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이기고 사는 지혜

한 때 마산 포교당 정법사에 있을 때 교도소에 가서 재소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을 위한 법문을 한 적이 있었다. 약 200여명의 재소자들이 강당에 모여 있었는데 불우한 재소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될지 설법을 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말을 시작한다는 게 대뜸 여러분들이 왜 여기에 오게 되었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연의 실마리를 묻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고 이들에게 좀 더 강한 자기반성을 유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답을 대신할 수 있는 한마디를 던지고자 하여서였다.

나는 이들에게 “여러분들은 순간의 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기 와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령 폭력을 휘둘렀다가 남에게 상해를 입혀 폭행죄로 온 사람이 있다면 조금만 참고 화를 삭였더라면 좋았을 것이고 절도죄나 강도짓을 하다가 온 사람의 경우는 그도 분명히 탐욕의 충동을 자제하고, 순간의 한 생각을 비웠더라면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재소자 중의 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너무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을 받았다면서 교도소 소장실로 찾아와 일부러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의 행위는 순간의 그릇된 생각 하나 때문에 일어나 평생을 후회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때문에 순간의 감정을 극복하는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하거나 어처구니없는 비극을 초래하는 수도 있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던 미모의 여성 연예인이 충동적인 자살을 감행하여 그 여파가 나라 안에 파급되어 자살문제가 언론마다 거론되었다. 방송보도에 의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자의 수효가 한 해에 1만3천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하루 평균 35명이 자살을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자살자의 대부분이 순간적 충동에 의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고민이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풀리지 않는 현실의 문제가 죽고 싶은 심정을 안겨 줄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 영원히 나를 절망시키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한 때의 고통일 뿐 참고 견디고 나면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것도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본래는 비어 있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공적지심(空寂之心)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은 빈 그릇처럼 마음의 본체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비어 고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괴로움을 느끼고 절망을 느껴 죽고 싶은 이 마음이 본래 내 마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비워 고요한 본래 마음을 지키면서 객진번뇌를 이겨, 손님처럼 찾아와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슬픔이나 괴로움을 스스로 달래가면서 살아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의 번뇌를 객진번뇌(客塵煩惱)라 한다. 본래 없었던 번뇌가 내 집에 찾아온 손님처럼 내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외우고 있는 반야심경에는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다고 하였다. 오온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이다. 육체 자체는 물질적 요소인 색(色)이고 정신작용에 감수, 표상 생각의 움직임, 그리고 주관이 객관을 대하여 최종 인식하는 네 가지를 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 한다. 이는 마음의 심리적 환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오온이 공하다는 것은 내 자신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무아(無我) 혹은 아공(我空)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을 이 무아나 아공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렇게 하면 확실히 내 고민의 무게가 줄어들 것이다.

문둥병에 걸린 불우한 청년이 있었다. 부모 형제도 없는 천애의 고아였다.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 비관하다가 자살을 결심해 산으로 들어갔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든지 나무에 목을 매어 죽기로 마음먹었다. 산속으로 들어갔더니 바위 밑에 굴이 하나 있었다. 들여다보았더니 사람이 한 사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한 생각을 하였다. 그랬더니 굴속의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혼자 굴속에서 좌선을 하던 스님이었다. 그는 문둥병 청년을 보고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사실은 마음이 괴로워 살 수가 없어 죽으려고 왔다고 하였다. 스님은 내가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테니 마음을 내게 보여 달라 하였다. 청년은 마음을 어떻게 보이느냐고 되물었다. 마음은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니므로 마음을 꺼내 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스님은 마음을 꺼내 줄 수가 없다면 괴로움도 꺼내 줄 수가 없는 것이라 고 하였다. 문둥병 청년은 괴로워 죽고 싶어 산으로 갔다가 괴로움도 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크게 느낀 바 있어 스님을 의지해 출가를 하였다.

중국 선종사에 나오는 일화의 한 토막이다. 지금 우리는 순간의 한 생각을 이기고 사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1월. 제96호

손에 붙은 밥을 왜 먹지 않는가

사람이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을 두고 “손에 붙은 밥을 왜 먹지 않는가”라고 묻는 속담이 전해진다. 우리나라 속담인데 이는 “지금 무얼 하기에 손가락에 밥풀을 붙인 채 그냥 있느냐”는 질타성의 말로, “정신 차리라”는 뜻도 된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참으로 묘하다. 흔히 우리가 엉뚱한 생각을 왜 하느냐고 하듯이 정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엉뚱한 생각으로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팔려 쓸데 있는 일을 놓치는 수도 허다하다.

어느 날 부처님이 설법을 마치고 숲 속의 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청년 몇 명이 부처님 앞에 나타났다. 급히 서둘러 뛰어오던 청년 한 명이 부처님께 물었다.

“실례합니다. 오시던 길에 혹시 여자 한 명이 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보지 못했네. 그런데 여자를 왜 찾는가?”

“예, 우리가 야유회를 오면서 흥을 돋우기 위해 한 기생을 돈을 주고 데려왔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이에 지쳐 피곤하여 잠시 쉬면서 그만 낮잠에 떨어졌는데, 그사이 그 기생이 우리들의 소지품을 몽땅 훔쳐 달아나 버렸습니다.”

청년들의 설명이 끝나자 부처님은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말씨로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은 여자를 찾아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기 전에 먼저 찾아야 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대들이 유흥과 환락에 빠진 탓에 실종되어버린 그대들의 올바르고 참된 정신이다. 그대들은 잃어버린 정신부터 찾아야 하겠네.”

현대 사람들을 두고 자아를 잃어버리고 산다고 비평하는 말들도 오래 전에 나왔다. 롤로메이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Man’s search for himself)』라는 책이 나온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소지품을 잃고는 아까워 찾으려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는다는 매우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를 통해, 자기 점검을 하고 자기 회복에 힘쓰는 것이 인생의 책무라고 할 수 있다. 『맹자』의 「구방심장(求放心章)」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기르는 개나 닭과 같은 가축이 집을 나가 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집밖에 나가 그 가축을 찾으면서도 정작 정신 팔려 엉뚱한 곳에 보내 놓은 자기 마음은 불러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성품론(性品論)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이미 자기 자성 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내 행복이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으며, 나는 나로서 충분하다는 것이다. 나는 나 이상일 수도 없고 나 이하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에 나 홀로 가장 높다고 하였다. 자신은 언제나 절대적 자리에 자유롭게 처해 있다는 뜻이다.

언필칭 우리는 세상 살기 힘들다는 탄식들을 종종 한다. 사회제도 속에서 갖춰져야 할 조건이 미비하여 우리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감이 기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불만이 많을수록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갖는다. 사실 우리 현실에는 그릇된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현안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객관 경계를 평가하는 우리들의 주관기준에 기인한 판단일 뿐이다. 마음이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을 때 그 판단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문제는 내 마음을 비우고 전체를 정중(正中)하게 볼 수 있는 내 안목이 열려야 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친 편견으로는 옳은 관점을 가질 수 없다. 이치에 맞는 경우나 이치에 틀린 경우가 결국은 마음작용의 차이일 뿐으로,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 쓰는 용심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이 있다. 선도 있고 악도 있으며 정의도 있고 불의도 있다. 사랑도 있고 증오도 있고 진실도 있고 거짓도 있다.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미혹으로 인한 번뇌와 망상 때문에 마음은 항상 그릇된 쪽으로 잘 기울어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장애를 만드는 업장에 묶여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 업장을 푸는 일이 나를 바로 하는 일이다. 또한 내가 나를 찾는 일이다.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제쳐놓고 망령같은 미혹의 거짓자기에 속고 살아서는 안 될 일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548년 6월 제43호

손가락으로 장지문을 뚫을 수 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누구 없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자기 일을 잘해 보려고 마음먹는다. 지난날의 잘못된 일에 대해 후회도 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아니하리라고 다짐을 한다. 사람 산다는 게 후회 없이 살기가 참 어렵다. 잘 한다고 한 일들도 나중에 가서 생각하면 미처 생각 못한 본의 아닌 실수가 된 것들이 많이 느껴지기도 한다.

중국 송나라 때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이 스님이 남긴 어록(語錄)의 한 구절에 이런 말이 있다.

“철저히 살다가 철저히 죽어라.(全機而生 全機而死)” 어찌 생각하면 너무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인생을 혹사하는 말로 들릴는지 모르지만 속뜻은 인생을 최대치로 살라는 말이다. 완전하게 살다가 완전하게 죽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말은 생사해결을 목적으로 수도하는 세계에서는 필수적 과제가 되는 말이다. 생사라는 운명의 뿌리를 뽑아내자면 건성으로 하거나 적당히 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 것이다. 쉼 없는 정진을 거듭하여 내 삶에 바치는 정성의 도수가 최대치로 올라가야 한다. 마치 물이 100도C가 되어야 끓는 것처럼 정신적 에너지를 가일층 높여 생명의 불꽃이 연소하여 그 기운이 승화되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공부라 한다. 아니 인생 전체를 공부하는 기간으로 간주한다. 마치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학과 공부를 하는 것처럼 평생을 공부하고 산다고 한다. 흔히 “마음공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인생이 뭐냐?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공부에는 자기 최면에 떨어지게 하는 유혹이 있다. 이것은 사실 모두가 번뇌의 유혹인데, 예를 들면 공부를 하는데 졸음이 온다든지,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난다든지, 재미나는 놀이를 친구들과 어울려 하고 싶다든지 하는 등등의 생리적인 욕구나, 혹은 금전적 이익을 미끼로 하는 갖가지 유혹이 있는 것이다. 엄격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자기 갈 길을 잘못 가는 것은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를 챙길 때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하지만, 어쩌다 보면 막상 이러한 유혹에 어처구니없이 간단하게 넘어가고 마는 것이 범부들의 근기이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선수행(禪修行)에서는 경계에 진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바로 이 경계에 지고 마는 나약한 의지의 자기 최면에 걸려있다. 그래서 경계를 물리치고 이기는 사람을 상근기(上根機)라 하고, 경계에 끌려가 지는 사람을 하근기(下根機)라 한다. 상근기의 사람을 공부인이라 한다.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을 주장했던 우두법융(牛頭法融)선사도 경계를 물리치면 상근기요 경계에 끌려가면 하근기라고 하였다.

이렇게 근기의 약함이 나타나는 것은 스스로의 자기 최면에서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유혹에 끌려가는 것은 타성에 젖은 게으름으로 나약해 지는 습성에 스스로 빠지기를 은연중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기최면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자신을 성찰하여 자기최면에서 깨어나는 것은 지극히 쉽다고 한다. 그것을 비유하여 아무리 힘이 약한 아이의 손가락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의 손가락이 문에 바른 종이, 곧 장지문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최면에서 벗어나는 돌파구를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가령,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바꾸는 것이 무척 간단하고 전혀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 한 번 돌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사실 좋고 싫은 것은 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이 한 생각을 돌이키는 일념반조(一念返照)를 잘하는 것을 공부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