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때는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보았다는 생각과 듣지 말아야 될 것을 들었다는 생각이 일어날 때가 있다. 보고 들은 어떤 일들이 마음을 언짢게 하고 안타깝게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생활경계가 참 묘하다. 보고 들은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중국 요나라 때의 허유(許由)는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었다는 고사까지 나왔을까?
매일 접하는 뉴스만 하더라도 그렇다. 부패와 비리에 연루된 각종 소식들을 TV 등 언론 매체를 통해 접했을 때도 안보고 안 들었으면 좋았을 걸 괜히 듣고 보았다는 자책심이 일어날 정도이니 말이다. 하기야 정보사회에 있어서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각종 보도들을 일일이 대응하면서 굳이 좋지 않은 뉴스에 속상해 할 필요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못 보고 못 들은 체 하고 지내면 그만이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보고 듣는 것이 여과가 잘 안 될 때가 많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TV를 보다가 하도 식상한 소식이 계속 나와 TV를 꺼버린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보고 듣는 경계에 대해서도 이것들을 여과시키는 여유가 있어야 할 판이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의 소식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개인이 갖는 관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또 시선의 방향에 따라 관심도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복잡하게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도 내 시선이 부딪치지 않으면 무관심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달리 말해 시선을 줌으로써 시야에 들어온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시선이란 눈동자가 대상의 사물과 항상 직선을 이루는 것이므로 시선이 닿는 것은 자의적인 선택이 되며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생각의 문제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이 있다. 눈이 보는 시력이 미치는 공간적 거리의 시야처럼 마음이 보는 정신 공간의 시야가 마음속에 들어있는 법이다. 그래서 이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데 만화경속에 나타나는 모습처럼 대칭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관점이 생기어 서로 다른 관점 때문에 때로는 의견 대립이나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마음속에 갈등이나 허탈이 일어나는 것도 관점의 차이로 인한 소통 부재에서 오는 경우일 수 있다.
사진을 찍을 때 줌(zoom)을 이용하여 물체의 크기를 적당하게 맞추는 것처럼 관점에 있어서도 멀리 보고 가까이 보는 원근법이 있는 것 같다. 멀리 보아야 할 것과 가까이 보아야 할 것에 대한 거리 조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멀리서 보면 괜찮을 일이 너무 접근해 보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불평과 불만이 커지는 수가 있으며, 가까이서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어떤 오해를 본의 아니게 하는 수도 있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에는 감정의 샘이 있다. 희‧노‧애‧락이 흘러나오는 감정이 객관 경계를 대하는 원근법의 적용으로 조절될 수 있다면 화나고 속상하는 일도 달래지게 되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멀리보고 가까이 보는 것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양면에서 다 같이 적용된다. 시간적으로 길게 보는 것과 공간적으로 좀 더 떨어진 먼 거리에서 객관경계를 대하는 것이 순간의 감정을 이기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데는 매우 유익하다. 멀리서 보면 감정을 자극하는 일은 줄어들게 된다. 아무리 뾰족한 모가 나 있는 것도 멀리서 보면 둥글게 보인다.
또 마음은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을 얼마든지 멀리 할 수가 있으며, 멀리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가까이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의 바람을 쉬게 하여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이 되도록 멀리하고 가까이 하는 마음의 기술을 배워야 하겠다.
프랑스의 르낭은 “별의 세계에서 지상의 사물을 관찰하라.”는 말을 남겼다. 때로는 별이나 달에 가서 인간세상의 현실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는 문제를 떠나자는 도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나타난 어떤 문제를 여과된 감정으로 다시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똑같은 문제를 거듭 생각해 봄으로써 간혹 생각의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다.
어떤 문제의식 속에 들어 있는 뜻이 첫 번째 생각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다가 두 번 세 번 거듭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얕게 생각하는 것도 생각의 원근법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11월 1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