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처럼 떠돌며

부운유수시생애 浮雲流水是生涯 구름처럼 떠돌며 물처럼 흘러가는 이 내 생애여

헐박수연괘석지 歇泊隨緣掛錫枝 인연 따라 쉬고 머물며 지팡이 걸어 두네

납자유래무정적 衲子由來無定跡 납자는 원래 정한 곳이 없으니

종교거주부심기 從敎去住負心期 가고 머무는 것 마음에 내맡겼네

사람마다 모두 자기가 사는 주소를 가지고 있다. 이는 사는 장소 곧 생활의 근거지가 정해져 있다는 말이지만 사실 인생에는 정처가 없다. 비록 어디 어느 곳에 산다는 내 주소가 있을지라도 그것 역시 임시로 머무는 한시적인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생사를 유전(流轉)하는 윤회의 경계에서 보면 누구나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에 생애를 건 납자의 신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구름처럼 떠돌며 물처럼 흘러가는 방랑자일 뿐이다. 아무도 내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묻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 교단에서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한 곳에 3일 이상을 머물지 말라고 가르친 적도 있다. 현실의 어디에도 집착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시는 일본의 선승 일사문수(一絲文守 1608~1646)의 작품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선문에 몸을 담아 수행정진 끝에 견처(見處)를 얻고 우당동식(愚堂東寔)의 법을 이었다. 그러나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입적하여 쓸쓸히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운수행각(雲水行脚)하는 납자의 생애가 담담하게 묘사되고, 가고 오는 것에 구애되지 않는 초연한 심정을 읊었다고 할 수 있는 이 시는 기실 생사거래의 자유를 노래한 시다. 올 때는 오고 갈 때는 가는 것, 머무르고 싶으면 머물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는 것이다. 다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영원한 화두로 남을 뿐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

구름걷힌 가을 하늘 달이

운권추공월인담 雲捲秋空月印潭 구름 걷힌 가을 하늘 달이 못에 도장을 찍었네

한광무제여수담 寒光無際與誰談 그지없는 물에 비친 달빛 누구에게 말해줄까

활개투지통천안 豁開透地通天眼 하늘과 땅을 뚫어 막힘 없는 눈을 뜨면

대도분명불용참 大道分明不用參 큰 도는 분명하여 참구할 필요 없네

사람이 도(道)를 멀리하지 도가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 곁에 항상 진리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다만 눈먼 장님이 해를 못 보듯 미혹한 중생이 제 곁에 있는 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핑게가 있다면 어두운 밤에 빛이 없으면 물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두워서 도가 안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일이 무엇이었나 하면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횃불을 하나 만들어 놓고 이제 밝아졌으니 눈 있는 사람 와서 보시오! 보고 싶은 사람 와서 보시오 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나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기가 범부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누가 달 밝은 밤에 호수에 나갔다. 물 속에 동그란 달 그림자가 도장을 찍어 놓은 듯 떠 있고 교교한 달빛 사이로 차가운 냉기 마저 감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가슴속의 회포 이건 정말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상을 비추고 있는 달빛의 무궁한 뜻을 누구에게 무어라고 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정수리에 눈을 가진 사람은 여기에서 그윽한 종지(宗旨)를 바로 보아내는 것이다. 천지를 관통해 보는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에겐 언제 어디서나 대도가 분명히 나타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예장 종경(豫章 宗鏡)선사의 금강경 제송강요(提頌綱要) 속에 들어 있는 이 게송은 닦을 것도 없는 도(道)의 본체가 만상 속에 드러나 있음을 묘사해 놓은 명시(名詩)이다. 그는 사람이 삼라만상 차별의 본 뜻을 알려면 푸른 못에 떠 있는 달을 두 번 세 번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하였다. 이른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는 소식이 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부처를 찾을 것조차 없다는 것이다. 결국 부처를 찾는다는 것은 제 곁에 있는 것을 있는 줄 모르기 때문에 찾는다는 역설이 나오며 나아가 이미 내가 부처라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부처이므로 특별히 찾을 것이 없다는 말이 된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12월 (제13호)

과일이 맛있는 이유

추수의 계절 가을이다. 산과들 우리 주변 모든 곳에 곡식이랑 과일이 결실을 맺고 있다. 들녘은 황금 빛깔의 곡식으로 나무에는 갖가지 색상의 과일들이 전시회라도 하는 듯하다. 농부들은 가장 바쁜 일손을 필요로 하지만 그 속에서도 마음만큼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부의 풍성한 마음을 뒤로 하고 나무 가지에 달린 사과, 배, 감, 대추, 밤 여러 종류의 과일을 바라보면서 “과일은 왜 맛이 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해 보신적은 없으신지? 달콤함 또는 향긋함으로 과일은 왜 나름대로의 특유한 맛을 가지고 있을까? 무심코 그냥 생각 없이 맛있네 하면서 먹어 오던 과일인데, 어디에서 그 해답을 찾을까 한번 고민해 본다.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 그 답은 종족 번식의 본능에서 출발 한다고 한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종류의 종들은 자손을 번창 시켜야만 할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이동이 가능한 동물들은 어디에서나 짝짓기가 가능하며 먼 거리에서도 종족의 번식이 가능한 것이다. 기후에 따라 여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종족 번식이 가능하다. 이에 반하여 식물들은 이동이 제한적이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으며 부자연스런 조건 하에서 번식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식물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어떻게 하면 종족 번식을 원활히 할까를 고민해 왔을 것이다.

각종 식물들의 특성을 보면 좀 더 명확히 이해를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예를 들어 민들레를 보면 꽃이 지고 씨앗이 달리게 되면 씨앗이 솜털처럼 가벼워 아주 미약한 바람에도 그 바람을 타고 낙하산처럼 생긴 씨앗은 멀리로 날아가 발아를 하게 된다. 도깨비 풀을 보자 씨앗이 옷이나 동물의 털에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가 멀리 이동이 가능하게 된다.

이렇듯 어떤 종은 아주 가벼워 이동을 하게 되고 어떤 종은 움직이는 다른 종을 이용하여 이동을 하여 번식이 가능하다. 이제는 과일을 한번 살펴보자 나무에 과일이 달리면 어떻게 이를 이동 시킬까? 그 답은 역으로 과일이 맛이 없다고 가정하면 씨앗은 그저 나무 아래에만 떨어져 그 주변에만 서서히 퍼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과일이 맛있다면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은 그 과일을 먹을 것이고 그래서 배설물과 함께 씨앗이 뿌려져 배설물이 거름이 되어 더 번식을 용이하게 할 것이다.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할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과일 나무의 열매를 보면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씨앗을 둘러싸고 있는 과일 껍질 부분이 맛이 있으면 대부분 내부에 있는 씨앗은 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씨앗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동물들이 먹은 씨앗을 소화 시키지 않고 배설물과 함께 내 놓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면 사과, 배, 감, 수박, 참외 등을 이야기할 수 있다. . 또는 씨앗이 맛있는 경우는 그 씨앗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아주 딱딱한 물질들로 둘러 쌓여져 있다. 예를 들면 호도, 은행, 잣, 밤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씨앗을 함부로 먹지 못하게 보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들에게도 그 특유의 종족 번식을 위한 비밀이 그 열매나 씨앗에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풍성한 가을 “과일이 왜 맛있을까?”를 한번 생각 해 봄직도 좋을 듯하다.

종산 황태준 글. 월간 반야 2009년 12월 1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