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짓는 농사

인생살이를 농사에 비유한 이야기가 불경 속에 가끔 있다. 『화엄경』이나 『범망경』 등 대승경전에 사람의 마음을 땅에 비유해 심지(心地)라고 한 말이 있으며 이 마음 땅에 좋은 종자를 심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또 심전경작(心田耕作)이라는 고사성어처럼 만들어진 말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 자체가 분명히 농사짓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좋은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어 재배관리를 잘 해야만 알찬 수확을 거둬들이는 게 농사를 잘 짓는 것이다. 수해나 한해의 피해를 입어서도 안 되며 가뭄의 피해가 있어도 농사는 잘 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을 ‘자식농사 잘 짓는다’는 시쳇말이 있는 것처럼 인생사 전부가 농사로 비유되는 것은 사람의 일이 노력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는 인과의 이치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또한 농사는 사람의 노력과 함께 기후나 일기의 조건이 농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비가 적당이 와야 하고 기온이나 일조량 등이 알맞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상기온이 되면 농작물에 제일 먼저 피해가 온다.

일기나 기후의 조건은 사람의 의지대로 맞아지는 것이 아니다. 농사가 잘 될 수 있도록 기후나 일기가 순조로운 것을 옛날에는 시절인연이 좋다 하거나 하늘이 복을 주어 천운이 좋았다고 표현해 왔다. 이른바 운(運)이라는 것을 사람이 잘 타야 한다 하면서 운명론이 아니면서도 운명론적인 이야기를 종종 해 왔다는 것이다.

도대체 ‘운이 좋다’라고 말할 때의 운이란 것이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를 복력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운이란 자기가 지어놓은 과거의 복력에 의해 좋은 인연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이 좋다는 것은 숙생에 선근이 심어진 일이 있어 그것에 의한 좋은 과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운이 좋다거나 운이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은 과거에 내가 한 행위와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사람에게 행운이 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자신의 숙업이 좋은 탓이며, 과거의 원인에 대한 현재의 결과는 언제나 인과의 일치성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하도 세상이 각박해지니까 사람에 대한 평을 이렇게 하는 수가 있다. ‘누가 좋은 사람이냐?’ 물어 놓고 착한 사람, 마음씨 고운 사람을 당연히 좋은 사람이라 해야 할 텐데 이 도덕적 인품을 아랑곳하지 않고 ‘운이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운을 좋게 가꾸는 방법을 복을 짓는 일이라고 한다. 복을 짓는다는 것은 남을 위한 선행을 베푼다는 뜻이지만 인생의 참뜻을 알려는 노력과 진리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자기가 수용하는 복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된다.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이런 설화가 있다.

어느 선비가 글공부를 하여 과거에 응시를 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를 해 7번을 낙방했다. 이 선비는 자기의 불운을 탄식하며 깊은 절망에 빠져버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너 마을에 사는 제자와 다름없는 후배가 있었는데, 이 후배는 책을 보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이 선비를 찾아와 가르침을 받아 배워가곤 했는데, 이 후배는 합격을 한 것이었다.

어느 날 이 선비가 낙심한 채 주막에 가 술을 실컷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홧김에 보던 책을 찢고 또 마당에다 책들을 팽개쳐버렸다. 7번이나 낙방한 주제에 더 이상 책을 보아 무엇 하느냐 하고 자조와 자탄으로 술김에 저지른 행동이었다. 그러다가 술에 취한 채 마루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다. 비몽사몽간 꿈이 꾸였다.

꿈에 웬 신인이 나타나 이 선비에게 호통을 치며,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선비는 기가 죽어 신인의 명대로 방에 들어가 신인 앞에 꿇어앉았다. 신인의 뒤에 병풍이 둘리어져 있고 신인이 아무개를 부르자, 우람한 장정 두 사람이 나오는 것이었다. 신인은 이 장정 두 사람을 좌우에 앉혀 놓고 상에 바치고 온 술병에서 술을 부어 두 장정에게 번갈아 한 잔씩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선비에게 잘 보아 두라고 다시 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선비는 두 장정이 술 마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왼쪽에 앉아 술을 마신 장정은 3잔을 받아먹고 까무러쳐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런데 오른 쪽에 앉아 술을 받아 마신 장정은 왼쪽 장정보다 많은 7잔을 받아 마시고 나서 역시 까무러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이때 신인이 다시 노한 음성으로 이 선비를 꾸짖었다. “보았느냐?” 두 장정이 받아 먹은 잔 수를 물으며 신인은 이 선비가 과거세에 지어놓은 복이 부족해 과거에 떨어진 것을 모르고 불운만 한탄하면서 성현의 책을 찢고 마당에 내팽개쳤다고 호되게 꾸짖는 것이었다. 3잔과 7잔의 수치는 자기의 재주와 복력의 비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선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의 불운이 복 부족이라고 다시 생각하고 선비는 그때부터 복 짓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을 다니면서 길흉사가 있는 집을 찾아가 온갖 도와주는 일들을 했다. 사람들을 공경히 대하고 말 한마디라도 친절하게 해 주었다. 책은 틈틈이 조금씩 보면서 이런 일을 3년을 계속했다. 남을 도와주는 일을 헌신적으로 하고난 선비는 마지막으로 다시 과거에 응시해 드디어 합격을 하였다는 것이다.

사람의 일이란 능력대로 가는 것이긴 하지만 그 능력의 배후에는 복력(福力)이 숨어 있으며 능력과 복력이 잘 어울려져야 한다는 뜻을 말해주는 설화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8월 제69호

복신(福神)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

마산 포교당에 살고 있을 때인 1993년 8월 초순 나는 호진 스님과 같이 일본 대마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침 마산 해운동에서 대마도 이즈하라까지 가는 대마페리호가 처음 개통 되던 날 우리는 짧은 2박 3일의 일정으로 대마도를 가게 되었던 것이다. 5시간이 걸려 이즈하라에 도착했는데 개통을 기념하여 승객을 환영하는 간단한 행사가 부두에 준비되어 있었고 일본 TV방송에서 나온 사진기자들이 입항한 배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찍다가 우리의 승복차림이 특이해서인지 우리에게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민박하는 집을 찾아가 이틀 밤을 묵기로 해놓고 몇 곳의 명소들을 찾아 관광을 하였다. 아름다운 수목이 우거져 있고 많은 석등들이 줄지어 있는 만송원, 대마도 원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일본열도로 들어가는 항공기들이 앉아 대기하고 있는 공항, 원군과 조선군이 연합하여 대마도를 정벌했던 바닷가의 전쟁유적지 등을 먼저 둘러보았다.

이튿날 우리는 아주 중요시하고 찾아보기로 했던 수선사修善寺를 방문하였다. 이곳에 한말의 애국지사 최익현 선생의 유적비가 있어 이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은 한말의 대학자로 이항로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한 후 철종 때 명경과에 급제 출사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강직한 성품과 우국애민의 충정으로 임금께 상소를 자주 올렸다.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한 상소, 신미양요 후 대원군이 서원철페를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 그리고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한 상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올린 청토오적소請討五敵疏 등을 올렸다. 청토오적소는 망국조약에 참여한 소위 을사오적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등을 처단할 것을 주장한 상소였다. 이러한 상소들을 올린 탓으로 귀양살이도 많이 하였다. 제주도와 흑산도에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항일 척사운동을 주도하다가 74세 때 의병을 일으켜 진충보국盡忠報國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옥사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비석 앞에서 숭고한 애국충정에 경의를 표하면서 잠시 묵념을 올리며 기도를 하였다.

이 수선사를 찾기 위하여 길을 찾던 중 우리는 가게에 들려 기념품을 하나씩 사고 가게 주인에게 길을 물었다. 수선사를 가려면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더니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주인이 가게를 비워 두고 밖으로 나와 100m 가량을 길을 걸어 우리를 안내한 후 손가락으로 수선사 있는 쪽을 가리키며 찾아가기 쉽도록 설명을 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여주인의 친절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게를 비워 둔 채 100m의 거리를 나와 자상하게 안내해 주는 그녀의 친절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무도 없는 가게를 비워 두고 나와 친절을 베풀어 주느냐 하였더니 그녀의 대답이 또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오늘 한국에서 온 두 스님을 내가 좀 더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드리면 ‘후꾸노가미’가 나에게 복을 주지 않을까 생각되어 가르쳐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후꾸노가미는 복을 주는 신인 복신福神의 일본말이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길을 가르쳐 준 호의가 복신을 의식하여 복을 받기 위한 행동이었다면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으로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한 편 복 받기를 의식하면서 선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의 이치를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소 어안이 벙벙해지는 묘한 기분이 되었지만 조건 없는 친절이 아닌 복신을 의식하는 마음에서 친절을 베풀었다 하드라도 그 여주인의 의식 속에 특유한 생활철학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상相이 없는 마음을 바라기는 어려울 것이고, 복신을 의식하며 착한 행동을 하겠다는 그 마음이 가상스럽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이 하는 행동에 스스로 좋은 의미를 부여하여 선업을 지을 수 있는 방편을 삼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윤리도덕을 제고하는 개인의 수행이자 사회적 이익을 창출하는 고도의 정신적 가치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남에게 친절한 것, 이것이 바로 좋은 사회를 만드는 가장 기초적이고 지름길이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아직도 내 머리 속에는 이즈하라 가게 여주인의 그 때의 그 말이 남아 있다. “ 후꾸노가미가 복을 줄지 모른다.” 그녀는 분명 복신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09년 8월 105호

복(福)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라

내가 처음 스님이 되어 공양주를 하던 시절이었다. 대중이 먹을 밥을 짓는 소임이공양주이므로 가마솥에 매일 100여명이 먹을 수 있는 밥을 지어 공양 때마다 큰방에 들여 놓고 후원대중이 먹을 수 있도록 후원에도 큰 함지박에 가득히 밥을 갖다 주어야 하였다. 초하루나 관음재일 등 신도들이 기도하러 오는 날은 200여명분의 밥을 지어야 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밥을 짓기 위하여 수곽(우물)가에서 쌀을 씻어 큰 소쿠리에 담아 공양간 솥으로 옮겼다. 그때 후원을 둘러보시며 지나가시던 나의 은사였던 벽자 안자 스님께서 수곽가에서 ‘공양주 이리 오너라’고 부르시었다. 얼른 뛰어갔더니 아까 내가 앉아 쌀을 씻던 자리에 소쿠리를 들 때 쌀이 서너 알 수곽 옆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걸 가리키며 스님께서 왜 쌀알을 흘렸느냐고 호되게 꾸짖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이렇게 쌀알을 버려

감복(感福)을 하면 다음 생에 가난한 집에 태어나 끼니를 제대로 못 얻어먹는다고 하였다. 쌀알 몇 개를 흘린 것이 내생에 밥을 굶게 되는 과보를 가져 온다는 말이었다. 그때 나는 스물 서넛 살 되던 나이였는데 이 말씀이 너무 혹독하다고 생각되었다. 쌀을 씻다가 쌀알 몇 개 흘린 것이 다음 생에 밥을 굶게 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너무 비약적이고 극단적인 논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님의 꾸중을 달게 받으며 부주의를 반성하면서 조심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이때의 꾸중을 계기로 나는 자주 감복(感福)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가 많았다. 내복을 내 스스로 줄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말에 숨겨진 의미를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았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로부터도 ‘복 나가지 않게 해라’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이 말은 특히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을 때 자주 들려주던 말씀이다. 음식 투정을 하지 말고, 감사하게 먹으라는 뜻인 것 같았으며, 또 행동을 조심하여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말이었다. 강원의 교과서 중의 하나인 『치문(緇門)』을 보다가 쌀 한 톨에 시은(施恩)의 무게가 7근이 나간다(感割之重 一米七斤)는 말도 배웠다.

그러다가 중년에 5공화국 때, 한번은 종교지도자 연수교육을 정부의 공무원 교육원에서 받은 적이 있었다. 3박 4일 동안을 천주교 신부 10여 명, 기독교 목사 150여명, 그리고 불교의 스님들 50여명이 함께 연수교육을 받았는데 교육담당 주최측에서 분임토의 시간을 배당해 새 생활 국민운동에 제안할 안건을 토의 대표자가 발표하게 하였다. 그때 나는 쌀알 흘렸다고 꾸중들은 일이 생각나 밥을 먹을 때 밥그릇에 밥알이 붙어 낭비되지 않도록 하여 식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도 새생활 국민운동의 한 모범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란 발표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밥알을 남기지 않을 때는 낭비되는 쌀이 줄어 국민 전체적으로 계산해 본다면 엄청난 양의 식량이 절감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더니 연수교육 지도 담당관이 이 말을 듣고 나중에 감명을 받았다며 우수발표자로 내게 상장을 주는 것이었다.

복을 감한다는 말은 잘못된 생활 습관이 내가 타고난 복을 빼앗아 간다는 말이다. 내가 타고난 복을 뺏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낭비하지 말고 근검절약하여 저축을 하듯이 복을 지어 모아가라는 말이다. 물질적 고급품으로 소유욕을 만족시키려는 현대인들의 생활 사고방식에는 스스로 복을 감하는 감복의 요인들이 많이 들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과소비를 미덕으로 알고 그것이 생활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아, 경제적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태도야 말로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다. 내 복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는 허영심 따위를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 하찮은 것이라도 소중이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시래기가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건지기 위하여 시냇물을 따라 내려오다가, 마침 절을 향해 올라오던 젊은 스님에게 소리를 쳐 ‘거기 떠내려가는 시래기 좀 건져주시오’하고 외친 노스님이 있었다는 옛날이야기도 있다. 10여 년 전에 입적하신 어느 큰 스님은 살아생전에 감기가 걸려 코를 푼 휴지를 햇볕에 말려 두었다가 화장실에 갈 때 다시 사용하였다는 설화도 있다. 깨진 그릇에 물이 새듯이 음식을 함부로 버리거나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사람은 자기 복 그릇에 복이 새고 있다고 생각하라고 가르친 것이 감복의 교훈이며, 이것이 바로 선인(先人)들의 지혜였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0월 제9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