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내 비로소 사랑한다는 말을 하오.

아껴서 아껴서 하는 말

심중을 다 드러낸 말

이 말을 빼면 가슴이

텅 빈다오

모질스레 참았던 말을 하오

입 안에 빙빙 돌던

가슴을 방망이 치던

아까워 아까워서

못내 숨겼던 그 말을 하오

이제 더 이상 참을 길이 없소

태산을 내 가슴에 얹어

진정시키려 해도

이 그리움

수습 길이 없구려

안 보고

안 생각하고

안 떠올리고

밉게 보려고

지난 시간 지워보려고

이렇게 심정을 태우는데

그리움은 더 확성시켜

나를 짓이긴다.

이순항 (경남불교신도회 회장)글. 월간반야 2008년 9월 제 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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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은 저렇게 고고한데” / 이현도 (언어학박사/반야거사회)

경남불교신도회 이순항 회장(사진)이 시집 <해질녘의 사색>을 냈다. 이 회장은 지금의 경남신문 전신인 경남매일신문에서 편집국장과 기획실장을 했고, 경남매일신문사 사장, 경남도민일보 초대사장을 했다. 또 마산 3·15의거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경남불교신도회 회장직은 지난해부터 맡아서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 회장은 언론인으로서 내가 매우 존경하는 어른이다. 나만 아니라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시로 ‘청송(靑松)은 저렇게 고고한데 / 춘하추동 사시사철 유구한데 / 오진의 티끌 하나 경계하는데 / 아 – 청송처럼 살고 싶다’고 노래한 것처럼 나에게는 청송과 같은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나는 경남도민일보 기자를 할 때 잠시 그를 모셨다. 내가 우여곡절 끝에 신문사를 나오고 한동안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고 있는데도, 이 회장은 자주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지금도 내 일을 걱정하며 배려 해 주고 있어 나는 마음속에 늘 청송(靑松)을 드리우고 산다.

이 회장은 큰스님과도 맑은 인연을 맺고 있다. 반야거사회 김형춘 회장과도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그런 인연때문인지 두 분의 글이 실린 <월간반야>에도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반야>의 편집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하고 금일봉을 보시하기도 해서, 내 입장에서는 어른한테 보은해야할 짐이 참으로 많다.

이 회장은 시집을 내긴 했지만 전술한대로 시인이 아니다. 시집의 책머리에서 그는 “시 읽기를 좋아하고 시가 아름다워 시를 쓰고자 내 소리를 한 소절 한 소절 시의 형식을 빌려 흉내 내 보았다”면서 “내가 시인이 아닌 줄 아는 가까운 분들과 또 나 혼자서 존경하는 분들께 심심파적(深深破寂)거리를 드리기 위해 이렇게 미련을 부려보았다” 고 고백하고 있다.

시집은 2000년부터 8년간 쓴 시편을 모은 것이다. 시의 행간에는 종교적인 믿음, 삶을 바라보는 관조적 색깔이 짙게 배여 있다. 이를 두고 시집제목을 <해질녘의 사색>이라고 붙인 것 같다. 그는 이 시집을 가리켜 “나 자신을 청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도서출판 경남, 104쪽, 1만원.

그대가 고향에서 왔다니

군자고향래 君自故鄕來 그대가 고향에서 왔다니

응지고향사 應知故鄕事 응당 고향의 일을 알겠군요.

래일기창전 來日綺窓前 오던 날 우리 집 비단 창가에

한매착화미 寒梅着花未 매화 꽃 핀 것 보았는지요?

왕유(王維 : 701~761)의 이 시를 읽으면 봄 햇살 같은 온화함 속에 고향의 따사로움이 느껴진다. 고향을 떠나 멀리 객지에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고향에서 온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고향 소식이 궁금하여 이것저것 물어 볼 것도 많았으리라. 그러나 이 시에서는 자기가 살던 고향의 집 비단 커튼을 쳐 놓은 창가에 서 있던 매화나무 가지에 꽃이 피었던가 하고 묻기만 했다. 사실 이것이 고향에 대한 모든 것 전부를 물어 본 것이다.

수도자들은 고향의 의미를 깨달음의 세계로 전향시킨다.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선 것을 고향 길을 밟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에게는 3가지 고향이 있다. 보통 우리가 태어난 마을을 고향이라고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고향의 그리움은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던 곳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 고향이 부모가 있었기에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모를 고향이라 한다. 또 하나의 고향이 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자기 자신의 마음자리이다.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영혼의 고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세계가 우리에게 영혼의 고향인 셈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4월 제77호

구지화상

구지화상은 마조도일 문하의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의 법과 항주의 천룡(天龍)선사의 법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무주 금화산의 작은 암자에 살면서 매일 구지불모준제다라니를 독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구지화상이 머물고 있는 작은 암자에 어느 날 실제(實際)라는 비구니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비구니 스님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머리에 삿갓도 벗지 않은 채 구지화상의 주변을 세 번 빙빙 돌더니 이윽고 말을 했습니다. “ 한마디 일러 주시면 갓을 벗지요.”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하는데도 구지화상은 한마디도 대꾸를 못했습니다. 선사가 대답을 하지 못했으므로 비구니 스님이 그냥 떠나려고 하자 구지 선사는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묵었다 가시지요” 하고 만류를 하니 비구니 스님이 말했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묵어가겠습니다.”

결국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스님은 그길로 바로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구지화상은 멀어져가는 비구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비록 대장부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대장부의 기개가 없도다” 하고는 암자를 버리고 제방으로 다니면서 선지식을 두루 친견할 것을 결심했는데, 그날 밤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르되 “스님은 여기를 떠나지 마십시오. 머지않아 큰 보살이 오셔서 화상께 설법해주실 것입니다”고 하더니, 과연 열흘이 지나지 않아 천룡선사가 찾아왔습니다. 구지화상은 정성을 다해 스님을 모시고 앞에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사뢰니, 천룡선사는 말없이 손가락 하나를 우뚝 세워 보였습니다. 구지화상은 그 손가락을 보는 순간 크게 깨달아 버렸습니다.

이로부터 구지화상은 누가 찾아와 무슨 질문을 해도 손가락 하나를 세울 뿐이니, 마침내 그의 일지두선(一指頭禪)은 온 선객들 사이에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뒷날 구지화상을 시봉하는 동자가 한 명 있었는데, 구지화상이 외출하였을 때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구지화상께서는 어떤 법문을 설하는가?”라고 묻자, 동자는 자기의 스님이 하듯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상대가 놀라워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서, 스님이 돌아오자 그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구지화상은 동자에게 물었습니다. “아까 너는 손가락을 어떻게 세웠느냐?”

그래서 동자가 손가락을 세우는 순간, 구지선사는 칼로 잽싸게 손가락을 잘라버렸고, 동자는 아픔을 참지 못해 울부짖으며 내달렸습니다.

이때 구지선사는 “동자야!” 하고 불렀습니다.

동자는 얼떨결에 머리를 돌려 화상을 쳐다보았더니, 구지화상은 손가락을 들어 보였습니다. 바로 그때 동자는 홀연히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지선사가 언제나 사람들이 불법에 대하여 물어오면 단지 손가락만을 세워 자신의 선의 경지를 나타내 보였다는 것은 선의 경험경지를 개념적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나타내 보이려 했던 것입니다.

참선은 실참실오(實參實悟)하여 불법을 자기 자신의 지혜로 만들어 자기의 불법을 펼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부처님의 말씀이나 선사들의 언어문자를 알음알이로 흉내 내는 중생심의 입장의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지화상이나 동자가 손가락 세우는 법문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깨달았다는 것은 진실로 깨달음이 손가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은 방편으로 제시되었을 뿐, 손가락을 세운 일지두선(一指頭禪)의 참된 법문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닌 우리의 본래면목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구지화상의 이야기는 『벽암록』, 『무문관』, 『종용록』 등의 선적에 나오는 친숙한 이야기로서 그에 대한 생몰 연대나 속성 등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7월 제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