미풍양속이 무시당하고 파괴되는 것이 싫다.

그러나 친화적인 소나 말이 살아야 하고, 공격적인 호랑이나 사자가 멸종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과응보의 법칙은 항상 작동중이다.

현실적으로 나에게 생소하고 내 맘에 들지 않는 업과 풍습과 문화를 만났을 때, 어떻게 흔들림이 없이 평등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금강경〉에서 “진리가 어떤 고정된 법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가르친다.

내가 규정하는 정의, 내가 좋아하는 선과 진리, 나에게 친숙한 업과 풍습과 문화에 매달리지 말자.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 친구의 생각과 행동도 나의 것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더욱이 어떤 위신, 명예, 사랑, 이득을 챙겨야 할 순간에는 하늘과 땅처럼 다를 수 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낱낱이 대립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나는 영원히 마음의 평화를 지킬 수 없다.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응보는 자연적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흐름이지, 내가 그것을 위해서 나의 평화와 행복을 내팽개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