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에 옷 두 번 기워입고

일년의중보 一年衣重補 한 해에 옷 두 번 기워 입고

일일발양세 一日鉢兩洗 하루에 바리 두 번을 씻고 사네.

불효산중취 不曉山中趣 산에 사는 흥취를 모른다면

산중역진세 山中亦塵世 산중도 속세와 다를 바 없네.

산중에 사는 검소하고 단순한 생활의 흥취를 읊은 소박한 시이다. 입산수도의 일생은 아무래도 속진의 생활과는 다르다. 물자가 궁색해도 오히려 그것이 안빈낙도의 자기 분수를 충족시켜 주는 만족이 된다. 하루에 두 끼 공양 챙기고 일 년에 두어 번 옷이 떨어졌을 때 바느질 해 꿰매면 된다. 산에 사는 흥취는 산에 사는 사람만이 알뿐이지 도시의 숨 가쁜 생활과는 아마 세월 그 자체가 다를지 모른다. 언젠가 이런 말을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산을 오르내려도 산을 알려면 산속에서 잠을 자다가 한 밤중에 일어나 산의 숨소리를 들어보아야 산을 알게 된다”는 말을 했더니 몇 사람이 수긍이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산에 있어도 마음이 산심에 젖지 않으면 속세와 마찬가지라는 마지막 구절에는 어떤 경책의 침이 숨어 있는 말이다.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의 시문집에 수록된 ‘산거(山居)’라는 시이다. 평생을 학문과 수행에만 정진한 학승으로 소박한 일생을 살아 후대의 귀감이 된 스님이다. 특히 스님의 업적은 쇠미해진 이조 말엽의 불교 교학을 크게 일으킨 점이다. 많은 경전을 연구, 사기(私記) 등을 저술하였고 또 후학을 제접하는 많은 강의를 하여 교맥을 계승하게 했다. 스님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서 편찬한 『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이라는 문집이 전해지는데 그의 문인 영월계신(靈月誡身)에 의해 편찬되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월 제50호

한 줄기 차가운 물 맑고 그윽해

일파한원청차유 一波寒源淸且幽 한 줄기 차가운 물 맑고 그윽해

환산횡야등한류 環山橫野等閑流 산을 돌고 들을 질러 흘러만 가네.

연연자득조종세 涓涓自得朝宗勢 졸졸 흘러서 바다에 들기까지

종고우금서불휴 從古于今逝不休 예부터 지금까지 쉴 줄을 모르구나.

청산에서 흘러나온 한줄기 물이 산 밑을 돌고 들판을 가로 질러 바다를 향하여 흘러간다. 알 수 없는 옛적 태고(太古)적부터 그렇게 쉬지 않고 흘렀으리라. 여기서 조종(朝宗)이란 강물이 흘러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시간의 진행을 따라 통과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지 만물은 윤회의 강물에 떠다니는 부표(浮漂)와 같은 것이다.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중생의 윤회도 쉬지 않는 것일까?

영허해일(暎虛海日:1541~1609)선사의 이 시는 제목이 흐르는 물(流水)이다. 물이 바다에 이르기까지 흐르고 흘러 쉬지 않는다는 단순한 주제이지만 흐르는 물을 보고 느끼는 수도인의 정서는 자신이 깨달음의 바다를 향하는 한 줄기 강물이 되어 각해(覺海)에 이를 때까지 가고 가야하는 자기 길을 은근히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허스님은 서산 스님의 법은 이은 제자로 호가 보응당(普應堂)이었다.

한 잔의 차에

일완다출일편심 一椀茶出一片心 한 잔의 차에 한 조각 마음이 나오니

일편심재일완다 一片心在一椀茶 한 조각 마음이 차 한자에 담겼네.

당용일완다일상 當用一椀茶一嘗 자, 이 차 한 잔 마셔보시게

일상응생무량락 一嘗應生無量樂 한 번 맛보면 근심 걱정 모두 사라진다네.

차에 관한 시 한편을 소개하게 됐다. 예로부터 우리 불가(佛家)에서 차를 애용해 왔다. 특히 선가(禪家)에서는 일상생활에 차는 필수적으로 쓰이는 그야말로 다반사(茶飯事)의 하나였다. 지금도 선방에는 차 마시는 시간이 있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이 이래서 생겼다. 차를 마시는 것 자체가 선의 경지에 든 것이라는 의미다.

이 시는 함허득통(涵虛得通1376~1433)선사의 시이다. 조선조초의 스님으로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하다 21살 때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고 인생무상을 느껴 출가하였다고 한다. 제방을 다니며 수행정진 하다가 황해도 평산 자모산 연봉사에서 작은 방을 얻어 함허당이라 이름하고 3년간 정진한 이후 함허당으로 알려졌다. 세종대왕의 청에 의해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선비대비(先妣大妃)의 명복을 빌고 왕과 신하들을 위해 법을 설하기도 했다. <원각경소>, <금강경오가해설의>, <현정론>, <유석질의론>등 저서를 남겼으며 <함허당득통화상어록>이 전해진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8월 제81호