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풍경소리

가끔 혼자 산방에 앉아 좌선을 하거나 간경을 하다가 법당 처마 밑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뎅그렁 댕’ ‘뎅그렁 댕’ 바람에 물고기 모양의 쇠붙이가 흔들리면서 방울종을 치는 소리가 고요한 산속의 정적을 깨뜨리며 맑은 멜로디를 허공에 흩는다.

천동여정(天童如淨:1163~1228)선사는 풍경소리를 듣고 유명한 선시 반야송(般若頌)을 지었다.

“온 몸이 입이 되어 허공에 걸려

동서남북 바람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똑같이 반야를 노래하네.

뎅그렁 댕 뎅그렁 댕”

풍경소리가 반야의 노래라는 것은 물론 도를 깨친 분상에서 하는 말이다.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산하대지의 모든 것이 부처님의 법을 설하고 있다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바람 소리 물소리를 위시한 이 세상 모든 소리가 반야의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심심 미묘한 법성의 이치에서 세상을 보고 들을 때는 번뇌를 떠나 있는 또 다른 소식이 보이고 들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에 따라 객관의 경계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마음이 보고 듣는 감각적인 느낌도 심리적 상태에 따라 매우 다르다. 가령 오래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났을 때 웃음으로 만나기도 하고 울음으로 만나기도 한다. 정한(情恨)이 맺힌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은 언제나 눈물의 바다를 이루고 있지 않던가? 난리 통에 객지를 전전하며 고향의 처자형제 소식을 모르고 있던 두보는 부서진 성안에 들어가 시를 지으며 꽃이 눈물을 흘리게 한다 하였다. 비극을 당하여 남모를 고통의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일수록 감춰둔 눈물의 양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분명 비극도 있고 희극도 있는 것이지만 사람 사는 법 그 자체에는 슬픔과 기쁨이 떠나 있다. 번뇌를 객진(客塵)이라 하는 것은 내 집에 찾아온 손님처럼 본래 없던 것이 외부에서 우연히 들어와 손님처럼 있다는 것이다.

이백(李白)은 그의 글에서 세월을 손님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춘야연도리원서』에서 그는 “하늘과 땅은 만물이 쉬는 숙소요, 세월은 대대로 길가는 나그네”라 하였다. 사람을 두고 생각해 볼 때 몸은 나이를 먹는 물건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월 따라 늙어지는 것을 뜻한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니까 이 몸도 결국은 나그네 신세를 면치 못한다. 태어나고 죽는 생사가 과객의 행로란 말이다. 그러나 몸의 주인인 마음을 생각해 보자 마음이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늘 곧 허공이 나이를 먹는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질적 형체가 아닌 텅 빈 허공을 두고 연륜을 헤아려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가고 오는 내왕이 끊어진 것, 그러면서도 하늘과 땅보다 먼저이고 동시에 하늘과 땅보다 나중인 우리의 마음 이것을 그냥 한 물건이라고 불러오기도 했다. 『금강경오가해서설』이나 서산스님의 『선가귀감』 첫 구절에 “한 물건이 여기 있다 하였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한 물건이 있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때로는 허공신(虛空身)이 되어 온 세상을 몸속에 포함해 버리는 무한한 작용을 이 물건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해가 가고 오는 세월의 어귀에서 잠시 나그네 심사가 되어 묵상을 하면서 입선(入禪)의 시간을 가져본다. ‘이 뭣고!’ 하고 한 물건을 챙겨 보지만 화두를 밀치고 스며드는 새치기 생각이 자꾸 일어나 뒤돌아 보이는 게 많다. 살아온 사연들이 애상에 물들기도 하고 가버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도 떠오른다. 가슴 깊숙이 세월의 풍경소리가 자꾸 들린다. 오늘도 동쪽에 뜬 해가 서쪽으로 질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월 110호

세상을 보는 원근법(遠近法)

어떤 때는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보았다는 생각과 듣지 말아야 될 것을 들었다는 생각이 일어날 때가 있다. 보고 들은 어떤 일들이 마음을 언짢게 하고 안타깝게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생활경계가 참 묘하다. 보고 들은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중국 요나라 때의 허유(許由)는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었다는 고사까지 나왔을까?

매일 접하는 뉴스만 하더라도 그렇다. 부패와 비리에 연루된 각종 소식들을 TV 등 언론 매체를 통해 접했을 때도 안보고 안 들었으면 좋았을 걸 괜히 듣고 보았다는 자책심이 일어날 정도이니 말이다. 하기야 정보사회에 있어서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각종 보도들을 일일이 대응하면서 굳이 좋지 않은 뉴스에 속상해 할 필요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못 보고 못 들은 체 하고 지내면 그만이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보고 듣는 것이 여과가 잘 안 될 때가 많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TV를 보다가 하도 식상한 소식이 계속 나와 TV를 꺼버린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보고 듣는 경계에 대해서도 이것들을 여과시키는 여유가 있어야 할 판이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의 소식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개인이 갖는 관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또 시선의 방향에 따라 관심도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복잡하게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도 내 시선이 부딪치지 않으면 무관심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달리 말해 시선을 줌으로써 시야에 들어온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시선이란 눈동자가 대상의 사물과 항상 직선을 이루는 것이므로 시선이 닿는 것은 자의적인 선택이 되며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생각의 문제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이 있다. 눈이 보는 시력이 미치는 공간적 거리의 시야처럼 마음이 보는 정신 공간의 시야가 마음속에 들어있는 법이다. 그래서 이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데 만화경속에 나타나는 모습처럼 대칭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관점이 생기어 서로 다른 관점 때문에 때로는 의견 대립이나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마음속에 갈등이나 허탈이 일어나는 것도 관점의 차이로 인한 소통 부재에서 오는 경우일 수 있다.

사진을 찍을 때 줌(zoom)을 이용하여 물체의 크기를 적당하게 맞추는 것처럼 관점에 있어서도 멀리 보고 가까이 보는 원근법이 있는 것 같다. 멀리 보아야 할 것과 가까이 보아야 할 것에 대한 거리 조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멀리서 보면 괜찮을 일이 너무 접근해 보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불평과 불만이 커지는 수가 있으며, 가까이서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어떤 오해를 본의 아니게 하는 수도 있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에는 감정의 샘이 있다. 희‧노‧애‧락이 흘러나오는 감정이 객관 경계를 대하는 원근법의 적용으로 조절될 수 있다면 화나고 속상하는 일도 달래지게 되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멀리보고 가까이 보는 것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양면에서 다 같이 적용된다. 시간적으로 길게 보는 것과 공간적으로 좀 더 떨어진 먼 거리에서 객관경계를 대하는 것이 순간의 감정을 이기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데는 매우 유익하다. 멀리서 보면 감정을 자극하는 일은 줄어들게 된다. 아무리 뾰족한 모가 나 있는 것도 멀리서 보면 둥글게 보인다.

또 마음은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을 얼마든지 멀리 할 수가 있으며, 멀리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가까이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의 바람을 쉬게 하여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이 되도록 멀리하고 가까이 하는 마음의 기술을 배워야 하겠다.

프랑스의 르낭은 “별의 세계에서 지상의 사물을 관찰하라.”는 말을 남겼다. 때로는 별이나 달에 가서 인간세상의 현실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는 문제를 떠나자는 도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나타난 어떤 문제를 여과된 감정으로 다시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똑같은 문제를 거듭 생각해 봄으로써 간혹 생각의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다.

어떤 문제의식 속에 들어 있는 뜻이 첫 번째 생각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다가 두 번 세 번 거듭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얕게 생각하는 것도 생각의 원근법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11월 132호

세 가지의 ‘밭(田)’

얼마 전에 오랜 만에 반야암을 찾아온 신도 한 사람이 있었다. 30여 년 전 울산에서 불교청년회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절을 매우 좋아 하면서 한 때 스님이 되는 출가를 할까 망설이다가 어떤 청년의 열렬한 사랑의 호소에 시집가는 출가를 해버린 사람이었다. 이제 50대 후반의 나이로 절에 와서도 30살이 된 아들과 28살이 된 딸의 결혼 걱정을 하는 평범한 어머니인 이 신도와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나를 감동하게 한 사연 하나를 들었다.

그것은 9순이 넘는 친정 부모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간병 시중을 11년을 해 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환자이고 아버지는 앉고 일어설 수는 있으나, 보행을 할 수 없는 몸 가누기가 잘 안 되는 분이라 하였다. 이런 두 부모를 11년이나 곁을 지키면서 수족노릇을 해 왔다는 이야기를 눈물을 글썽이면서 하는 것을 보고, 보기 드문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 효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도 여러 명 있고 언니 동생도 여러 명이 있음에도 자신이 간병을 도맡기 위해서 생계를 꾸리던 가게도 문을 닫고 부모 모시는 일이 가장 좋은 팔자라고 생각 했다 하였다. 마침 서울에 사는 언니가 내려와 동생의 간병 고생을 안타깝게 여겨, 이틀만 어디 가서 쉬다 오라 하여 절을 찾아 왔다 하였다. 나는 참으로 복을 많이 짓고 산다며 위로 겸 칭찬의 말을 해 주었다.

사람의 마음을 ‘복전(福田)’이라 한다. ‘복을 심는 밭’이란 뜻이다. 마음을 땅이나 밭에 비유, ‘심지(心地)’니 ‘심전(心田)’이니 하는 말들이 경전에 자주 등장한다. 땅이 모든 식물의 씨앗을 흙속에 묻어 싹을 트게 해주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땅이나 밭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그때그때 일으키는 행위를 현재 일으키는 행동이라 하여 현행(現行)이라 하는데 이 말과 상대되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 ‘종자(種子)’이다. 흙속에 묻혀 있던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것처럼 마음속에 들어 있던 종자에서 현행의 행동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행위를 일으킬 수 있는 업종자(業種子)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이 종자를 싹을 틔어 자라게 하므로 ‘밭’이라 한다.

농사를 짓는 밭에 재배하는 농작물의 이름을 따라 밭 이름을 붙이는 수가 있다. 가령 배추를 심었으면 ‘배추밭’이라 하고 고구마를 심었으면 ‘고구마밭’이라 한다. 콩을 심으면 ‘콩밭’이요 보리를 심었으면 ‘보리밭’, 밀을 심었으면 ‘밀밭’이다.

마음의 밭에는 무엇을 심어 이름을 부르는가? 물론 업이 심어져 있으면 ‘업밭’이라 하겠지만 그러나 마음의 밭을 가장 아름답게 부르는 말이 바로 ‘복전(福田)’이라는 말이다. 복을 심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의 근본 주제이다.

복전인 사람의 마음에는 세 개의 밭이 있다. ‘경전(敬田)’과 ‘은전(恩田)’과 ‘비전(悲田)’이다. ‘경전’은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복을 짓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삼보를 공경하거나 공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면 한량없는 복을 얻는다 하였다.

‘은전’은 은혜를 베풀거나 갚으면 복이 지어진다는 뜻이다. 특히 은혜를 입고 은혜를 갚지 않으면 감복(減福)이 된다하여 불교에서는 부모나 스승 등의 은혜를 갚을 것을 강조 한다. 원한은 갚으려 하지 말고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비전’은 자비를 베풀 대상으로서 가난 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연민의 정을 보내 주는 것을 말한다.

부모는 ‘은전’이면서 동시에 ‘경전’이다. 공경하고 은혜를 보답 하려는 마음, 이 마음에는 언젠가 반드시 복이 온다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환경이 건조해지고 황폐화 된다고 염려하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복전사상’ 곧 ‘삼전사상’이 널리 퍼져, 사람마다 ‘복밭’을 일구려는 노력으로 새로운 사회의 규범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공경할 줄 모르고 은혜를 갚을 줄 모르고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비정한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밭을 잘 경작하는 것이 내 인생의 풍년을 기약하는 것이다. 이것이 잘 실천되면 거기에서 오는 수확이 복의 열매가 된다. 이기적 아만 때문에 삼전을 잃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 활동의 공적도 삼전의 실천지수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조선 후기의 만덕(1739~1812) 비구니는 제주도에 대 기근이 닥쳐왔을 때 육지에서 쌀을 사들여 제주도민을 구휼하였으며, 서울 봉은사의 학밀(學密) 스님은 1925년 한강이 범람하여 큰 수해가 일어났을 때 절의 양식을 죄다 꺼내 수재민을 구제하였다. 비전공덕을 실천한 사례들이지만 하루하루의 생활이 ‘삼전을 밭’의 잘 가꾸며 사는 것이 인생의 바른 자세며 올바른 도리라 할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8월 1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