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어느 고3 여학생이 자신의 어머니가 자기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걸림돌과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 친 어머니를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걸림돌처럼 생각하다니, 옛날의 유교윤리로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효막심한 흉측한 말이다. 하지만 이 고3의 딸은 우리 사회가 안겨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수험생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기대가 부담스럽고 공부와 생활에 대한 이런 저런 간섭이 귀찮아, 어머니로부터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심정을 순간적으로 토로했을 뿐이라 여겨진다.

세상 살기 힘든 것은 남녀노소가 없는 것 같다. 어른은 어른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또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힘들다. 힘들다는 것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해 편치 못한 심리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하고 불편해 지는가? 그것은 살아가는데 있어 내가 겪어야 하는 현실적인 장애가 너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을 장애물 경주라고 표현하는 말도 있지만 뜻하는 바의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는 않고, 사회 환경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공연히 스스로를 짜증스럽게 만든다. 그 원인은 또 있다. 하기 싫은 경쟁을 억지로 하면서 살아야 한다. 수험생이 겪어야 하는 입시경쟁 같은 것처럼 피하고 싶은 일을 어쩔 수 없이 겪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인생의 행로에는 넘어야 할 산이 첩첩이 있다. 창을 만들고 방패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가 하는 일과 남이 하는 일이 서로 반대의 기능을 나타내기도 하며, 같은 기능을 가진 경우라도 언제나 우열을 따지는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랭킹으로 우열을 따지는 현대사회는 확실히 경쟁의 사회다. 참으로 많은 경쟁의 대상이 오늘의 사회 안에 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남도 나와 같은 일을 하려하는 동업자의 경쟁이 있는가 하면 물건 생산을 통한 상품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미 사람이 사는 생존자체를 경쟁으로 보고 생존경쟁이라는 통념화 된 말을 쓰고 있기도 하지만 문명의 발달 속에 인간 사회의 경쟁은 더욱 가속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어느덧 사회적 생리현상이 속도경쟁으로 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마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처럼 좀 더 빠른 속력을 내어 앞차를 추월하려는 것과 똑같은 과속을 내면서 스피드 경쟁을 유발, 더욱 더 달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추월이 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직선적 돌진은 기차의 추돌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받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부모의 말이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자식의 말이 부모에게 상처를 주는 시대가 되어 윤리, 도덕적 안전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마음속에 마군이 침입해 있고 찌푸리고 어두운 얼굴로 못마땅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의 육근이 서로 장애를 일으키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가 않는다.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

화엄법문의 중요대의를 사사무애(事事無礙)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서로 장애가 없이 존재하는 이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 이치의 카테고리를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라 한다. 모든 존재는 근본본질에서는 서로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본래는 장애가 없는 것인데 중생들의 망업(妄業) 때문에 장애가 생긴다는 것이다. 망업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생의 마음이 밝은 빛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본래 우리들 마음은 밝은 빛이었던 것이라 한다. 심광(心光) 곧 마음의 빛을 쓰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전도된 가치의식에 잘못 빠져 들어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는 삶을 불식시키고 어둠을 밝혀 주는 빛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빛은 절대 싸우는 일이 없다. 한 개의 전등에서 나오는 빛이나 백 개 천개의 전등에서 나오는 빛은 결코 서로 장애하지 않고 서로 합하여 광도를 높일 뿐이다. 마음과 마음의 빛이 서로 합하여 심광의 광도를 높여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다. 내 마음을 써서 누구에게든지 밝음을 전해주면 된다. “마음의 빛은 언제나 밝아 만고에 아름답다 (心光不昧 萬古徽猶).” 문제는 망업 때문에 끼어드는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에 있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5월 제 78호

불을 말하여도 입은 타지 않는다

옛날 희랍의 궤변론자들 사이에 토끼가 거북이를 앞에 세워두고 뒤쫓아 갈 때 토끼는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주장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다. 가령 거북이가 토끼 보다 100m 앞에 서서 둘이 경주를 한다면 토끼가 거북이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토끼가 100m의 거리를 따라 가는 동안 거북이도 얼마를 앞으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라 한다. 이리하여 토끼가 거북이가 있던 지점에 다가가면 거북이 역시 얼마라도 앞으로 나가게 되기 때문에 토끼를 거북이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시간을 무시하고 공간적 거리만 가지고 따지는 억지로 이를 배리(背理)의 모순(矛盾)이라 하였다. 이치를 등져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인데 때로는 그럴듯하게 들려 순간적으로 사람을 현혹시켜 버리는 것이다. 말의 논리라는 것은 때로는 배리의 모순에 걸리는 수가 있다. 실상은 엉터리 그릇된 견해인데 말로 꾸며 놓고 볼 때는 그럴 듯하다는 것이다.

정보사회에 들어와 온갖 정보와 지식이 범람하여 별의별 선전과 광고가 다 쏟아져 나오는데 교묘한 논리를 세워 사람을 현혹시키는 말들이 너무나 많이 횡행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주장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잘 표현해 남에게 먹혀들어 가게 할까 이것이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의 관심사고 더 나아가 정치하는 사람들의 노림인 것 같다. 속마음과 겉이 다르면서도 일단 말로서 그럴듯하게 해 놓자는 판이다. 현대의 처세술은 모두 말을 앞세워 과장되게 꾸며 놓는 빈말잔치가 되는 수가 허다하다.

공자는 논어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은 어짊(仁)이 없다고 하였고 또 눌언(訥言)이 행실에 있어서는 민첩하다(訥言敏於行) 하였다. 불교의 선가에서는 말 이전에 마음이 어떠한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바른 사람이 그릇된 말을 하여도 마음이 바르기 때문에 바른 법이 될 수 있지만 마음이 그릇된 사람은 비록 말은 옳게 하더라도 마음이 그릇되었기 때문에 바른 법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사실 진리는 말에 있지 않다. 말을 떠나 있는 실상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음식의 맛을 아무리 말로 설명하여도 맛은 말에 있지 않은 것과 같은 논리다. 선어록에는 “불을 말하여도 입은 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처럼 말로 표현되는 ‘불’이란 명사에는 뜨거운 것이 없는 것이다.

매스컴이 발달한 현대 사회는 말의 조작에 의한 혼란과 유혹이 부쩍 늘어나는 것 같다. 어떤 말을 듣고도 우선 그게 사실일까, 믿을 수 있는 말인가에 대한 의구심부터 생긴다. 심지어 신문의 기사나 공영방송에 나온 말들도 곡해되거나 과장된 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말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 사실과 다르게 오도되거나 과장된 것일거라는 지레 짐작을 미리 해버리게 하는 경우도 허다하게 생긴다. 이른바 불신시대를 조장하는 것은 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말이 거짓되고 사실과 달라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불신(不信)이다. 한자 ‘믿을 신(信)’자를 획을 나누어 풀이하면 ‘사람인(人)’ 변에 ‘말씀언(言)’인데 이는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다. ‘불(不)’자는 부정을 뜻하니 불신이라는 말은 곧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믿을 수 없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믿을 수 있어야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다. 언어의 생명력이 죽어가는 사회가 바로 불신사회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도 믿지 못하는 자신 없는 말들을 너무 쉽게 내뱉는다는 것이다. 선거때만 되면 각 후보자들의 공약이 남발하고 일단 말부터 그럴듯하게 해 놓자는 자신을 호도하는 엄청난 말들이 쏟아진다. 마치 길가에 버려지는 휴지처럼 믿을 수 없는 무책임한 말들이 버려진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경오염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중국의 왕양명은 일찍이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하여 말과 실천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공리공론의 실천 없는 이론은 사변적인 수사에 불과해 지성의 본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말로써 남을 현혹시키지 말고 행으로써 감동을 주어야 한다. 내가 남에게 불신의 의혹을 받는다는 것은 내 삶의 비극이다. 때로는 말에 앞서 생각의 절제가 필요하다. 순간의 감정도 실수의 방지를 위한 여과가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업이 잘못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자애지심이 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고 양명학에서는 말한다.

말이 잘못된 것을 실언이라고 하지만 말을 잃어버린 것도 실언이라는 낱말의 뜻이다. 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바꿔지는데 불교에서는 수행자를 경책할 때 말없이 도심을 키우라는 말이 있다. 침묵의 공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도심을 닦는다는 뜻이다. 묵언 속에 들어가면 말의 실수는 없는 것이다.

山堂靜夜坐無言 산속의 고요한 밤 말없이 앉았으니

寂寂寥寥本自然 고요하고 고요해 본래 그대로이네

何事西風動林野 무슨 일로 바람 불어 숲을 흔드는가?

一聲寒雁唳長天 기러기 까욱 울며 하늘을 날아간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월 제86호

봄의 화두(話頭)

방문 밖에서 봄이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때이다. 벌써 춘분이 지나고 매화꽃이 만발하여 꽃들의 편지가 우리 가슴에 소식을 전한다. 대지에 새싹들이 꿈틀거리고 곳곳에서 지심 뚫는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해마다 사 계절이 어김없이 오고 가지만 봄이 오는 때가 가장 반갑다. 인동의 겨울을 이기고 오는 봄이기 때문일 것이다. 겨우내 한데 서서 한파에 시달리던 나무들이 움을 틔우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자연의 신비가 곧 세상의 신비임을 느낀다.

선 수행에 있어서는 봄이 오는 것도 하나의 화두이다. “동군(東君: 봄)이 어디 있느냐?”는 화두도 있고 “봄바람이 몇 근이냐?”는 화두도 있다. 생명이 약동하며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정서적 기운보다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원초적 본질을 묻는 근본 질문이 있어 때때로 우리는 이 봄의 화두를 물어 보아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봄의 마음이 있다. 부드럽고 온화하고 싹을 틔우는 것 같고 꽃을 피우는 마음이다. 인생을 봄 마음으로 살라는 법문도 있었다.

옛날에 어느 큰 스님은 당신의 제자에게 편지를 썼다. 제자가 큰 절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을 때 대중을 잘 외호하고 소임을 잘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 쓴 편지에 봄의 마음으로 대중을 대하면서 소임을 보고 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또 선가어록에는 가끔 심화돈발(心花頓發)이라는 말이 나온다. 갑자기 마음에 꽃이 피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물론 깨달음의 꽃을 피운다는 본뜻이 있겠지만 단순히 말하면 꽃을 피우는 마음이 되라는 말이다. 마음에 무슨 꽃이 피는가? 마음에 북받치는 모든 감정도 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의 꽃, 슬픔의 꽃, 웃음의 꽃, 눈물의 꽃. 그러나 이러한 수사적인 표현에 앞서 꽃이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명사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꽃은 아름다운 마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된다.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화장이 필요하다.

마음의 화장이란 우선 가벼운 기분전환으로 시작된다. 샘물이 솟듯 무언가 솟아나는 마음으로 보고 듣는 것에 감탄사를 발할 수 있는 마음이라야 꽃이 피는 마음이 될 수 있다. 언제나 유쾌하고 명랑한 표정으로 누구에게 윙크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꽃을 피우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서 대외적으로 선행을 베풀고 남을 위한 이타행을 할 수 있을 때 마음의 꽃은 만발해 지는 것이다.

얼굴에서 나오는 작은 미소 하나, 남을 위한 조그마한 배려, 이러한 것도 분명 마음의 꽃이다.

잡보장경』에는 돈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7가지 보시 이야기를 해 놓은 법문이 있다. 무재칠시(無財七施)라고 하는 이 내용은 남에게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을 얼굴로 보시하는 화안시(和顔施)라 하였고, 고운 눈매로 남과의 시선을 나누는 것을 눈으로 보시하는 안시(眼施)라 하였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르쳐 주며 길을 안내해 주는 것 등은 손가락으로 보시하는 지시(指施), 남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좌상시(座上施), 부드러운 말, 고운 말로 남을 찬탄하거나 위로 하는 것을 언사시(言辭施)라 하였다.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가는 나이 많은 사람을 보고 잠간 그 물건을 대신 들어주는 행위 같은 것은 몸으로 보시하는 신시(身施)이다. 그리고 남의 일에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거나 성원해 주는 것을 마음으로 베푸는 심시(心施)라 하였다.

이러한 7시의 마음이 꽃을 피우는 마음이다. 여기에는 돈이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노력이 따르지도 않는다. 가볍고 아주 작은 표정 하나에서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된다. 그저 좋은 일, 잘 된 일에 감탄하고 감동할 줄 알면 그 속에서 마음의 꽃이 피는 것이다. 꽃이 피지 않으면 봄이 느껴지지 않는다. 불우한 생애를 살았던 절세의 미인 한소군(漢昭君)은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는 독백을 하였다. 꽃이 없는 봄은 생각할 수 없다. 동시에 꽃이 피지 않는 마음도 마음이 아니다. 꽃을 피우는 마음 그 속에서 세상은 아름답고 빛나는 것이리라. 산과 들을 화장하는 봄의 향연이 화신의 율동으로 시작을 알린다. 내 마음 속의 봄을 찾는 봄의 화두여!

物物逢時各得香 물물봉시갇득향 너와 내가 만나면 향기가 어리고

和風到處盡春陽 화풍도처진춘양 온화한 바람 속에 봄볕이 따사롭네.

人生苦樂從心起 인생고락종심기 인생이 괴롭다 즐겁다 하는 건 마음 두고 하는 말

活眼照來萬事康 활안조래만사강 활달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아무 일도 괴로울 것 없다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4월 1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