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오랜만에 산 너머 구름 사이로 하늘이 빨갛게 물드는 노을을 보았다. 요즈음은 이처럼 아름다운 노을을 보는 것도 흔하지 않다. 옛날처럼 자주 볼 수 없는 무지개와 같이 노을도 일출일몰에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되지만 멋진 노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기상상태의 변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노을도 물론 지역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수평선 너머로 지는 석양의 노을과 산속의 산봉우리 너머로 비끼는 노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때로는 산위에 올라가 멀리 지는 해를 바라볼 때 먼 평야에 하늘과 땅이 닿은 데도 노을이 타는 것을 볼 수 있다.
저녁노을은 황혼을 가져오는 전초 단계이지만 신비로운 색깔로 사람의 마음에 생각의 공간을 키워준다. 무지개를 볼 때와 또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철학적 사유를 조장해 주는 힘은 무지개보다 훨씬 강하다.
일찍이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기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을 보고 신앙에 의한 종교적 실존의 삶을 추구하는 단서를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생각해보면 사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시간의 진행을 따라 통과되는 과정에 불과한 지극히 덧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욕의 갈림길을 사이에 두고 하릴없이 몸부림을 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부담만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야 하는 부담 때문에 오히려 인간이 욕망을 가지게 되었을까. 어느 정치인은 자신의 인생의 황혼을 노을빛으로 짙게 물들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황혼의 블루스를 부르며 어떤 이별을 예감이라도 하듯이 지나간 날을 회한하면서 깊은 애상의 늪으로 빠져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해가 질 때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산 너머 구름 사이로 토해내는 선혈 같은 핏빛을 보라.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무심한 도인의 가슴 속에도 솟아오르는 애틋한 향수 같은 것이 있다. 수많은 인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단독자로서 외톨이가 되는, 스스로 소외되는 고독이 노을처럼 영혼의 하늘을 물들여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저녁노을을 보고 자신의 고독을 발견한 자는 자신에 대한 끝없는 연민을 가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지개처럼 살고 싶어 했던 인생의 꿈이 결국 노을빛 회한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숱한 고난의 사연도 노을 속에 투영해보면 모두가 스쳐간 기억의 편린에 불과하며 괴롭힘 당한 것에 대한 원망도 이제 곧 황혼이 오면 노을처럼 사라지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산봉우리 위에 떠 있는 구름처럼 내 존재의 허상이 내 생각의 머리 위에 까닭 없이 떠 있음도 보게 될 것이다.
노을 비낄 때 일어나는 생각들, 그러나 이제 차라리 노을을 보고 나를 잊어버리자. 하늘의 신비 자연의 신비를 보고 나를 잊어버리자.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라는 일본의 시인이 있었다. 26세로 요절한 매우 불우한 시인이었지만 근래에 와서는 가장 사랑 받는 시인중의 한 사람이다. 스님의 아들로 태어난 이 사람은 어쩌다 고향을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학교 교사로 있으며 학생들을 선동하여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교장을 내쫓은 일이 발단이 되어 고향 사람들로부터 고향에서 축출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객지에서 망향의 슬픔을 안고 살다 한번은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고 조용한 바닷가로 찾아간다. 죽으려고 찾아간 바닷가 하얀 백사장에서 그는 작은 게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게를 보느라고 정신이 팔린다.
“동해 바닷가
조그만 갯바위 하얀 백사장
나는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지.”
백사장에서 게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게에 눈이 팔려 놀다가 자살할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돌아와 위와 같이 시를 지었다. 바닷가 백사장에서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다는 간단한 서술이 읽는 이로 하여금 절제된 슬픔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모르긴 해도 이와 같은 시를 지었기 때문에 사랑 받는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사람은 때로 감정을 전환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보고 듣는 경계를 통해 사물을 세밀히 관찰하다 보면 자신에게 북받쳐 있는 감정을 돌파할 수 있는 계기를 찾을 수 있다. 괴로움이나 슬픔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돌파구는 누구에게나 찾으면 찾아지는 것이다. 산 노을이나 다쿠보쿠의 게처럼 말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9월 1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