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정물화

내가 어렸을 적 초등학교 다닐 때 미술수업을 하던 어느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사과 한 개를 가져와 교탁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가만히 놓여 있는 사과같은 것을 그린 그림을 정물화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때의 기억으로 인해 나는 그림 가운데 정물화를 제일 먼저 이해하게 되었다.

정물이라는 말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놓여 있는 물건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자칫 활력이 없는 무생물을 뜻하는 말로 인식되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느끼게 할런지도 모르지만, 고요한 본래모습 혹은 본래상태를 뜻하는 말이므로, 나는 이 말을 매우 좋아한다. 또한 불교의 교의에 나오는 여러 가지 말 중 열반을 뜻하는 적정 혹은 적멸이라는 말도 결국은 정물과 같은 개념을 지니고 있다. 『법화경』 4구게에 “모든 법은 본래부터 고요한 모습일 뿐이다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고 했다.

고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무동작을 뜻하는 말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변하지 않는 어떤 한결같은 상태가 유지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조변석개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두고 생각해 보면, 정물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 변하지 않는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그 무엇이 한없이 그립기도 하다. 물론 제행무상이라고 했듯이 모든 것은 덧없이 변해가기 마련이다. 생멸의 인연 속에서 일어나는 중생계의 일이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동쪽이 있으면 서쪽이 있기 때문에,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상황변동이 항상 일어난다. 더구나 역사가 흐르면 그만큼 시간적 진행이 있어, 어제의 시간이 오늘이 아니듯이 오늘의 상황이 어제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변화 속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은 옛것을 잃어버린 슬픔과, 변해버렸는데도 변하지 않았을 적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가난 속에서 고생하며 살다가 이제는 부유해져 형편이 좋아진 사람들도 마음 한 구석에 옛날의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남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하다 헤어진 사람이 사랑했던 시절의 그리움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은 보통 미래에 대한 꿈이 자기의 모습이 변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동경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과거에 대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사연이 그대로 변하지 않고 남기를 바란다. 어쩌면 인간의 양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것은 인간의 환경이 상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A라는 상황을 누구나 천편일률적으로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A가 아닌 B를 원한다. 역사는 언제나 변증법적인 논리를 타고 흐른다. A를 주장하는 시절이 있는가 하면 어느 때에 가서는 또 A를 반대한다. 소위 개혁이라는 것도 이러한 변증법적인 정반합의 논리에 의해 시도된다.

그래서 한 시대의 이슈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고자 하는 어떤 문제의식도 그것에 의한 부작용이 따른다. 문제는 사회란 언제나 주장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공존해야 하며 이 공존의 공간을 보존하는 자체가 새로운 이념을 주장해 내세우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서로 상반된 견해 때문에 적이 될 수는 없다. 편이 다르다고 해서, 즉 내 편이 아니라고 해서 적이 아니란 말이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고 정당이 다르다고 해서 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좀더 넓은 면에서 보면 같은 종교인이고 같은 정치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자기 생각을 정화시키고 살아야 한다. 선동적 구호만 외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진실한 뜻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 생각, 곧 자기 사유에 대한 정물화가 필요하다. 지조 없이 변절하는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기 사유에 대한 정물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을 고요히 객관화 시켜서, 탁자 위에 올려놓은 사과를 그리듯이 자기 생각을 반성해 보고 관조해보는 사고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누가 더 진지한 생각으로 사유의 공간을 넓혀 전체를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는 지도자의 안목을 높이는 탁견이다. 선거바람이 일 양춘의 4월, T.S 엘리어트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기후 좋은 우리나라의 4월이야 어디 잔인할 수가 있겠는가? 만개한 벚꽃처럼 꽃등 같은 마음이 되는 4월이었으면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4월 제41호

사람의 자리

어떤 분의 집에 초상이 났다. 그 집의 호주였던 거사님이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끝내 운명해버린 것이었다. 부인이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어느날 스님을 찾아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천도재를 의논하는 중에, 돌아간 남편에 대해 여러 가지 회상을 하다가 이런 말을 하였다.

수족이 마비되어 거동을 못한 채 5년을 식물인간처럼 방안에 누워지냈는데, 그새 간병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어서 쾌차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정성껏 간호를 하다가, 3년이 지나도 일어나지 못하기에 차라리 못 일어날 바엔 어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돌아가고 보니 산송장처럼 있더라도 죽지는 말고 집에 있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가족끼리 함께 사는 가정에 있어서 식구들이 있는 자리는 공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있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였다. 사실 사람이 살아 차지하는 자리는 공간적인 자리가 아니다. 누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지리적 장소보다는 한 사람의 존재가 정신적 지주가 되거나 사랑의 지주가 되어 주위의 의지처가 되어줄 때, 그 자리는 실로 우주의 공간보다도 더 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의 자리에 이상이 생기고 있다. 무슨 말이냐? 사람이 처한 자리에 존재의 의미가 분명히 살아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인가? 그것은 사람 사는 것이 인간다운 본분에서 많이 이탈된 이상증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데도 많은 모델이 있다. 이 모델이 어떤 분야이건 이상적 모범을 시범해 주어야 하는데 그 시범이 없어지고 있는 판국이다. 따라서 사람이 지켜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위상(位相)이 실추되고 비인간화가 초래된다. 이것은 물론 과학문명의 발달 내지는 산업화나 기계화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자기 삶에 대한 참가치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보사회에 접어든 기술발전은 인간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반인륜적 작태를 서슴없이 연출한다. 생명공학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배아복제가 시도되고, 이미 낙태 등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행되며 마치 낙태가 인간의 권리인양 착각되고 있다. 유물론적 인생관에 사로잡힌 물신숭배와 도덕윤리에 대한 불감증은 비인간화를 재촉하는 인간의 위기임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거나 자포적인 심리로 될대로 되라 하고 방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인간 소외의식에 스스로 빠져 이유도 모르는 채 남과의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불안해하고 초조해 한다. 자기 인생의 주체는 상실하고 남은 어떤가 하고 남을 의식하면서 타인지향적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문제를 남이 하는 식으로 모방만 해 살아가려는 이 서글픈 현실이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자기 인생의 고유성을 묻지 않는다는 말이다. 삶의 근본적인 의미는 상실한 채 스포츠, 오락, 술, 섹스, 심지어 마약에 탐닉하면서 불행하게도 자신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인간 본연의 자리에서 이탈된다. 예를 들면 인연 속에 맺어지는 인간의 관계를 두고 말할 때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어머니가 어머니답지 못하며 남편이 남편답지 못하며 아내가 아내답지 못하다는 말이다. 부모에게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고 모든 인간의 신분상에서 결격의 요인이 자꾸 생기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제 자리를 벗어난 자리 이탈이다. 이 이탈자들의 세상은 자기 절제를 잃어버리고 천박한 충동에 휩싸여 아무렇게나 행동하여 행실에 도덕적 모범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하여 인간의 격을 무너뜨리는 장본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은 정신적 자세이다. 달리 말하면 도덕적 자질에 있다. 인간의 정신이 위대한 것은 자기 억제와 금욕을 행할 수 있는 의지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성 회복은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수행하는 자세야말로 나를 나답게 하고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인간을 학습적 존재라고 한다. 배워 익혀서 스스로의 자기 인물을 정신적으로 형성하여 키워 가는 것이다. 무엇을 배우는가? 자기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의 공덕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내가 내 자리에 바로 앉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3년 12월 제37호

사람을 보고 집을 본다

바야흐로 고도로 발달된 현대 문명 속에서 사람이 수용하는 의식주의 생활이 날로 고급화 되어간다. 시골도 이제 도시화 되어가면서 하늘을 찌르는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다. 더구나 발달된 상업주의의 광고들이 범람하면서 허장성세의 호화로운 겉모습들이 사람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다. 곳곳에 다운타운이 이루어져 상권이 형성되면서 오늘은 무엇을 살까 살거리를 챙기는 쇼핑문화가 구매충동을 자극하여 정말 소비가 미덕인양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을 늘어나게 하고 있다.

이른바 생활수준이 높아져 수준유지를 하기 위하여 모두가 과소비를 하면서 살아가는 판국이 된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면서 심지어 아기를 키우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젊은 부모들의 푸념 섞인 넋두리가 나오기도 한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정말 사는 게 고생이라는 불교의 설명이 실감나게 들린다.

돈이 신이 되었다는 뜻에서 가드머니(God money)라는 신조어가 등장한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앞으로 점점 고단위 비용이 드는 생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생활공간이 물질적 고급으로 치장되면서 그 속에 향락을 누리고자 하는 심리가 더욱 깊어져 갈 것이다.

이른바 과학문명의 덕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대화라는 것은 물질의 수용을 고비용으로 업그레이드 시켜 가는 것이다. 옛날 보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집에 사는 것이 생활수준이 높아진 것이 된다. 모든 것이 물질적 고급화로 치달아 간다. 그런데 이것이 물질로서의 양질이 된다 하더라도 생활의 양질, 다시 말해 삶의 양질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값비싼 좋은 옷을 입고 다닌다 해서 인격이 훌륭한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외형의 치장에 앞선 내면의 성숙이 있어야 한다. 사람에 있어서 몸과 마음은 안팎의 조화다. 정신이 맑고 마음이 건실한 사람은 항상 내면의 덕을 키우는데 자기 모범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겉치레에만 치중하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신념에 의한 자기 모범의 틀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의식하면서 서툰 모방만 과시하려는 경향이 많다. 몸에 신경 쓰면서 건강을 돌보고 몸매를 가꾸는 현대인들은 마음 쓰는 아름다움이 부족하다. 자칫 몸을 위한 허영만 챙기고 마음에 고이 간직해야할 미덕에 대한 관심이 매우 부족하다. 유행에 따른 감각은 세련되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지견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

이 세상은 내가 아는 것만큼 내 영역이 되는 것이고 내 소견의 양만큼 보여 지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내영역이 될 수 없고 내 소견이 막혀버리면 의미 있는 존재가 내게 나타나 주지 않는다.

어느 선사가 불자들이 찾아와 인사를 할 때마다 어디서 왔느냐고 상투적인 질문을 하고는 “그대를 여기에 오게 한 것이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인사한 사람이 어리둥절해할 때 “차는 기사가 운전을 하는데 그대의 몸을 운전하는 기사는 어디 있나?” 하고 또 물었다. 자기의 정체에 대한 자각심을 일깨우게 하는 법문이다. 선사들은 으레 “내가 누구인가?”하는 공부를 하라고 이른다. 사실 내 자신의 삶의 가치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자기 정체가 알아질 때 바로 나온다. 홍수처럼 범람하는 허영과 향락의 경계에 맹목적으로 휩쓸러 가지 말아야 한다. 외화내빈의 자기 초상을 만들어 가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겉으로 잘 보여 지지 않아도 속에 찬 알맹이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사람을 보고 집을 보는 것이지 집을 보고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어록에 나오는 말이 있다. 아무리 호화로운 큰 저택이 있어도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집에 사는 주인이 누구이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집이란 사람이 사는 시설물에 불과하다. 집은 팔고 살수가 있지만 사람은 팔고 살 수가 없다. 가치전도로 인해 사람보다 집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을 배반하고 사람을 배신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사람밖에 없다. 사람이 제일 좋은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와 의미는 사람 쪽으로 가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동시에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불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사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다. 사람이 바로 부처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2월 제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