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높이 날고

안자고비수자류 雁自高飛水自流 기러기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흐르는데

백운홍수잡산두 白雲紅樹雜山頭 산머리에 흰 구름 단풍이 섞여있다.

계변낙엽미귀로 溪邊落葉迷歸路 개울가엔 낙엽 쌓여 갈 길이 안보이고

임리소종산객수 林裡疎鍾散客愁 숲속에 먼 종소리 나그네 시름을 흩는구나.

이 시는 가을 산을 노닐다가 읊은 시로 원제목이 추일유산(秋日遊山)으로 되어있다. 붉게 물든 단풍이 흰 구름과 뒤섞여 가을 산의 운치를 더하는데 아련한 그리움이 수심이 되어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따라가고 있다. 낙엽이 길을 덮어 돌아갈 길을 잃고 서성거릴 즈음 멀리 절간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온다. 수심에 잠겨 있던 나그네는 종소리를 듣고 선정에서 나오듯 수심에서 빠져 나온다.

인생살이가 결국 나그네 수심 같은 것이다. 고단한 일상을 따라가면서 시름시름 앓고 사는 것이 인생살이 아니겠는가? 무심히 살아가는 도인들의 세계에도 자연을 느끼는 감상은 부풀대로 부풀어 감정의 포화가 꽉 찰 때도 있다. 내면의 정서는 한껏 자기 외로움을 달래는 독백으로 가득 차기도 하는 것이다. 무심하다는 것이 무감각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가슴은 결코 화석이 될 수는 없다.

이 시의 작자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는 이조 중기의 스님으로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을 이어 받았다. 20살에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사명유정(四溟惟政)과 함께 당시에 널리 명성을 떨쳤던 스님이다. 독서를 많이 하여 박학다식했고 글씨도 잘 썼다. 한때 지리산에 머물 때 어떤 미친 중의 무고로 제자 벽암각성(碧巖覺性)과 함께 옥에 갇히는 수난을 당했으나 나중에 무조가 밝혀져 오히려 왕궁에 불려가 도를 설해주고 임금으로부터 후한 선물을 받아 나왔다. 뛰어난 인품과 덕화에 그를 따르는 무리가 항상 7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광해군 7년 제자 각성에게 법을 부촉하고 세수 73, 법랍 54로 입적하였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1월 제48호

글과 삶이 나란히, 그렇게

마음 꼭꼭 다잡으며 살아낸 세월을 정리하고,

미련이나 후회 없이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

홀가분하다 하시더니

“다시 태어나면 /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 농사짓고 살고 싶다” *하시더니

글을 쓰는 행위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살아가는 행위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하시더니

그 나라에서도 「옛날의 그 집」에서처럼

유식한 이웃집 아저씨 모셔와 고담(古談) 낭독회를 열고 계십니까?

색색의 실꾸리를 풀어가며, 촘촘하고 섬세하게

가지가지 무늬를, 다양하고 풍성하게 짜고 계십니까?

병인년(1926년)정월에 태어나신, 여든 셋 친정어머니께선

딸의 詩集보다 선생님의 소설을 즐겨 읽으십니다.

불러주는 이 없어도, 서러워도 노여워도 않으시고

삶과 죽음을 아름답게 완성시킨 노고에 박수를 치면서요.

토지를 껴안고, 발바닥이 닿도록 외길로 걸어오신

외롭고 고단했던 질곡의 계단위에

정갈한 꽃 한 송이 단정히 올려놓고

읽었던 소설들을 다시 읽으십니다.

선생님은 지금, 미륵산 기슭에서 쉬고 계시지만

때때로, 토지문학관 채마밭에서 김을 매거나

가마솥 가득 옥수수를 쪄놓고 후배들을 기다리시겠지요?

때로는, 바람새의 등을 타고 천산산맥을 오르기도 하고

바이칼호수를 사뿐사뿐 건너기도 하고

사막의 별들에게 이뿐 이름표를 달아주기도 하고

문학이란 이름으로 곳곳에 단비를 뿌려주시겠지요?

글을 쓰는 행위와 살아가는 행위가

평사리 들판에 나란히 선 두 그루의 나무처럼 그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게 하여 주셔요.

부디, 그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셔요.

* 박경리 유고 시집『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인용.

이 시는 박경리 선생 1주기 추모문집에 수록된 詩 입니다.

文殊華 하 영 (시인․ 마산 반야학당) 글. 월간반야 2008년 11월. 제96호

극락단상(極樂短想)

지난 가을, 산철 수행정진에 여념이 없는 도반의 모습도 볼 겸 통도사 극락암 선원을 다녀왔다. 물론 경주에서 가까운 불국사에도 선방이 있고, 통도사에도 본찰의 보광선원을 비롯하여 서운암 선방이 있다. 하지만 굳이 극락암 선방을 다녀오게 된 연유는 그곳이 평소 기거하고 있는 사찰인 반야암과 가깝다는 지리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는 상노스님이셨던 근현대 선지식의 한 분인 경봉노스님께서 법을 펴셨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극락암은 1332년(고려 충혜왕 2)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조선 영조 34년인 1758년에 철홍이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전할 뿐이라고 한다. 1953년 11월 경봉스님께서 극락선원의 조실로 오신 뒤부터 많은 수행승들이 몰려들었고 1968년에 선원을 9동 104칸으로 늘려 지었다고 한다.

반야암에 잠시 들러 은사스님께 문안을 드리고 포행삼아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극락암을 향했다. 형형색색의 가을 이파리들이 향기로운 가을바람 속에 지난 여름의 뜨거웠던 잔상을 떨어내고 있었다. 산길을 돌아 도착한 극락암은 영축산의 당당한 모습과 납자의 눈동자를 닮은 푸른 대숲에 포근히 안겨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직 동안거 결제가 시작하기에는 시일이 며칠 남아서인지 미리 방부를 들인 선방스님들은 많이 계시지 않았지만 가을 산철동안 이곳에서 정진하였다는 도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도반은 무량수각(無量壽閣) 앞에 위치한 영월루(暎月樓)로 나를 안내하고는 가을 향 가득 머금은 국화차 한잔을 건넨다. 그 차 한 잔 속엔 치열한 구도심에서 우러나온 법열의 향기가 가득 베여있는 듯 했다. 영축산의 봉우리가 비친다는 극락영지(極樂影池)의 홍교(虹橋)가 곱게 물든 단풍을 배경으로 아치형의 우아한 곡선을 한껏 뽐내고 있다.

대발이 살짝 움직일 때 맑은 바람 일고 만 송이 장미 피자 온 절 안이 향기로다.

푸른 누대 붉은 꽃에 해와 달은 장구한데 누대와 산 그림자 연못에 어리네.

소림 소식은 아직껏 공적한데 문 밖의 단풍 숲 사이에는 달이 못에 비친다.

<극락암 만월루 주련>

그간의 안부를 몇 마디 묻고는 발길을 돌려 먼저 경봉 노스님이 머무셨다는 삼소굴(三笑屈)을 향했다. 현재 주지실로 쓰고 있는 원광재(圓光齋)에 비해서 약간 작은 건물이지만 나지막하게 둘러진 담장과 작은 툇마루가 선승의 소박한 멋을 더하는 듯하다. 삼소굴 안에는 경봉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삼경에 촛불이 치직하고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깨닫고는 기쁜 마음에 문을 박차고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경봉스님의 옛 일화가 그림처럼 스친다. 깨달으신 그 이치는 오직 경봉스님만이 아실 테지만 삼소굴의 주련은 말없이 그 날의 한밤중 소식을 전하고 있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 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 꽃 빛이 온 누리에 흐르누나

경봉스님 오도송 <극락암 삼소굴 주련>

삼소굴을 나와 곧바로 삽삼전(卅三展), 또는 조사각(祖師閣)으로 불리는 선방건물로 향했다. 예전에는 금당인 무량수각(無量壽閣) 옆에 자리잡은 정수보전(正受寶展)을 선방채로 사용했지만 현재는 다각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뒤에 자리잡은 삽삼전(조사각)을 좌선처로 삼고 있다고 한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노르스름한 할로겐 등이 약간은 어둡게 밝혀져 있다.

그 조명 빛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가섭 및 아난존자를 중심으로 인도로부터 중국을 건너 한국에 불법을 전한 33성현들의 진영이 선방내부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왜 이 건물을 조사각이나 삽삼전이라 명칭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삽삼조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도 불조(佛祖)의 혜명은 잇겠다는 큰 원력으로 치열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했을 선방납자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알 수 없는 희열감이 느껴진다. 조금 전까지 영축산의 산세와 가을빛에 설레었던 마음은 비할 것이 못되는 듯 온데간데없고, 언젠가는 꼭 이 자리에 앉아 보고 싶다는 간절함과 설렘에 온몸이 약간 떨렸다.

선방채를 나서며 도반에게 평소 몇 분의 스님들이 수행을 하시느냐고 물으니, 이번 동안거 결제에 25분의 스님네들이 방부를 들였다 한다. 하루일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고 하니, 원주실에서 <정진시간표>를 얻어 주었다.

03:00 예불(禮佛), 입선(入禪), 11:20 오공(午供), 05:00 방선(放禪), 14:00 입선(入禪), 06:00 조공(朝供), 16:00 방선(放禪), 소지(掃地), 08:00 입선(入禪), 17:00 약석(藥夕), 10:00 방선(放禪), 19:00 예불(禮佛), 입선(入禪), 11:00 사시예불(巳時禮佛), 22:00 방선(放禪), 취침(就寢)

시간표를 살펴보니 하루에 대략 9~10시간 정도 정진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산철시간표이기 때문에 실제로 안거가 시작되면 좀 더 빠듯하게 돌아간다는 것이 도반의 설명이다. 좌선시간에 겨우 몇 십 분을 앉아서도 다리가 저리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순간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선방채 뒤편으로는 약간 구릉진 곳엔 독성각(獨聖閣)이 자리잡고 있었다. 극락암을 방문한 신도분들이 꼭 방문한다는 그 곳엔 선방이라는 특수한 환경 탓인지 염불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다들 조용히 절이나 좌선을 하고 있었다.

도반과 함께 삼배를 올리고 전각의 우측으로 난 대숲을 바라보며 무량수각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대숲을 스치는 청명한 가을 바람소리가 마치 파도소리처럼 가슴속 티끌을 휘감고는 다시 대숲으로 사라져 들어간다. 조금 전 선방채에 들어서며 설렘과 기대감에 한껏 달아올랐던 심신이 조금은 가라앉는듯한 느낌이다. 도반이 무량수각 옆에 있는 시원한 석간수 한 구기를 떠준다. 병풍처럼 둘러싼 영축산과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붉은 단풍잎을 투과하며 발갛게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들이키는 한모금의 석수에 그동안 쌓여있던 온갖 번뇌가 말끔히 씻겨가는 듯하다. 입가에 묻은 물기를 훔치며 석조(石槽)위에 쓰인 ‘산정약수(山精藥水)’라는 비석을 보니 ‘물에 배울 일’ 이라는 제목으로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람과 만물을 살려주는 것이 물이다.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다.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 것은 물이다. 맑고 깨끗하며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는 것은 물이다. 넓고 깊은 바다를 이루어 많은 고기와 식물을 살리고 되돌아 이슬비……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한다.

<극락암 석간수 비석에 쓰인 글>

‘물에서 배울 일’ 이라는 글에는 선방 스님들의 노력과 목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은산철벽을 마주한 것과 같은 어려운 굽이에서도 더욱 정진해 나가고 결국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고 깨달음에 이르러서는 그 경지를 중생들에게 다시 회향하여 이익되게 할 수 있는 것,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큰 원력을 지닌 대승보살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나도 언젠가 꼭 이 도량에서 정진해 보겠다는 각오가 생겨난다. 앞으로 인연이 있다면 반드시 이곳에서 다만 몇 철이라도 지내고픈 마음이 일었다. 그동안 잠시 망각했었던 출가자의 본분사에 대한 자각 또한 일었다. 그저 타성에 젖어 잿빛 옷에 의지하여 크고 깊은 시은을 받으면서도 세월만 안연히 보내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문득 스스로의 자성불을 깨치고자 하는 이곳 선방이 자리 잡은 암자의 명칭이 극락암이라는 생각이 의아하게 스친다.

하지만 선과 정토, 자력수행과 타력수행이라는 정의적 명칭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현세의 삶에서 치열하게 정진해 나가면서도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서라도 극락정토에 태어나 불조의 진리를 깨치고자 했던 옛 스님네들의 구도정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순간 저녁공양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무량수각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구한말 고종과 영친왕의 만세를 기원하는 명자(名字)가 새겨진 작은 종의 은은한 소리가 100여년의 세월을 타고 영축산 줄기를 따라 번져나갔다. 약간의 아쉬움과 설렘을 뒤로하고 가을 빛 창연한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는 홍송(紅松)이 붉은 노을을 머금고 무심히 서있었다. 나는 수첩에 적어 두었던 선방채의 주련에 쓰여진 글귀를 다시금 펼쳐 본다.

조사의 뜻은 공(空)인 듯 공 아니니, 신령된 기틀이 어찌 공덕이 있고 없는데 떨어지랴

삼현(三賢)보살은 아직 이 뜻을 밝히지 못하였고, 십지(十地)보살인들 어찌 이 도리를 다 알았다 하리.

그물을 벗어난 고기가 다시 물에 걸리나니, 머리를 돌이킨 석마(石馬)라야 모래 그물에서 나오도다.

은근히 조사서래의 뜻을 말하였노니, 서쪽이니 동쪽이니 하는 것은 묻지 마소.

<극락선원 삽삼전(조사각)> 주련

신경스님, 반야사, 월간반야 2010년 5월 제1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