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쇠고 나서

금년은 설을 쇠고 나도 가슴 속에 쓸쓸한 감회가 길게 남는다. 나이 탓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세월 가는 시절 인연이 먼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꾸 허허로운 생각이 일어날 때가 많다. 60대 중반인 우리 같은 연령에서는 나이가 한 살 많아졌다는 것이 살아남아 있을 해수를 한 해 줄인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히 의식되어지면서 정말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묘지를 향해 걸어가는 도보의 행진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설날이라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 예불을 하러 법당에 들어가니 혹한의 한파가 법당에도 들이닥쳐 공기가 너무나 차가워 창불을 하고 행선축원을 하는데 음성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산중 추위는 때로는 처마 밑에 어는 고드름 같은 추위다.

공양간에 내려가 떡국을 한 그릇 먹고는 절 식구들로부터 세배를 받은 다음 큰절로 내려가 사리탑 보궁을 참배하고 방장실과 주지실에 가 세배하고 올라왔다. 극락암도 잠시 올라갔다 내려와, 설 인사를 나누고 싶은 몇몇 스님들께 전화 인사를 드렸다. 봉선사 월운 노사와 경주의 호진 스님, 범어사의 무비 스님, 지리산의 활성 스님과 설 인사를 나누었다.

낮에는 찾아오는 신도님 가족들도 몇몇 있었다. 해마다 그랬듯이 세뱃돈을 준비하여 봉투에 넣어 서랍에 넣어 두고 한 개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신권을 구해 빨간 봉투에 넣고 만복운흥(萬福雲興)이라 컴퓨터로 글을 찍어 넣었다. 모두 한 해의 운수가 대길하여 온갖 복이 뭉게구름이 일어나듯 크게 일어나라는 하는 축원의 말을 쓴 것이다. 연례행사로 치러지는 절집안의 풍경도 설이 되면 명절 분위기가 조금은 살아난다. 큰절에서는 새벽 예불 끝에 대중이 통알(通謁)을 하면서 시방불보살에게 설 예배를 드린다. 뒷방으로 다니면서 노스님들에게도 세배를 드린다. 이렇게 설날의 하루는 세배의 하루가 되어 지나간다.

올해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낼까? 매일 똑같은 일과를 가지고 지내면서도 무슨 별수나 있는 것처럼 새해의 연두가 되면 이런 생각을 안 해보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정말이지 바라고 싶다. 무엇보다 내가 맺고 있는 모든 인연들이 더욱 좋아지는 방향으로 발전해 주기를 간절히 빌고 싶다. 평소에 신세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끝없이 좋은 일이 많아져 그들이 모두 잘되어 내 기분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적으로도 누구나 정초가 되면 한 해가 다복하고 무사히 넘어가 지기를 비는 기도를 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원시적이고 원형적인 소망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불쌍한 자신의 서글픈 초상화를 솔직하게 바라보는 자기 연민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던, 되지 않던 나는 나대로의 바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슴에 담은 원 때문에 쓸쓸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고 괴로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이 가지는 소원을 슬픈 원이라 하여 비원(悲願)이라는 말도 쓴다. 물론 보살들이 이타정신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도 비원이 된다.

밤에는 조용한 시간이 찾아왔다. 산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혼자 방안에 앉아 있다가 오랜만에 노래 한 곡을 되풀이해 들었다. 명성왕후의 주제곡을 부른 조수미의 노래 ‘나 가거든’이란 노래가 너무나 애잔하고 슬프다. 노래 가사에도 슬픈 시의 운율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 같다.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 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 쉬듯 물어볼까요? 나는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어쩌면 비운의 운명을 노래한 이 가사의 일부분이 너무 애처롭게 사람을 슬픔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조용히 다시 사리불의 독백을 읊조려 보았다.

“나는 사는 것을 원하지도 아니 하고 죽는 것을 원하지도 아니 한다.

품팔이가 품삯을 기다리듯이 나는 내게 올 인연을 기다릴 뿐이다.”

슬퍼서 살면서도 인연은 기다려야 하는 것. 그렇다 태어남도 기다림이요 죽음도 기다림의 한 과정일 뿐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2월 135호

서울역 김밥장수

요즈음은 서울 가는 일이 잦다. 주마다 수요일이 되면 올라간다. 목요일마다 불교TV 무상사에서 법문이 있고 금요일 저녁에는 패엽회 강의가 있어 수요일 가서 토요일 내려오는 것이 주마다 되풀이 된다. 스님들끼리 농담을 할 때 서울 사는 스님들을 ‘首都僧(수도승)’이라 하는데 수행정진 잘하는 도를 닦는 스님인 ‘修道僧(수도승)’이라는 말과 한글 발음이 똑같아 서울 살면 저절로 도를 잘 닦는 수도승이 된다는 우스갯말을 하는 수가 있다. 나도 이제 일주일에 반 이상을 서울에 사는 수도승이 된 셈이다.

토요일 내려올 때는 언제나 7시 KTX를 탄다. 보통 역에 6시 40분쯤 도착하는데 이때 택시에서 내려 역 청사 안으로 들어갈 때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열심히 김밥을 사라고 외쳐대는 한 아가씨를 본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아직 20대로 보이는 젊은 이 김밥장수 아가씨를 볼 때마다 나는 무언가 감동 같은 것을 받는다. 이른 아침부터 김밥을 가지고 나와 하나라도 더 많이 팔아보려고 외쳐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우선 이 아가씨의 생활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용모도 꽤 예뻐 보이고 세련된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손님들을 향해서 음악소리처럼 자기 목소리를 힘들이지 않고 발성하고 있는 폼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서 갓 만들어온 따끈따끈한 김밥 사세요. 맛있습니다.”

열심히 외쳐대는 이 목소리에 나는 하나 사주지 않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내가 볼 때는 김밥을 사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도 장사가 되는지 역에 올 때마다 아가씨는 같은 자리에서 열심히 자기 김밥을 선전하고 있었다.

장사를 하건 무엇을 하건 사람이 특별나게 하는 행위에는 어떤 동기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새벽에 김밥을 만들어 역으로 달려와 팔려는 사람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에 속할 것이다. 이 아가씨로 말하면 결코 부잣집 딸은 아닐 것이고 어쩌면 가정환경이 불우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정을 하건대 부모 중에 누가 병석에 있거나 혹은 없어 처녀가장이 되어 있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신상 사정이 어떻든 간에 내 눈에 비친 이 아가씨의 모습은 열심히,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체의 건강과 마찬가지로 사람 누구에게나 생활의 건강, 삶의 건강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건강한 생활을 해야 한다. 힘든 일이라도 떳떳하게 정성을 들여 열심히 하는 것이 건강한 생활이다. 환경이 불우해도 어떤 열등감이나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밝은 마음으로 불만 없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야말로 개인의 생활이 건강한 것이요, 이런 사람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 사는 생활에는 꼼수라는 게 원래 없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속이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개인의 이익을 남몰래 취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꼼수다. 사회적 도덕을 무시하고 윤리를 어기면서 살아봐야 나쁜 업을 지어 좋지 않는 과보가 올 때를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일 뿐이다. 삶에는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도 분명히 하나의 진리로 간주할 수 있는 말이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불우한 장애인으로 일생을 살면서도 인간 승리의 한 모델로 추앙 받는 미국의 헬렌 켈러 여사는 맹인을 위한 점자를 발명한 후 어느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이 만약 이 세상을 바로 볼 수가 있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보고 싶은가요?”

이때 헬렌 켈러는 우선적으로 세 가지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다.

“첫째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고마운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고, 둘째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이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고 싶고, 셋째 가장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보고 싶다.”

눈 먼 사람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이 세 가지를 눈 뜬 사람들은 눈이 뜨였기 때문에 오히려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집에서 갓 만들어온 따끈따끈한 김밥 사세요. 맛있습니다.”

가끔 내 귓가에서 서울역 김밥장수 아가씨의 목소리가 메아리 칠 때가 있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12월 133호

산노을 비낄때

해질 무렵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오랜만에 산 너머 구름 사이로 하늘이 빨갛게 물드는 노을을 보았다. 요즈음은 이처럼 아름다운 노을을 보는 것도 흔하지 않다. 옛날처럼 자주 볼 수 없는 무지개와 같이 노을도 일출일몰에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되지만 멋진 노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기상상태의 변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노을도 물론 지역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수평선 너머로 지는 석양의 노을과 산속의 산봉우리 너머로 비끼는 노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때로는 산위에 올라가 멀리 지는 해를 바라볼 때 먼 평야에 하늘과 땅이 닿은 데도 노을이 타는 것을 볼 수 있다.

저녁노을은 황혼을 가져오는 전초 단계이지만 신비로운 색깔로 사람의 마음에 생각의 공간을 키워준다. 무지개를 볼 때와 또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철학적 사유를 조장해 주는 힘은 무지개보다 훨씬 강하다.

일찍이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기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을 보고 신앙에 의한 종교적 실존의 삶을 추구하는 단서를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생각해보면 사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시간의 진행을 따라 통과되는 과정에 불과한 지극히 덧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욕의 갈림길을 사이에 두고 하릴없이 몸부림을 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부담만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야 하는 부담 때문에 오히려 인간이 욕망을 가지게 되었을까. 어느 정치인은 자신의 인생의 황혼을 노을빛으로 짙게 물들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황혼의 블루스를 부르며 어떤 이별을 예감이라도 하듯이 지나간 날을 회한하면서 깊은 애상의 늪으로 빠져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해가 질 때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산 너머 구름 사이로 토해내는 선혈 같은 핏빛을 보라.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무심한 도인의 가슴 속에도 솟아오르는 애틋한 향수 같은 것이 있다. 수많은 인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단독자로서 외톨이가 되는, 스스로 소외되는 고독이 노을처럼 영혼의 하늘을 물들여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저녁노을을 보고 자신의 고독을 발견한 자는 자신에 대한 끝없는 연민을 가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지개처럼 살고 싶어 했던 인생의 꿈이 결국 노을빛 회한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숱한 고난의 사연도 노을 속에 투영해보면 모두가 스쳐간 기억의 편린에 불과하며 괴롭힘 당한 것에 대한 원망도 이제 곧 황혼이 오면 노을처럼 사라지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산봉우리 위에 떠 있는 구름처럼 내 존재의 허상이 내 생각의 머리 위에 까닭 없이 떠 있음도 보게 될 것이다.

노을 비낄 때 일어나는 생각들, 그러나 이제 차라리 노을을 보고 나를 잊어버리자. 하늘의 신비 자연의 신비를 보고 나를 잊어버리자.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라는 일본의 시인이 있었다. 26세로 요절한 매우 불우한 시인이었지만 근래에 와서는 가장 사랑 받는 시인중의 한 사람이다. 스님의 아들로 태어난 이 사람은 어쩌다 고향을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학교 교사로 있으며 학생들을 선동하여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교장을 내쫓은 일이 발단이 되어 고향 사람들로부터 고향에서 축출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객지에서 망향의 슬픔을 안고 살다 한번은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고 조용한 바닷가로 찾아간다. 죽으려고 찾아간 바닷가 하얀 백사장에서 그는 작은 게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게를 보느라고 정신이 팔린다.

“동해 바닷가

조그만 갯바위 하얀 백사장

나는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지.”

백사장에서 게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게에 눈이 팔려 놀다가 자살할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돌아와 위와 같이 시를 지었다. 바닷가 백사장에서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다는 간단한 서술이 읽는 이로 하여금 절제된 슬픔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모르긴 해도 이와 같은 시를 지었기 때문에 사랑 받는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사람은 때로 감정을 전환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보고 듣는 경계를 통해 사물을 세밀히 관찰하다 보면 자신에게 북받쳐 있는 감정을 돌파할 수 있는 계기를 찾을 수 있다. 괴로움이나 슬픔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돌파구는 누구에게나 찾으면 찾아지는 것이다. 산 노을이나 다쿠보쿠의 게처럼 말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9월 1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